“아버지는 멀쩡한 새집 놔두고 왜 이러고 계세요. 옛날 물건 다 정리하고 마을로 내려오시라니까요.”
수한상 할아버지의 작은 집 벽장 속에는 할아버지만큼이나 수상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공기총, 불에 타다 만 구두와 책, 면도칼, 털이 다 죽어 납작해진 오리털 잠바 등. 벽장 속 물건들은 오랜 세월 탓에 낡고 바래고 녹슬어 버렸지만 그만큼 저마다의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드디어 빼앗긴 땅을 찾을 때가 되었다. _ 「덤벼라 곰」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산기슭의 포도밭이었다. 하얀 반달무늬,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지닌 곰은 웅이가 가는 곳마다 귀신같이 나타나 엄마 아빠가 애써 가꾼 버섯도, 낚시로 잡은 물고기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렇게 쫓겨 다니던 어느 날, 웅이는 고모부의 창고 구석에서 기다란 가방을 발견했다. 진짜 총이 들어 있는 가방을 말이다!
그러니까 오리를 네 마리만 잡자 이거죠? 고기는 먹고 털은 옷 만들고. _ 「봄을 부르는 옷」
“내 옷은 개털이라도 마누라는 오리털, 내 옷은 닭 털이라도 자식 옷은 오리털, 아싸! 오리털! 오리털이 최고야!” 겨울 준비를 위해 찾은 장터에 옷장수의 목소리가 유독 우렁차다. 폭신하고 도톰한 오리털 잠바를 본 웅이 아빠 은규는 춥고 긴 지리산의 겨울을 보낼 웅이를 떠올리며 한동안 고민하지만 끝내 사지 못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저녁 내내 잠바가 눈에 밟혀 결국 오리털 잠바를 직접 만들기로 하는데.
내 잘못이야. 그때 누나한테 아기를 안겨 주지 말걸……. _ 「누나와 아기」
은규네 집은 요즘 누나 때문에 살얼음판이다. 사건의 시작은 목사님네 아기 예일이가 돌고 돌아 누나에게 오게 된 일이었다. 내내 울어 대던 아기는 신기하게도 누나 손에만 가면 울음을 멈추었고 누나는 자연스럽게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며 아기를 돌보았다. 아버지는 홀아비인 목사님네 아기를 돌보는 누나의 모습에 불같이 화를 내지만 누나는 아기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를 어쩌지…….
명아, 이제는 안 뜨겁지? 그렇지?_ 「내 동생 진달래」
성이는 피가 흐르는 코를 쓱 문지르며 약방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제 오빠보다도 당차고 호기심이 많았던 다섯 살의 어린 여동생 명이. 이발소에서 아버지를 돕겠다고 거들다가 그만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꽃 핀 복숭아나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몸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어른거려 성이는 숨찬 달음질을 멈출 수가 없다. 약방에 가면 명이를 다시 웃게 할 신기한 약이 있을 것만 같아서.
흘러가는 시간, 멀어지는 사람, 잊혀 가는 것들을 잇는 정겨운 이야기
제5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 후, 13년 만에 개정판으로 재출간
2004년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심사 당시 『덤벼라, 곰!』은, “‘삶을 감싸는 생명의 빛’이라고 압축할 수 있는 작가의 주제 의식이 치밀한 구성의 힘과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흐르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도시와는 달리 자연이 중심이 되는 곳, 그 안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낸 동화였다.
개정판에서도 기존의 책이 담고 있는 작가의 주제 의식과 이야기의 힘은 그대로이다. 다만 각 단편의 주인공을 지리산에서 쭉 살아온 삼대로 바꾸어, 흩어져 있던 네 개의 시간을 하나의 세월로 이었다. 또한 지리산을 찾은 도시의 아이를 등장시켜 해 질 녘까지 산과 들을 뛰어다니던 하루, 대나무를 꺾어 하는 낚시, 닭과 오리로 가득한 장날 아침의 버스 등 이제는 생경해진 풍경을 지금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판에서는 현재와 과거를 찬찬히 이어 보려 했다. 멀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도 잇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을 지리산과 그 품에서 살아가는 정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로 묶게 되어 마음이 흐뭇하다. -<작가의 말>에서
개정판의 새로운 주인공인 동주는 이런 작가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인물이다. 동주는 작품 안에서 각 이야기의 주인공인 성이, 은규, 웅이 삼대를 잇고 그들의 60년 세월을 잇는다. 작품 밖으로는 책 속의 주인공들과 독자들을 잇고 작가와 독자의 시간을 잇는다. 그래서인지 동주를 통해 전해지는 지리산 이야기는 마치 추운 겨울날, 이불 속에서 듣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고 따뜻하다.
화가 이다연은 색과 선의 강약으로 이야기의 맛을 한층 살려 주었다. 넓고 고요한 지리산의 풍경은 끊김 없는 굵직한 선으로 시원스럽게,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은 다양한 색 톤과 패턴을 사용해 유쾌하고 생생하게 표현했다. 전반적으로 일정하고 차분한 색감을 지닌 그림들은 마치 오랜 세월을 머금은 옛 사진을 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