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개의 유행어로 들여다본
한국사회, 한국 사람의
생각, 나날, 유희, 물정
그리고 정치!
평범한 하루, 먹고 말하고 노는 것에서부터 미증유의 탄핵까지.
한국 사람은 역사의 ‘기점’이라 불리는 지난 몇 해를 어떻게 살아왔나?
잠깐 유행했다 흘러가는 듯 보이는 시쳇말들은
의외로 그 나날들을 썩 훌륭하게 포착해낸다.
그것도 유행어여서, 유행어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령 “헬조선”이라 불린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수저” 청년들은
“혼밥”을 해가며 “열정 페이”에 시달렸으나,
“답정너”에 굴하지 않고 “ㅋㅋㅋ”을 잃지도 않으면서
“포스트잇”으로 연대하고,
“주모자”가 되어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시민을 “개돼지”라 부르고,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아대고도
“법꾸라지”처럼 책임을 피해 다니던 “레임닭” 정권은
결국 시민에 의해 “탄핵”되어 “축출”당했다.
가볍게 쓰인 이 말들은,
그래서 결코 ‘가볍게만’ 기록될 수는 없다.
적대 정치, 패권 정치와 달리
‘갈등하는 민주주의agonistic democracy’의 언어들이
으레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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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hquake. 2017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꼽은 말이다. 젊음youth과 지진earthquake의 합성어인 youthquake는 애초 청년 문화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찬란하게 꽃피었던 1960년대에 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적·문화적 격변을 일으킨 그들의 문화를 일컫는 말이었다. 우리말로 치면 ‘X세대’같이 철지난 듯 보이는 이 단어가 5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며 ‘Antifa’(반反파시즘) ‘Broflake’(자신의 가부장적 시각에 반하는 진보적 사고방식에 쉽게 화를 내는 남성) 등을 제치고 옥스퍼드 ‘올해의 단어’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 배경에는 영국 노동당의 약진과 극우주의자 마린 르펜을 누르고 마크롱을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한 청년 세대의 사회 참여가 있었다. 한편 미국 온라인 사전인 메리엄웹스터는 페미니즘을 2017년의 단어로 선정했다. 트럼프를 앞세운 백인 남성 사회의 여성혐오에 반하여 전 지구로 퍼져나간 ‘여성 행진Women’s March’, 할리우드 영화계의 만연한 강간 문화를 고발한 ‘미투Metoo 캠페인’ 등 여성의 행동이 그 주역이었다. 이들 유행어가 보여주는 세계상은 극우주의, 차별과 혐오, 반지성주의 등의 득세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다. 그러니까 유행어는, 반짝 소비되고 마는 시쳇말처럼 보일지라도 지금의 세계를 포착해낼 도구로 쓰이는, 그것도 꽤 적절하고 효율적이면서 대중적이기까지 한 최전방의 언어인 것이다.
문화평론가 이재현의 『유행어 사전』은 2015년 6월부터 2017년 3월까지 한국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시쳇말 아흔 개를 그 낱말의 어원, 현상, 영향을 통해 분석한 책이다. 알다시피 이 시기는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학계와 언론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가 되리라고 전망했고, 사실 그 전부터 우리는 알았다. 범상치 않은 시대를 살아낸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에서, 광장에서 일찍이 체험하고 목격해온 사건과 현상들을 통해서. 그 과정에서 숱한 유행어가 부활하거나 탄생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유행어를 통해 현시대를 이야기했다.
유행어들이 보여주는 한국사회
2015-2017
『유행어 사전』의 첫 표제어는 “슈퍼 전파자”[감염 환자 중에서도 보통 사람보다 감염률이 더 높은 사람]다. 세월호 이후 또다시 반복된 정부와 유관기관의 무책임과 무능력으로 있어서는 안 될 수많은 희생을 낳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로 인해 생겨난 단어다. “물대포”[시위 군중을 해산시킬 때 경찰이 사용하는 위해성 장비]는 원래 존재했지만, 이례적으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말이다. 고故 백남기 씨의 희생으로 경찰의 불법적 진압이 거센 비판을 받았다. 물론 어두운 시기였다고 해서 온통 이렇게 암울한 단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시기란, 해학과 풍자를 좋아라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 특유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의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웃픈’[웃기고/웃긴데 슬픈] 단어들이 탄생했다. “번역”[한 나라말을 다른 나라말로 옮기는 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 로맨스 화법, 중언부언 화법, 지시어 남용 화법, 깨알 화법 등을 (우리말임에도 불구하고) ‘번역’해야 하는 못마땅한 처지를 익살맞게 표현한다. “박ㄹ혜”[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에서 형태의 유사성에 기대어 박근혜를 표기하는 방식] “법꾸라지”[법률+미꾸라지. 미꾸라지처럼 민주 질서를 흐려놓으면서 법에 의한 처벌을 능수능란하게 피해가는 사람] “레임닭”[‘레임덕’을 대통령 별명이 갖는 시적 각운 효과에 주목해서 변형시킨 것] 등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함께, 그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려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유행어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세대인 청년들의 언어에도 그 사정과 문화가 녹아들어 있다. “썸”[정식으로 사귀기 전에 감정적으로 교류하면서 탐색하는 과정이나 상태]은 정식 관계로 나아가기 전 단계의 썸도 있겠지만, ‘계산하는 주체’의 등장으로 관계에 있어 치러야 하는 부담과 비용을 피해 썸만 타는, 혹은 경제적 처지로 인해 정식 연애를 하지 못하고 썸만 타는 이들의 복잡한 심리도 얼마간 투영돼 있다. “혼밥”[혼자 밥 먹기 혹은 혼자 먹는 밥의 준말]이나 “열정 페이”[일부 악덕 자본가들이 청년 세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써먹던 논리] “흙수저”[부잣집 자식을 가리키는 금수저와 은수저의 반대말] 같은 말은 청년 세대가 체감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간결하고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헬조선”[젊은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사회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라 부르는 이곳에서, 청년 세대는 정치적·윤리적·문화적으로 삶 전체와 삶의 갖가지 중대한 행위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책임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존재로서 “ㅇㅈ”[‘인정’의 초성을 딴 말]받지 못했다. 이는 가난한 노인 세대나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ㅇㅈ 요구/ㅇㅈ 투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 사회의 미성숙함을 그대로 보여주며,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말로써 변주되고, 고착화된다. 미리 답을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그 자체를 부정하기, 반대 세력을 ‘불순 세력’으로 몰아가고 논의에서 배제시키기 등의 방식은 유신 체제, 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세월호 참사 등에서 수없이 반복돼온 프레임이다. 상식과 합의가 배반당하고 부정不正과 반동反動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에 반기를 드는 “프로불편러”[“이거 저만 불편한가요?” “이거 나만 불편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불편한 사람들이 현실에 눈감지 않고 기꺼이 “주모자”[이화여대 학생들의 점거 농성 과정에서 교수 및 교직원의 출입을 막은 사건 때 터무니없게도 경찰에 의해서 소위 감금을 주도한 주동자들로 몰려버린 사람들]가 되어 “포스트잇”으로 연대하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선 까닭에 우리는 지금 딱 이만큼의 현실을 살아간다.
“수포자” “뇌섹남” “트롤” “아재” “힙스터” “애데릴라” “저성과자” 등도, 요지경 같아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감각을 어떤 고상한 말보다 잘 담아내고 있다. 한편 “인공지능” “비트코인” “증강현실” “종이 신문”의 위기 등 발달하는 기술과 관련된 말도 우리 삶의 문제와 직결된다. 또 “브렉시트” “러스트 벨트” “post-truth” “성난 백인” “You’re Fired!” 등 서구사회로부터 전해진 단어들은 우리의 현실, 우리가 어렴풋하게 혹은 극명하게 느끼는 이 수상쩍은 감각이 지구적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실감케 한다.
사전을 찾거나 읽다 보면,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직시할 때 환기되는 의미들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유행어 사전』이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의 표제어들은 더 그렇다. 유행어란 본디 널리, 순식간에 소비되지만, 누구도 그 의미를 오랫동안 깊이 곱씹어보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위에 든 단어들이 말해주는 바는 그리 손쉽게 무시하거나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유행어 사전』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말, 그러나 곧 우리로부터 멀어질 말들의 의미를 동시대인으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들여다보고 음미해보는 것. 저자는 ‘유행어’라는 분석 대상에 딱 들어맞는 특유의 속도감과 유머 감각으로 이 단어들을 마침맞게 해설해준다. 갑골문자와 라틴어 등 어원을 통해 들여다볼 때, 갖가지 사회 현상에 비춰 해석해볼 때, 또 저자의 관觀에 의거해 감상해볼 때, 스스로 생각해볼 때 우리가 평소 입에 올리던 이 단어들이 어떤 의미와 뉘앙스로 다가오고 변주되는지를 통해, 우리는 동시대인으로서 스스로의 시각과 감각을 점검해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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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정치적으로 보자면, 답정너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 민주주의에서는 서로 다른 사회 집단이 갈등하고 경쟁한다. 어떤 문제든 간에 사전에 가급적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며, 이를 바탕으로 충분히 토론하고 숙의한 뒤에, 일정한 단계에서 투표를 통해서 결정한다. 투표 결과에 대해 소수는 다수에게 승복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소수의 권리와 의견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
_「답정너」
성숙한 사회라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도 정치적·윤리적·문화적으로 그들의 삶 전체와 삶의 갖가지 중대한 행위들을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며 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존재임을 ‘ㅇㅈ’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전반적으로 볼 때 그것을 인정하는 성숙한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누군가를 ‘ㅇㅈ’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사회적 현존및 고유의 문화적·윤리적 가치를 제대로 혹은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승인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_「ㅇㅈ」
영어 ‘private’의 라틴어 어원은 ‘privare’(탈취하다)다. 즉,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탈취해서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행위나 과정,혹은 그 결과물 등을 나타낸다. 라틴어에서는 private(사적인)과 republic(공동체의 것)이 의미상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republic의 구성 요소인 public은 라틴어 pubes(성년 주민)에서 생겨났다. 성년 주민의 세계에 한해 공적이란 의미를 사용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매우 불합리해 보이지만, 어쨌든
pubes는 영어 단어 puberty(사춘기)에 남아 있다.
_「공화」
약간 손을 대서 프로이트를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각 개인을 ‘개인적 고립의 터부’에 의해 타인들과 분리시키고 사람들 사이에 낯섦과 적대감의 감정이 형성되도록 하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다 똑같았을 사람들이 지닌 사소한 차이 때문인데, 이것으로부터 더 나아가면, ‘사소한 차이들의 나르시시즘Narzissmus der kleinen Differenzen’이라고 하는 적대감을 도출해낼 수 있다.” 좀더 나중에 프로이트는, 사소한 차이라는 개념을 지리적으로 인접한 두 부족 사이의 불화나 적대, 또는 심지어 같은 정치·사회적 단위 안에서 에스닉한 차이 등으로 인해 생기는 불화나 적대를 해명하는 분석 도구로 확장했다. ‘사소한 차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집단 심리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테마인 자아(집단)와 타자(집단) 사이의 차별적 심리 구조를 해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_「사소한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