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닮은 목소리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작가가 들려주는 시대의 기분들
2018년 1월 22일은 고故 박완서 작가의 7주기가 되는 날이다. 지난 2011년, 한국 문단의 가장 아름답고도 찬란한 보석은 별이 되었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조국의 광복과 한국전쟁, 남북 분단, 4․19, IMF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몸소 견뎌내고 2011년 영면에 들기까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동화, 산문집 등 다양한 방면에서 수많은 걸작을 쏟아낸 작가 박완서. ‘한국문학의 어머니’로 불리던 작가의 애칭으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는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도 사랑은 영원한가’라는 작가의 한 에세이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작가는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그 사랑이 영원할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그리고 작가의 목소리를, 가장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 듣기에 ‘산문(에세이)’만큼 좋은 형식은 없으리라. 타계 7주기를 맞이하여 문학동네에서 산문집 두 권을 출간한다. 기존의 박완서 산문집 시리즈 일곱 권에 뒤이어 작가가 1990년대에 쓴 에세이 두 권을 함께 내어놓는다.
박완서 작가는 산문이라는 장르를 ‘일상의 예술’의 경지까지 이끌어낸 일급 에세이스트이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삶과 글이 일치하는 생을 살아낸 한 작가의 당연한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고도 따스한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때로는 엄한 어른처럼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우리 사회를 해부하는 작가의 산문은 특유의 생생하게 흘러넘치는 디테일과 가감 없고 소탈한 문장으로 하여금 독자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갈 것이다. 또한 슬픔을 말할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절망을 이야기할 때에도 희망을 등지지 않는 진솔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이 따뜻함을 넘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케 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이번에 출간되는 산문집 역시 작가 특유의 입말을 고스란히 살리기 위해 다양한 표현들을 보존하는 쪽으로 편집했다. 시대의 흔적을 보여주는 날 표현들도 과감히 남겨 한국 현대사의 사료가 되게끔 만들었으며, 동시에 박완서 소설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값하도록 최대한 섬세하게 다듬었다. 또한 박완서 문학의 가장 탁월한 연구자이기도 한 맏딸 호원숙 작가가 원고를 감수하였고, 박완서 작가의 손녀 김지상씨가 찍은 작가의 유품으로 표지를 만들어 그 풍성한 의미를 이어나갔다.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분수령인 시대가 바로 1990년대이다. 바로 그 시절에 써내려간 두 권의 산문집 『한 길 사람 속』과 『나를 닮은 목소리로』를 독자들 앞에 내어놓는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작가이자, 여성이자, 시대의 어른이었던 박완서. 그의 진솔하고 투명한 산문 속에서 우리는 지금 이곳을 힘껏 살아가고 살아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온몸으로 살아냈고 진심으로 써내려간 두 권의 책, 이제 박완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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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목마다 사는 맛이 마련돼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박완서 산문집 8권 『한 길 사람 속』은 1995년에 발간된 동명의 산문집을 재편집한 것이다. 외환 위기 이전, 건국 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보내던 1990년대 초중반의 짧았던 좋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묶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고, 해외여행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퍼스널 컴퓨터가 각 가정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 작가는 이 자유롭고도 휘황한 시절에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소회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한 길 사람 속』은 점점 더 다양해지는 한편 파편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오랜 시간 우리 사회를 버텨내온 어른으로서 걱정 어린 말과 응원을 새 세대에게 건넨다. 또한 이번 산문집의 큰 축은 ‘여행’이기도 하다.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중국땅을 두루 굽어보며 체험한 문학 기행 속에는 옛 세대만이 느끼고 말해줄 수 있는 시대의 아픔과 스펙터클이 가득하다. 박완서 작가가 다져온 문학 세계를 짐작해볼 수 있는 독서 이력, 일상을 살아가던 한순간 계시처럼 쏟아지는 생의 아름다움과 예찬이 담박한 문장 속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우리가 ‘문학’과 ‘인생’을 ‘여행’에 빗대는 까닭을 독자들은 『한 길 사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에서
미처 짐을 풀 새도 없이 도로 가지고 홍콩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나니, 처음 가보는 외국 풍물에 대한 기대나 설렘보다는 다리 뻗고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이 나이에 할 짓이 아니다 싶었다. 자신의 딱 부러지지 못한 성질에 짜증도 났고, 동행한 두 사람의 기대와 활기에 넘친 모습에 비추어 나의 목적 없음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순전히 얹혀 가는 꼴이었다. ‘그래 기왕 얹혀 갈 바에는 동행에게 부담이나 안 되게 먼지처럼 얹혀 가자, 먼지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먼지처럼 자유롭게.’ 그렇게 생각하니 전혀 새로운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_179쪽, 「부드러운 여행」 中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친구나 후배에게 내가 가장 즐겨 하는 선물이 있다면 아마 그럴듯한 데서 밥이나 술을 사는 일일 것이다. 맛있는 것을 같이 먹는 일은 상대방이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좋고 형체를 남기지 않고 느낌만 남아서 좋다. 꽃이 가장 좋은 선물임은 그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의 단명함 때문이기도 하리라. _212쪽, 「내가 꿈꾸는 선물」 中
나는 요새 십 년이 여일하게 마당을 등지고 놓아두었던 소파를 마당을 바라보도록 바꾸어놓고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다. 스산한 바람에 으스스 떠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떨리고, 가을비에 뚝뚝 지는 잎을 보고 있으면 흙냄새가 아련한 그리움처럼 코끝에 와닿는다. 그리고 어디선가 읽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곰곰히 스민다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라는 소리에 싫지 않은 마음으로 공감한다. 삶의 길목마다 사는 맛이 마련돼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_218쪽, 「전망 좋은 집」 中
나에게 언짢은 일이 있을 때 위로해주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해준 그들의 고마운 마음을 나는 어쩌면 무쪽처럼 떼어먹기만 하고 갚아준 적이 없었을까. 답장을 할 것처럼 아니, 전화라도 한 통 걸 것처럼 분류만 해놓고 이내 잊어버리고 만 내 마음이 정말 싫었다.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운 친지가 내 곁에 아무리 많아도 내 마음이 굳게 닫혔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내 집에 창을 냈으니 내년부터는 내 마음에도 창을 내야겠다. 어떤 나이도 행복해지기에 늦은 나이는 없으리라. _220쪽, 「전망 좋은 집」 中
고궁을 낀 돌담길에도 낙엽이 지천으로 쌓여 딱딱한 보도블록이 마치 흙길처럼 부드러웠다. 그런 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정도의 인사로 스쳐가고 말아도 되는 사이보다 조금 더 친하고 반가운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머뭇거렸다. (…) 바쁘지 않으면 고궁에 들어가 잠시 바람을 쐬지 않겠느냐고 상대방이 먼저 말했다. 마침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차라도 한잔, 소리보다 어찌나 신선하게 들리는지 순간적으로 살맛이 다 나는 것 같았다. 덕수궁 안의 은행나무들이 자즈러지게 예쁜 빛으로 물든 잎을 아낌없이 떨구고 있었다. _260~261쪽, 「고궁에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