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집 제목이 알쏭달쏭하다. 설라므네 설라므네 그래설라므네…… 부드럽게 흘러가고 굴러가는 소리는 자꾸만 발음해 보고 싶어진다. 어른들은 설핏 짐작할 뜻이지만 아이들은 마냥 낯선 재미에 웃음을 터뜨리며 거듭 소리 내 읽을 말. 도대체 무슨 뜻이고, 설라므네 할아버지는 또 누구일까.
동네 사람들이
설라므네라 부르는
설라므네 할아버지는
아침저녁 설라므네 하면서
느티나무 정자 밑을 지키고 있네
전쟁 통에
그래설라므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그래설라므네
내가 비 사이로 막 달려가 포탄을 뚫고
그래설라므네
쫙— 슬라이딩을 해 날아 가지고
그래설라므네
그때 구해 준 게
저 똥개 조상 아이가
왜 그렇게 목숨 걸고 구해 줬는데요?
에 그래설라므네
저것도 목숨 아이가
수백 번은 더 들은
그래설라므네 할아버지의
그래설라므네
그래설라므네
_ 「설라므네 할아버지」 전문
설라므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통에서의 활약을 길게 뽐내고 있다. 그런데 장황한 이야기의 끝이 왠지 좀 싱겁다. 할아버지가 “비 사이로 막 달려가 포탄을 뚫고” “쫙— 슬라이딩을 해 날아 가지고” 구한 존재는, 다름 아닌 “저 똥개 조상”이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구해 줬냐고 묻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하다. “에 그래설라므네/ 저것도 목숨 아이가”.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구한 강아지는 새끼를 낳고 그 새끼는 또 새끼를 낳아, 지금 할아버지 옆에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는 “저 똥개”가 되었다. 사람의 목숨이 소중한 만큼 강아지 한 마리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지당한 사실이 종종 잊히고 마는 사회다. 설라므네 할아버지가 구해 낸 생명의 무게, 시간의 무게는 새삼 묵직하다. 설라므네, 설라므네, 실은 별 의미가 없는 소리가 덧붙은 문장들은, 자칫 잊을 뻔했던 의미까지 부드럽게 그러안으며 우리 입 안에서 구르고 또 굴러간다.
“고양이는/ 자동차를 안 타서/ 자동차 무서운 줄 모른다/ 그러니 자동차를 타는/ 우리가 조심해야지”(「사고 방지」)라는 다짐, “꽃이/ 텅텅/ 비었어// 비니까 거기/ 빗물도 차고/ 햇살도 담기고/ 더 예쁘다”(「호박꽃」)라는 중얼거림,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조는 소리”(「가을 마당」)에 귀 기울이는 어느 오후의 풍경 또한 우리의 시선을 낮추어 키 작은 존재들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말머리마다 꼭꼭 붙는 군소리처럼, 『설라므네 할아버지의 그래설라므네』에 실린 동시들에는 편편마다 크고 작은 존재들에 대한 따듯한 애정이 꼭꼭 묻어 있다.
아픈 역사가 깃든 땅에 뿌리박은 박철 문학
한 세대를 아우르는 깊고 넓은 시선
‘설라므네’는 별 뜻이 없는 군소리지만, 대표적인 이북 사투리이기도 하다. 단절된 지 오래된 이북의 사투리가 박철 동시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것은 그가 김포공항 근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언저리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떠나 본 적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처럼” 돌아왔다는 그곳은, 박철 문학이 뿌리박고 있는 토양인 동시에 우리의 아픈 역사가 깃든 곳이다.
“박철 시인의 어머니는 황해도 연백군에 사셨는데 6·25 전쟁이 터지자 잠시만 몸을 피하자, 해서 김포로 내려온 이래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런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고장이 김포나 강화 지역이지요. 박철 시인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그가 오랫동안 붙박이로 살고 있는 동네가 김포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_ 이상락(소설가)
이제는 더 이상 한강으로 오지 않는 갈매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에게 “언젠가는 다시 올 거야/ 할아버지/ 갈매기”(「갈매기 날다」)라고 건네는 말은 아릿하고 간절하다. “아빠가/ 동시를 읽어 주다가/ 눈물이/ 주/ 루/ 룩”으로 끝나는 짧은 시의 제목 「할머니 생각」이 주는 여운은 유독 길다. 동시 속 인물들이 한 시대를 오롯이 짊어지고 있는 탓이다. 전쟁을 겪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의 일생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 왔기에 박철 시인은 부모의 삶에, 나아가 한 세대의 삶에 도무지 무심할 수가 없다.
할머니 어릴 때는
옆집 우물물 마를까 봐
이웃이
돌아가며 두레박을 올렸대
아가야
윗집 수도 쓸 때
쉬었다 하렴
_ 「할머니 어릴 때는」 부분
이웃을 부르는 말이 ‘옆집’에서 ‘윗집’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여전히 “옆집 우물물” 신경 쓰듯 “윗집 수도”를 걱정하는 할머니가 있다. 힘든 시절 서로 간에 더욱 의지했던 정겨움을 간직한 모습이 “할머니 얼굴처럼/ 동글동글”하다. 그런가 하면 김장날 “고춧가루처럼” 매운 목소리로 아빠를 타박하는 할머니(「김장 담그는 날」)가 있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친구들과 함께 “바다사자처럼 누워/ 컹컹” 떠들며 노는 할머니(「화정공원」)도 있으며, 손녀와 공원으로 슬렁슬렁 저녁 산책 나온 할아버지(「두루미공원」)도 있다. 이처럼 『설라므네 할아버지의 그래설라므네』는 어제를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의 삶을 오목조목 펼쳐 보인다. 족히 한 세대를 아우르는 시인의 깊고 진득한 애정은 이렇게 동시로 태어났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해져 완성된 이야기
가족이 함께 쌓아 올리는 굳건한 시간의 힘
엄마와 아빠는
지금도 싸운다
30년 전 학교 담벼락에
누가 낙서했냐며
엄마가 아빠를
좋아한다고
_ 「낙서」 전문
『설라므네 할아버지의 그래설라므네』에는, 교과서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들이 가득하다. 긴 시간을 원료 삼은 이야기들은, 때때로 그 주인공이 어린 엄마와 어린 아빠이기에 더욱 재미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는 아이는 기꺼이 빠져든다. 긴 시간 속을 헤엄치며 놀고, 스스로 시간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한다. 어른이 말과 글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힘을 쥐여 준다.
아빠 눈이 큰 건
수수밭 때문
할머니가 땅콩밭 잡초를 뽑느라
세 살 아이
수수밭 속에 재운 걸
잊고 왔대
아빠는 그때 자다가 깨
할머니 찾느라 왕눈이가 되었대
내 눈이 큰 건
아빠 때문
그래서 내가 겁이 많은 건
아빠 때문
아니
수수밭 때문
_ 「이유」 전문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무섭고…… 무서운 게 너무 많은 아이는 겁이 많다는 사실에 불쑥 짜증이 났나 보다. 왜 나는 겁이 많을까, 곰곰 이유를 따져 본다. 눈이 크면 겁이 많다던데, 나는 눈이 커서 그런 걸까? 내 눈이 큰 건 아빠 눈이 크기 때문 아닐까? 아빠 눈이 큰 이유는 뭘까?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아이는 ‘내가 겁이 많은 이유는 수수밭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빠가 들려준 수수밭 이야기가 아이가 스스로 만들어 낸 이야기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다.
“비행장 마을에서 자란/ 아빠”가 “내가 어렸을 때 비행기는 떴다고/ 날아가는 것은 그냥 새나 같았다고” 말할 때, 아이는 “말도 안 돼” “책가방은 흔들린다고/ 무거운 건 그냥 돌덩이”(「큰 새를 향한 우리 가족의 주장」)라고 맞받아치기도 한다. 어른들의 말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외치는 당당한 모습은, 『설라므네 할아버지의 그래설라므네』가 “아빠가 두 아이에게 건네는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더해질 때 비로소 가족이 둘러앉아 와글와글 저마다의 이야기를 피워 내는 시간이 완성된다. 시인의 두 아이가 이미 어른이 되었음에도 동시집을 출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한 권의 동시집에는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완성해 온 이야기가, 가족이 쌓아 올린 굳건한 시간의 힘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