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20세기를 살아낸 한 지식인의 경험과 인간 탐구가
심오하게 녹아든 혁명소설의 걸작
“앙드레 말로를 단순히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문학연구자 윌리엄 라이터의 말이다. 1901년,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앙드레 말로는 1976년 숨을 거둘 때까지 문학과 미술비평 활동을 꾸준히 이어감은 물론 샤를 드골 정부에서 정보상과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프랑스 문화와 예술 전방위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박물관 강연을 들으며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갖고 아시아와 중동을 누비던 모험가로, 공산주의를 지지한 적극적 동조자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비행 출격을 나간 조종사로, 사이공에서 반식민지 운동을 펼치던 언론인으로, 세계대전 당시의 항독 레지스탕스로, 부조리와 고통이 존재하는 세계 곳곳에 있었다. 큰 걸음으로 20세기를 편력한 말로는 자신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굵직한 문학작품들을 완성해낸다.
『희망』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당시 파시스트에 대항해 공화군 비행사로 참전한 앙드레 말로의 기록이다. 말로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현실을 써내려가며 철학적 사색과 통찰을 가미하여 한 편의 소설로 엮어낸, 한 지식인의 관찰기이자 인간 탐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체험의 기록인 만큼 작품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생생한 내전의 참상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참혹한 전투 과정과 교전중의 배신, 시민들의 이유 없는 죽음과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민가의 풍경까지 내전의 면면은 야만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간의 형제애와 연대를 통해 하나가 되어 공동의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공화군 내에서도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로 나뉘는, 상이한 이데올로기를 지닌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종교적 성찰 역시 말로의 사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독교적 비전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독자는 혁명과 종교를 결합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숭고함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상징과 환기라는 문학적 장치를 활용해
종교 유산을 탐구하는 예술적 무대
말로는 현실을 천착한 내용에,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더해 독자에게 충분한 소설적 긴장감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희망』은 혁명과 기독교가 하나로 융합되도록 창작되었다. 공화국 군대의 창설 과정을 통해 로마교회의 탄생 과정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 혁명과 교회의 재탄생을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도록 구성해 원초적 기독교 정신의 ‘부활’과 ‘변모’, ‘정복’을 담아낸다.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상징시학을 활용한 코드와 암시는 등장인물의 행위와 대사에 다층적 의미망을 형성하며, 혁명의 현장에서 작가의 종교적・신화적 명상이 펼쳐지는 장을 구축한다. 기독교라는 위대한 유산이 탐구되는 예술적 무대인 셈이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혁명과 맞닿은 종교의 비전과 역사를 탐구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의 실제적인 전개와는 별도로, 시간의 분절과 시제의 변주가 기독교적 시간관에 따라 절묘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소설 속 혁명의 전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딕시대의 인간관과 종교개혁 당시 로마가톨릭의 위기, 그로부터 사백여 년이 흐른 20세기에 이르러 다시금 흔들리는 종교관과 인간상까지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간혹 분절되고 엉뚱하게 이어지는 인물의 대사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하며 독자를 작품으로 끌어당긴다.
앙드레 말로에게 종교적・신화적 정신은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켜 인간 조건의 극복과 희생의 위대함을 낳게끔 하는 토대이자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그리고 윤리적 탐구를 그 어떤 철학보다도 고차원적으로 펼쳐내는 사유의 보고다. 동과 서를 아우르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작가의 원대한 형이상학적 구도 안에 이 혁명소설이 자리하고 있다.
주인공이 없는, 혹은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
길고 짧은 쉰아홉 장으로 구성된 『희망』에는 20여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예술가, 학자, 노동자, 군인, 신문기자, 비행사, 농부였던, 그러나 이제는 반파시즘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인물들은 장면에 따라 주연이 되기도 하고 단역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정치적 기조는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고 따라서 언쟁이 일어나는가 하면 불미스럽게 떠나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 하나가 된 이들은 목숨을 건 여러 위기를 거치며 점점 단단한 형제애로 묶인다.
이렇듯 주연도 단역도 상정하지 않은 채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자 한 말로의 의도를, 이 소설의 제3부의 제목이 원래는 「농민」이었다는 사실과 떨어뜨려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상황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인물은 각 집단의 대표자들이지만 그들을 돕고 상황 변화에 기폭제 역할을 하는 인물은 어김없이 무명의 농민들이며, 이들은 지극히 냉혹한 현실만을 보여주던 서사에 마법과도 같은 희망과 온기를 부여한다. 제1부에서 히메네스와 마누엘을 향해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내 말하는 농민, 제2부에서 파시스트의 비밀 비행장을 알려주려 애쓰는 농민, 제3부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부상자들을 운반하느라 들것을 나르며 몇 시간 동안 산길을 내려오는 농민들은 다름 아닌 스페인 민중을 대변하며, 이름 없는 이들의 내재된 힘을 부각시킨다. 소설 말미, 음악에 몰입한 마누엘이 “인간들의 피보다 더 엄숙하고 대지 위 그들의 존재보다 더 불안한 것—그들의 운명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말로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숭고한 감정, ‘형제애’라는 이름의 희망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그는 뜨거운 형제애와 공동의 연대를 통해 “혼자서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 다다르기를 열망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