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00주년, 러시아 근현대 미술을 돌아보다
러시아 혁명기, 기존의 미술 전통을 전복하며 새롭게 등장한 러시아의 현대 미술
이동전람파와 마몬토프 서클, 광선주의와 쉬프레마티슴, 구축주의와 생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혁명을 이끈 러시아 근현대 미술의 풍경
두 연구자의 서신 교환
책에서 저자들은 서신을 교환하며 러시아 근현대 미술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펼쳐나간다. 편지글은 사적인 일상의 경험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러시아 미술에 대한 논의로 연결되는가 하면, 서로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때로는 견해차를 인지한 후 그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처럼 서신 교환이라는 형식은 연구 결과를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서로의 지식과 사유에 대해 반응하고 교류하며 더욱 풍부하고 역동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한다. 예를 들어, ‘원시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논의에서 파생된 자기의 타자화와 타자의 자기화에 대한 논의는 서신 교환 형식의 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제한 없이 자유롭게, 하지만 러시아 혁명과 현대 미술이라는 중심을 잃지 않은 채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논의는 각각 자신의 분야에 정통한 연구자끼리 교류하는 과정이 아니면 나올 수 없을 진귀한 장면이다. 이와 더불어 여행 중 발견한 역의 간판에 쓰인 서체에 대한 물음과 답변으로 이어지는 논의 또한 두 연구자의 신뢰가 담긴 교류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게 다가온다.
현대적 전환을 이끈 이동전람파와 마몬토프 서클
이동전람파는 러시아 미술의 현대적 전환을 이끈 가장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아카데미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나선 13명의 미술가에 의해 시작된 이동전람파는 ‘미술을 민중에게’라는 이상 아래 계몽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의 미술을 추구했다. 이는 미학적 현대성을 모태로 전개된 서유럽 현대 미술과는 다른, 러시아 미술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이동전람파 화가들의 그림에는 원시주의적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원시주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러시아 미술은 서유럽의 현대 미술과 그 궤를 달리한다. 서유럽의 미술에서 원시주의가 고전주의와의 결별을 위한 충격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면, 러시아에서는 타국이 아닌, 자국의 전통이 원시주의라는 이름으로 발굴되어 현대 미술의 전개와 결합된다. 이처럼 자국의 전통을 재전유한다는 점에서 이동전람파 화가들이 선보인 ‘원시주의’적 경향은 ‘러시아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이자 현대 미술 운동의 중심지가 된 모스크바에서 ‘마몬토프 서클’은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들의 모임이었다. 모스크바 교외의 작은 마을, 아브람체보에서 형성된 이 공동체는 자본가 사바 마몬토프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마몬토프 서클은 이동전람파의 이상을 이어받아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에서 러시아적인 것을 모색할 뿐만 아니라 민중의 삶을 위해 실천하는 생활공동체 역할을 해나갔다.
마몬토프 서클 출신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는 일리야 레핀이다. 러시아 민중의 삶과 역사를 담은 그의 그림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곧 다가올 러시아 혁명의 예감과 재현을 통해 부재의 전복을 염원하는 현전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리야 레핀을 비롯한 이동전람파의 미술은 곧 한계에 부딪힌다. 민족주의와 미술을 결합했던 이동전람파의 미술은 점점 거창한 민족주의적 관념을 담은 선전 양식으로 변해갔으며, 이로 인해 더 이상 레핀의 그림과 같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일리야 레핀의 제자인 미하일 브루벨은 이러한 흐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러시아 현대 미술에 새로운 활로를 튼다.
이동전람파는 러시아적인 것을 찾기 위해 전통에 몰두했지만 원근법적 재현이라는 서유럽 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달리 브루벨은 비잔틴 정교회 미술의 전통에서 탈원근법적 재현의 활로를 찾는다. 브루벨은 배경의 깊이를 없애고, 장식의 평면성과 인물 형상의 입체성을 드러내며, 해부학과 무관한 면 분할을 통해 입체성을 와해시키는 등 기존의 원근법적 재현에서 벗어난 그림을 보여준다. 이러한 탈원근법적 재현을 통해 러시아의 고전주의와 이동전람파의 리얼리즘을 동시에 극복한 브루벨은 혁명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의 시작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시작을 알린 화가는 나탈리아 곤차로바다. 곤차로바는 그녀의 남편 라리오노프와 함께 ‘광선주의’라는 새로운 추상 회화 운동을 선보이는데, 빛에 반사되는 대상이 보여주는 분할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그것을 색의 조합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기법을 응용한 광선주의는 기계 시대의 근대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예술이었다. 광선주의는 이후 등장할 말레비치의 쉬프레마티슴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한편, 쉬프레마티슴을 선보인 말레비치와 타틀린은 유물론적 미술의 장을 열어 구축주의의 기틀을 다진 거장들이다. 구축주의는 미술가의 정신이 아니라 미술의 재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예술 사조로, 미술가의 정신에서 기원하는 구성주의를 부르주아 미술의 핵심 원리로 보고 이를 거부한다. 이러한 구축주의의 방식은 그전까지 서양 현대 미술에 등장한 적이 없었고, 기존 미술의 규범을 완전히 뒤집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예술의 혁명’이었다.
구축주의는 1921년에 이르러 생산주의로 이행한다. 생산주의는 ‘생활 속에서 미술을 실천한다’를 목표로 삼아 예술과 기술의 결합 및 이를 통한 대중과의 간극을 메우는 형식의 모색을 추구했다. 생산주의가 가장 잘 실천된 미술 분야는 포토몽타주였다. 생산주의자들은 파편화된 이미지와 텍스트를 조합하는 포토몽타주에서 더 나아가 포토프레스코라는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냈는데, 이는 단일한 프레임의 정사진을 사용해 이를 불규칙한 격자 형태로 병치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영화적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기존의 수용 방식이 지닌 문제점이었던 무관심적 관조와 수동적 관람을 해결하여 획기적 전환을 이룩했다.
예술의 혁명은 혁명의 예술이 되었는가
이처럼 러시아 현대 미술에서 구축주의와 생산주의는 기존의 예술 규범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적 대안을 제시하며 대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책에서는 이를 ‘예술의 혁명’이라 칭한다. 이러한 예술적 혁명은 러시아 사회의 혁명적 분위기 아래에서 사회와 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졌다. 하지만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곧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 아래 선전 미술로 전락하고 만다. 예술의 혁명이 혁명의 예술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는 예술의 혁명을 실패로 규정짓지 않는다. 러시아 예술의 혁명이 남긴 유산은 후대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므로 100년 전 러시아에서 있었던 예술의 혁명을 되돌아보는 이 책은 오늘날, 지금 여기의 예술의 가능성과 사회의 변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