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왕세자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 펠리페 2세에게 약혼녀를 빼앗긴 비운의 인물로,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죽는다. 실러는 16세기 스페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이 사건에 자유의 이념을 대변하는 가상의 인물, 포사 후작을 등장시켜 약 5년에 걸친 집필 끝에 『돈 카를로스』를 완성했다. ‘스페인의 왕세자’라는 부제를 단 이 희곡은 실러의 단일 작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주제나 소재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이념대립 같은 선 굵은 갈등 상황이 드러나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몹시 까다로운 미묘하게 흔들리는 우정도 묘사된다. 게다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벌어지던 시대의 스페인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펠리페 2세와 알바 공작 등 당대 유럽 역사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특히 우리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왕세자를 처형하는 부왕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실러의 희곡은 『빌헬름 텔』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극인데, 실러는 비극의 목적을 ‘숭고Erhabenheit’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비극이란 ‘슬픈 결말을 가진 극’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존귀한 사람의 몰락을 그린 극’이라는 뜻이다. 『돈 카를로스』에서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왕세자, 왕비, 포사 모두 사상의 자유와 시민의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고 몰락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까지 그 이념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다. 실러는 이렇게 올바른 이념을 위해 순결하게 죽은 영혼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실러의 창작노트 ‘『돈 카를로스』에 부치는 편지’ 수록!
실러는 일종의 ‘가족 초상화’ 이미지를 품고 돈 카를로스 일화에 접근했다. 아들의 약혼녀와 결혼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 젊은 남녀의 사랑, 그리고 실러가 쾨르너와 교유하면서 체험한 우정의 모습 등을 구상했다. 사회적으로 매우 부정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카를로스와 엘리자베스의 불행한 사랑을 중심으로 한 극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플랑드르의 자유운동을 대변하는 포사 후작의 역할이 차츰 더 중요해졌다. 희곡이 창작 도중에 처음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과 주제를 얻게 된 것이다. 작품의 이런 발생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오해로 인해 거듭 비판과 지적을 당한 실러는 작품을 책으로 출판한 이듬해인 1788년, 자신이 동인으로 있던 『도이치 메르쿠어』지에 작품에 대한 해설이자 창작노트인 ‘『돈 카를로스』에 부치는 편지’를 발표했다.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이 산문은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희귀하고도 진솔한 창작노트이며, 작품에 대한 놀라운 해설이자 옹호다. 이 열두 통의 편지에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 분석이 담겨 있으며 특히 관객이나 독자로서 포착하기 어려운 인물 포사의 특성과 심리가 탁월하게 분석되어 있다. 매우 깊이 있는 철학적·미학적 작업을 병행한 작가답게 그 분석이 치밀하고 심도가 있다. 독자들은 이 편지로 『돈 카를로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운문과는 또다른 실러 산문의 매력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원작의 헌사와 서문, 각주까지 수록해 『돈 카를로스』의 진정한 완역판이자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의 운문 형식을 살린 실러 전문가의 번역으로 만난다!
마흔여섯이라는 짧은 일생 동안 실러는 아홉 편의 희곡을 완성했다. 작가가 스물여덟 살에 발표한 『돈 카를로스』는 그의 네번째 작품으로, 실러의 희곡을 청년기와 장년기 작품으로 나누었을 때 청년기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실러는 이 작품을 도이치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운문 형식인 얌부스 율격(약강격)을 이용해서 썼으며, 이후로 나온 그의 모든 희곡은 운문 형식을 취한다. 이는 실러가 젊은 나이에 이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간된 『돈 카를로스』는 모두 산문으로 번역되어 원작의 운문 형식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 책은 실러의 드라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운문 희곡 『발렌슈타인』 『빌헬름 텔』을 번역했으며, 미학서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한 편지』(개정판 『미학 편지』)로 제2회 한독문학번역상을 수상한 독일어권 대표 번역가이자 인문학자인 안인희가 극시(劇詩)라는 작품의 형식을 충실히 살려 번역한 것이다. 운문 형식을 그대로 살린 이 책으로 독자는 실러 희곡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번역 대본으로는 가장 권위 있고 많이 인용되는 한저(Hanser) 출판사의 실러전집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