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집의 정전, 버클리대본 청구야담 최초 완역
우리 민족의 다채로운 인간상과 생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박물관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한
조선 후기 역동적 서사의 보고
다양한 욕망을 실현하다
『청구야담』에는 인간의 욕망이 조선시대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상상 속에서 실현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많다. 조선시대 사람들 역시 의식주, 결혼, 자식교육, 건강, 돈과 명예, 사랑과 애욕 등 다양한 욕망을 품었다. 이를테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 죽 한 그릇을 주었더니 그 성의에 감동한 풍수가가 산소로 쓸 만한 좋은 땅을 점지해주는 이야기, 어머니가 우연히 발견한 보물을 자식들에게 비밀로 하여 공부와 생업에 힘쓰게 하고 자식들이 성공하자 보물을 팔아 큰부자가 되는 이야기는 욕망을 지혜롭게 이루는 과정과 결말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런 욕망을 성취해가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다른 이들이게 떳떳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문제에 부딪히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스님이 소장수에게 사기를 당하자 사또가 현명하게 억울함을 풀어주는 이야기에서는 재미와 통쾌함까지 느낄 수 있다. 이같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고 들으며 이를 통해 얻은 가치·지혜·윤리를 공유하고자 했다.
치부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야기판은 고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당당히 드러내며 웃음으로 승화했다. 「부부가 재산을 일구려고 각방을 쓰다」에 등장하는 부부는 가난하기에 자식을 보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십 년 동안 매일 죽 한 그릇만 먹고 각 방을 쓰며 동침하지 않기로 한다. 십 년이 지나 부부는 과연 갑부가 되나, 늦은 나이에 출산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니 결국 양자를 들이고 친자식처럼 키운다. 또 「생금을 얻어 부자가 한집에서 살다」에는 조동지라는 개성 사람이 양자를 들여 그에게 재물 불리는 일을 시킨다. 그러나 아들이 장사에 실패해 돈을 다 날려버리자 조동지는 아들과 그의 가족을 내쫓는다. 하루는 아들이 생금을 발견해 아버지에게 보여주자 조동지는 아들을 다시 집안으로 불러들이고 부자 관계를 회복한다. 가진 돈에 따라 가족관계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 하는 이야기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빈궁한데 동침하면 자연히 자식을 낳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아들을 낳으면 내년엔 딸을 낳을 것이니 자손을 보는 즐거움이 좋긴 좋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식구가 늘어나고 혹여 누가 병에 시달리기라도 하면 재산의 손실은 어찌하겠습니까? 당신은 윗간에 거처하며 신을 삼고, 저는 아랫간에 거처하며 길쌈하기로 해요. 그렇게 십 년 동안 매일 죽 한 그릇만 먹으며 가업을 이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구야담 하』 「부부가 재산을 일구려고 각방을 쓰다」 513쪽)
조선시대 핫이슈로 신분제 변화의 조짐을 읽어내다
조선시대 후기 이야기판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모여 각자 경험을 이야기하고 들었다. 이 시기에는 격동하는 현실에서 계급분화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과거에 누리던 특권을 상실하거나 혹은 부를 축적해 새로운 특권층이 된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청중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벼슬살이를 하는 사대부 또는 벼슬에서 소외된 사대부, 부농 또는 농토까지 잃어 도둑이 된 농민, 부유한 상인 또는 사업에 실패한 가난한 상인, 벌열 양반 또는 몰락 양반 등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이야기판이었다. 「송씨 양반이 궁지에서 옛 종을 만나다」에는 오랫동안 벼슬이 끊겨 몰락한 송씨 집안에서 도망간 옛 종이 지위가 높아져 옛 주인인 송씨를 만나 죄를 갚고 은혜에 보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부귀해진 종에게 의탁하여 평생을 살아가는 양반 말고도 글재주가 없어 속임수를 써서 벼슬을 얻는 선비, 포수의 아들인 줄로만 알다가 양반의 아들임을 알게 된 아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조선시대 후기에 계층이동이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야담은 기존의 질서를 허문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유학은 유학, 애욕은 애욕
조선시대 사람들은 애욕을 추구하는 데 서슴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암행어사가 처녀들을 중매해 좋은 일을 하다」에는 혼인할 때를 넘긴 딸 다섯이 혼사를 주선하는 놀이를 한다. 이를 본 암행어사는 처녀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혼례를 치르도록 도와준다. 또 수청 기생에게 넘어가 발가벗은 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는 순사 이야기, 남편이 처음으로 한눈을 팔게 된 명기를 직접 찾아가 그녀의 외모를 보고서 인정하며 용서하는 아내 이야기는 애욕으로 인한 해프닝을 다룬다.
여자가 태어나 가정을 갖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게 큰 인륜이니 폐할 수 없다. 사람이라면 부모 된 마음이 다 같을 텐데, 너는 딸 다섯을 두었으면서도 모두 혼인할 때를 넘기게 하고 아직 혼사를 의논하지 않으니 장차 인륜을 폐하고자 하느냐? 너는 가장으로서 이를 생각지 않고 혼처 구하는 데도 뜻을 두지 않으니 어찌 아비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청구야담 하』 「암행어사가 처녀들을 중매해 좋은 일을 하다」 498쪽)
조선시대 여성에게 환영받은 이야기
『청구야담』은 조선시대 여성 독자들의 읽기 요구에 부응해 한글로 번역되었다. 사대부들은 이야기판의 야담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한문으로 먼저 기록했다. 18세기 이후 여성들은 강독사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는데, 그 경험이 책으로 직접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은 욕망을 부추겨 야담이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야담집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또 여성이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치는 이야기가 꽤 있어서 여성 독자들에게 환영받았다. 이런 독자층의 성향을 반영하여 한글로 번역된 『청구야담』에는 여성의 감정선을 또렷이 드러내며, 여성의 체면을 중요시해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과 폭력을 생략하거나 오히려 들춰내기도 한다. 아내가 집안 살림살이를 잘 돌보고 다스려 지혜롭게 가업을 이루는 이야기, 정욕을 숨기지 않고 좋아하는 남자를 유혹하는 평양 기생 이야기는 모두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또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구상한 이야기도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든 논개가 대표적이다.
논개는 순순히 따르지 않고 완곡한 말로써 왜장을 유인해 강변 바위 위로 걸어나가서 마주보고 춤을 추었다. 그 바위는 강가에 서 있는 바위로, 삼면의 물이 다 깊었다. 논개는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청구야담 하』 「진양성 의기가 목숨을 버리다」 798쪽)
야담(野談)은 입으로 구연되던 이야기, 책으로 전승되던 서사적 단편, 그리고 조선 후기 현실에서 생성된 일화들을 기록하고 승화시킨 것이다. 야담은 전설이나 일화보다 길지만 소설보다 짧다. 야담에는 일화적인 것도 있고 소설적인 것도 있지만 ‘야담적인 것’이 더 많다. 야담은 매우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서 우리 민족의 인간상과 생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박물관과 같다.
야담은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였다가 본격적인 서사 작품이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면서 야담에는 당시 사회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이 대폭 반영됐다. 야담집 편찬자나 작자는 기존 이야기를 옮기는 데 머물지 않고 이를 부연하고 윤색했다. 여러 이야기를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야담의 발전은 조선 후기 문학의 역동성을 보여주며 우리 근대문학의 주체적 형성을 말해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