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이홍섭의 첫 시집 출간
우리 시대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이는 젊은 시인 이홍섭의 첫 시집 『강릉, 프라하, 함흥』이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서 이홍섭 시인은 90년에 등단한 후 8년여 만에야 첫 시집을 상재할 만큼 엄격한 시정신과 절제되고 숙련된 시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총 65편의 잘 짜여진 시들로 구성된 『강릉, 프라하, 함흥』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적 광휘를 뿜어내는 시편들로 가득 차 있다. 섬세하고 예민한 시인의 감수성에 포획된 삶과 사물의 정경은 우리 서정시가 이룩할 수 있는 순정(純正)함의 온전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빼어나다.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적 상상력은 선(禪)의 세계에 깊이 침윤되어 있어 삶을 꿰뚫는 통찰과 혜안이 남다른 경지에 이르고 있으며, 그의 감성은 지극히 따뜻하고 유연해서 윤이 날 만큼 생동적이다. 더욱이 언어를 지휘하는 시정신은 대단히 단호하고 강인해 시 구절마다에 오랜 연마의 장인정신이 묻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홍섭 시인은 1965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세계』 신인 공모에 「시인 이솝씨의 행방」 외 5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조계종 제3교구 사보(寺報) 『설악 불교』의 주간으로 있다. (연락처 : 018-224-6236)
세상의 아픔을 껴안는 문학적 순결성, 그 청명(淸明)의 세계
이홍섭의 시를 관류하는 주된 서정은 ‘순정함’이다. 삶의 진실을 가리는 일체의 허깨비들을 물리치는 데서 우러나오는 그 순정함은 맑은 갈색으로 빛이 난다. 세속적 허위와 거짓으로부터 일절 오염되지 않은 청명(淸明)의 세계, 그의 시는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노래할 때조차 속살이 보일 만큼 투명하다. 그의 시의 순금(純金) 같은 세계는 “내가 아프지 않은데 / 세상이 어찌 아프겠는가”(「단식광대 3」)라는 구절에서 선명히 알 수 있는 바, 세상의 아픔과 직접적으로 내통한 자가 그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육화하는 문학적 순결성에서 비롯한다.
그는 자연의 사소한 풍경 하나도, 삶의 보잘것없음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고 법문(法文) 혹은 경전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번뇌와 생명의 신비로움을 성찰적으로 바라본다. 시집의 첫머리에 실린 시 「큰 슬픔」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 탁월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인간만이 걸으면서 / 큰 슬픔을 껴안는다”라는 마지막 연은 대승적 깨달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국 서정시의 미래를 보여주는 서정시의 절창
시집의 제목에 나타난 지명(地名)은 이홍섭 시의 뿌리를 깨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의 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강릉과 프라하, 함흥은 카프카와 백석(白石)의 다른 이름이다. 살아서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던 카프카가 그러했듯이 강릉은 시인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강릉 앞바다는 카프카의 프라하인 것이다. 그리고 함흥은 백석의 마을이다.
그 공간에서 시인은 삶의 본원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그 상처 속에 자신의 영혼을 묻는다. “상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 몸을 눕히는”(「언별리(言別里)」), “자기 상처가 둥지인 새 한 마리”(「안목 하구」), “바다가 둥지고, 바다가 무덤인 / 갈매기들”(「강릉, 프라하, 함흥」) 등의 구절들은 순정어리면서도 깊이 있는 시정신의 일면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시인 이문재의 지적처럼, 이홍섭의 시는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 누구와도 견주기 힘든 빼어난 서정시의 절창으로 손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의 한 면을 그의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