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아무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밤인가봐요
시가전도 열리지 않는
너무 조용한 거리는 미칠 것 같아요 _「홈쇼핑에서 염소를 주문하다」 부분
세상은 둥근 회색 구멍일 뿐 모든 길은 엄마 코끼리의 항문으로 뚫려 있다. (……) 네모난 항문들이 건물마다 붙어 있었다 도시의 항문은 얼마나 투명하고 매혹적인지, _「뚱뚱한 코끼리가」 부분
저녁이면 날고 싶은 나뭇가지 휩쓸려와
책상에 떨어졌지 보고 싶었니,
네가 곁눈질로 훔쳐본 텅 빈 이 방?
주인 없는 말들이 어슬렁거리다
벽에 이빨을 박는 딱딱한 방, _「내 방에 사는 말」 부분
2000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한 이영주 시인의 첫 시집 『108번째 사내』를 문학동네포에지 19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2005년 5월 문학동네에서 첫 시집을 묶었으니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새천년 시계 제로의 상황에서 우리 시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리란 기대를 받으며 신예 시인으로 첫발을 내딛은 이영주. 4부 49편으로 이루어진 이 첫 시집은 도시 안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폭력성을 세심한 묘사와 시적 직관으로 묘파하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유희와 우화적 상상력으로 현실의 음화를 그려내었다(김용희). 시인은 미로처럼 얽혀 있는 세계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 욕망하지만 그 문은 처음부터 부서져 있다(고봉준).
“이 이상한 땅에서는 모두 얼굴이 없다./모자들만 푸르른 어둠의 폐 속에서/웅크린 채 몸에 구멍을 뚫고 있다.”(「이 땅에서는 모두 얼굴이 없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발원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현실이 이영주의 시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생명에 대한 꿈이 간직되어 있다. 시인은 썩어가는 사물들의 세상에서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오홍진). 문정희 시인은 말한다. 언어 속의 부조리한 아우성들이 다시 전율로 화하는 이영주의 시는 기실 깊은 슬픔과 절망의 체온을 숨기고 있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 지상의 정원”(시인의 말)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사내의 꼬리가 사라진다 골목 끝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이 여관 4층 창문에는 가느다란 빗금이 그어져 있다 어딘가로 사라진 꼬리를 찾느라 길게 늘어난 사내의 팔 어지러운 모래를 헤치며 빗금에 가닿는다 창문 속 잘게 찢어진 살을 만지며 전율하는 사내 네 몸을 몇 번이나 넘어야 찾을 수 있니 초원으로 가는 마지막 부장품 난 집으로 가야 해 울먹이는 사내의 팔이 씀벅씀벅한 모래 무덤들을 헤집는다 창문처럼 납작해진 여자가 등을 돌리고 쿨럭거린다 4층은 너무 높아요 이곳을 거쳐간 사내들의 꼬리는 모두 녹아버렸어요 그들은 모두 집을 잃고 이 방으로 숨어들어요 모두 이곳에 번뇌를 두고 사라져요 빗금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떠서 방안을 들여다본다 108번째 사내는 창문 속으로 손을 넣는다 골목을 떠돌던 바람이 여자의 길게 휜 척추를 쓸어내며 전생을 부른다 먼 곳에서 사막의 회오리가 서서히 여관으로 몰려온다 사내의 모래 눈물이 낡은 벽을 타고 3층으로, 2층으로, 천천히 떨어진다 창문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퍼진다 사내의 마지막 꼬리가 108번째 빗금을 긋는다 네 등을 넘을 거야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사내가 여자의 뜨거운 척추를 남겨둔다 108번째 사내
_「108번째 사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