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고 웃기고 벅차고 뭉클한 날들
우리가 함께 그린 저녁의 색깔
딸의 눈에 비친 아빠는 설거지하다가 자주 멍을 때리는 편이고 집 안 여기저기서 잠든 모습으로 발견되기 일쑤다. 책 읽어주기 솜씨와 연기력이 뛰어나서 인형놀이 상대로는 최고이며 놀이터에 갈 때는 친구 없을 때를 대비해서 꼭 데리고 가야 하는 사람이다.
딸은 원하는 게 있을 때 직접적인 요구는 잘 못하지만 무언가를 먹을 때는 신중하게 자신만의 기준을 지키는 아이, 외출은 싫어하지만 친구네 집에 갈 땐 누구보다 빠르게 준비를 마치는 아이, 오래 나갔다 올수록 집에 돌아와 책을 오래 읽는 아이다.
『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책 만드는 사람 이석구가 딸과 함께하는 일상과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결의 마음들을 들여다보며 만든 이야기이다. 딸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세면대 위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고,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하는 엄마 아빠의 질문을 살짝 귀찮아하는 나이까지의 이야기가 90여 편의 에피소드로 담겼다. 딸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순간들,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똑같지 않은 하루들, 그 안의 작고 소중한 표정들을 담은 색연필 그림들 속에서 사각사각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키 재 볼까?”
지이잉, 탁!
“헤~ 별거 아니네.”
작가 이석구는 그동안 『두근두근』 『숨바꼭질』 『아기바람』 『온 세상이 하얗게』 등의 그림책을 만들어 왔다. 부끄러움이 많은 브레드 씨가 우연한 만남들을 계기로, 맛있는 빵을 굽는 재능을 나누며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 가는 이야기(『두근두근』)부터, 서로의 세상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작은 행동이 차갑게 얼어붙었던 벽을 얼마나 순식간에 녹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이야기(『온 세상이 하얗게』)까지, 그가 그림책 속에 불러낸 인물들은 시끄럽지 않은 목소리와 크지 않은 몸짓으로 독자의 마음 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숨바꼭질』은 일상의 디테일을 놀랍도록 풍성하게 살린 연출로 특히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받았다. 이처럼 미더운 작가의 시선은 우리가 한 세계의 성장을 보조를 맞추어 목격하도록 돕는다. 이것을 지켜보는 일은, 아이가 자라는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중요한 경험이다. 차곡차곡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에피소드는 지나쳤거나 잊어버리고 말았던 우리들의 일상을 깨끗한 거울처럼 비추어 준다. 처음 만든 눈사람과 어느 날의 놀이터를 담은 조금 긴 호흡의 이야기, 평범한 순간들의 특별함을 가까이 보여 주는 페이지들이 에피소드 사이사이를 촘촘하게 채우고 있다.
“엄마는 행복하겠다.”
“왜?”
“나한테 사랑받으니까!”
『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 속의 아빠 이석구는 그렇구나/ 그러게.../ 그건 좀...의 조합으로 아이를 답답하게 하기도 하지만, 역시 가장 신나는 배드민턴을 함께하고 책을 읽을 때는 침대가, 앉고 싶을 때는 의자가, 새 신에 발뒤꿈치가 까졌을 때는 다리가 되어 주는 하나뿐인 존재다. 딸은 아빠의 일이 잘 안 풀릴 때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 주고 가끔 촌철살인의 통찰력을 빛내지만 “내가 애기냐?”와 “나는 아직 아이잖아.” 사이를 오가며 아이다운 사랑스러움을 발산한다. 마이클 잭슨/ 이상은/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로 취향을 공유하고, 여름이 오면 누구보다 먼저 특대 사이즈 수박을 떠올리는 ‘닮은꼴’ 두 사람은 오늘도 하루를 함께 그린다.
저녁의 하늘은 누구의 창에든, 매일 공평하게 찾아온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날의 저녁 하늘의 색이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오늘을 같이 그린 곁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내일의 색을 상상해 보자. 『함께 오늘을 그린다는 것』의 기쁨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외부 회의 자리에서 가방을 열었다가 딸이 등원하며 넘기고 간 곰 인형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던 일(그 친구의 이름은 ‘안녕곰’이었다), 밍밍한 라볶이의 맛을 조금은 즐기게 된 일(그렇지만 언제쯤 칼칼하게 먹을 수 있을까), 아주 긴 코끼리 미끄럼틀에 관심만 보이고 타지 못하는 딸 대신 혼자 느낀 스릴(으아아아아아). 딸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순간들이 한 장 한 장 쌓여 간다. 늘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똑같지는 않은 하루.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하루. 우리가 함께 그리는 하루들이다.”_이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