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록하는 삶: 스스로 묘지명을 남기다
어느 날 문득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낀 77세의 노인 유한준은 자신의 삶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정직한 글쓰기, 그것은 평생 유한준이 견지했던 삶의 태도였고, 이는 거짓 없는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친과 형을 잃고 가장이 된 기억, 훌륭한 글을 읽고 불후의 문장을 남기고자 밤을 지새웠던 날들, 느지막이 시작했던 관직 생활의 보람과 후회…… 이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묘지명이란 자식이 부모의 생을 기록해 그 삶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이었고 부모의 죽음 앞에서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유한준은 이러한 묘지명을 신뢰할 수 없었다.
쓰지 않는 것이 없는 행장의 신뢰할 수 없는 말에 기대어 무궁함을 도모하느니, 차라리 나의 일과 나의 행실을 내가 묘지명으로 쓰면 진실하고 확실하며 간략하고 과장되지 않아 오히려 믿을 만할 것이다. 이에 스스로 묘지명을 짓는다.
그가 스스로 묘지명을 남긴 데는 그가 아끼던 아들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뜬 까닭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기록할 기회를 얻었다. 유한준이 남긴 묘지명은 간략하다. 유한준은 과거 경화세족 기계 유씨 선조들의 일생을 세세하게 기록해 1만 자에 가까운 「자전」이라는 기록을 남겼음에도, 자신의 묘지명에는 이를 단 40자로 요약해 실었다.
묘지명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문학이 껍데기에 불과하며, 후세에도 알아줄 이 없음을 통탄해한다. 명예와 지위도 얻지 못하고, 뜻을 계승할 자식도 없으며, 평생 업으로 삼아왔던 저술도 한낱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금세의 거장’으로 불렸던 저암의 문학에 대한 당대인들의 높은 평가를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자조적인 말들은 오히려 타인들의 평가 기준보다 높았던 저암의 평가 기준이 가져온 자기 겸허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구절에서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비록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지라도 만약 자신의 문학이 후세에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면, 언젠가 자신을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명사銘辭를 짓는다.
유한준이 만난 사람들, 친구이자 적
이 책에서 또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유한준이 사귀었던 지기知己들과 유한준의 관계다. 그중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한 인물은 근재 박윤원(영숙)과 연암 박지원이다.
박윤원朴胤源(1734~1799)은 유한준과는 죽마고우로 고문을 함께 연마했으나 도학 공부에 전심하게 되면서 유한준과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도문분리 논쟁’을 벌였던 학자다. 그들이 30대 중반 주고받았던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은 친구라기보다 마치 상대의 논리를 깨부수려는 적으로 보인다. 박윤원은 서신을 통해 유한준에게 몇 차례 도학에 힘쓸 것을 권하며 유한준의 잘못된 생각을 일일이 짚어내는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유한준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논리적인 태도로 둘의 차이가 도문 관계에 대한 관점 차이라며, 도문일치론의 허상을 밝히는 데 힘쓴다. 박윤원의 그칠 줄 모르는 설득에도 유한준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에도 둘의 교유가 지속되었다는 것은 문집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윤원과 유한준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끝까지 존중하는 모습을 통해, 벗이란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아니라 길이 다른 두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끝까지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 진정한 우정임을 보여준다.
박지원의 둘째 아들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 근거해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유한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박지원에게 인정받지 못한 유한준이 평소 반감을 갖고 『열하일기』를 노호지고虜號之稿(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 비난하고, 만년에 ‘묫자리 분쟁’으로 두 집안이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문집과 유한준의 아들인 유만주兪晩柱의 『흠영』, 그 외 주변인들의 문집 및 실록을 『과정록』과 비교해볼 때 이를 온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문학관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로 인해 상대방을 해코지하거나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길 만큼 사적인 감정이 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지원의 『연암집』과 유한준의 『자저』 어디에서도 서로에 대한 원망이 담긴 글은 찾을 수 없으며, 다만 박지원이 남긴 「답창애」라는 편지에서 연암이 ‘사물의 명칭이 빌려온 것이 많고 끌어온 근거들이 딱 들어맞지 않는다’고 유한준을 지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박윤원과의 서신 논쟁에서 유한준이 자신의 문학관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유한준은 「답창애」에 적힌 연암의 비판을 경청하는 동시에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는 박윤원과 박지원에 대해 아래와 같은 헌사를 남겼다.
막 그 뜻을 세울 때 외람되게도 근재 박영숙과 연암 박미중이 좋은 벗이 되어주었으니, 모두가 한창 젊은 나이였다. 영숙은 처음에는 고문에 뜻을 두어 문장이 전아하고 법도가 있었는데 중년이 되어 문장을 통해 도에 입문하여 뛰어난 유림의 표준이 되었다. 미중은 재주와 기품이 특히 높아 문장으로 스스로 경지에 올라 규범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투식에서 벗어나 조소하고 풍자하며 문장을 유희로 삼았다. 대체로 모두 고아하면서도 의기로운 사람들이다.
자기 서사 작품으로 표출한 유한준의 내면
「우려문수右閭問數」는 유한준이 30대 중반에 창작한 문대체 자기 서사 작품이다. 「우려문수」에서 유한준은 우려공보와 동곽고사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자신이 느끼는 갈등과 원망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불우한 삶을 긍정한다. 우려공보는 자신의 고달프고 가난한 삶에 한숨짓는 사람이며 동곽고사는 신통한 점쟁이 도사다.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우려공보는 동곽고사를 찾아가 자신의 운수를 묻는다. 그러면서 우려공보는 자신의 포부와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려공보를 자신의 분신으로 삼은 유한준은 「우려문수」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포부와 문학관을 밝힌다. 우려공보는 동곽고사에게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면서 호의호식하는 삶, 자신처럼 끊임없이 정진하지만 궁핍함에 시달리는 삶을 대조적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동곽고사가 해주는 말은 ‘가난한 운명을 타고났으니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다였다. 동곽고사는 산중에 버려진 소나무와 제물로 선택되어 우리에 갇혀 호의호식하는 소의 운명을 대비적으로 제시하며, 소처럼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영예로움이 오히려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일깨워준다.
사람들이 모두 황망할 때
그대 홀로 마음 여유롭네.
가난이 그대에게
넉넉히 줌이 이미 도타우니
그대 어찌 다시 원망하리
가난과 함께 휴식할지어다
유한준은 이처럼 동곽고사와 우려공보의 입을 빌려 자신의 불만과 내적 갈등을 거침없이 표출하며 결국 문장가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문대체 형식을 빌린 이 작품은 현실의 갈등을 감추고 화자의 삶을 이상화하는 규범화된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유한준은 훗날 「자전」에 「우려문수」의 중요한 부분만을 발췌 요약했는데, 여기서 우려공보를 ‘한준’이라는 실명으로 모두 바꾼다. 이를 통해 30대 중반의 문학가 유한준이 실제로 자신의 문학이 세상에 쓰임이 되지 못해 갈등과 고민에 휩싸였다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사대부를 비판하고 중서층과 교류하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라’는 각도기도론을 펼치고 그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할 줄 알았던 유한준이 가장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타락한 사대부의 삶이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처럼 소설의 형식을 빌려 사대부들을 비판할 수도 있었지만 유한준은 어떠한 장치도 없이 거침없는 직설로 사대부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한다.
세상의 소위 사대부가에 주색잡기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 그들은 부모형제들이 출세해서 신분이 높은 친족들이 많고 집은 부유해서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호의호식하며 그 속에서 자라났지만 배우지 못해 무식하기까지 하니 괴상하고 망측함이 이와 같이 심합니다.
그 자신이 사대부 계급에 속했음에도 사대부의 타락과 몰락을 바라보며 감춤 없이 비난했던 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중서층과는 깊고 넓은 교유를 했는데, 특히 신분제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서얼과 중인 계급의 삶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김광국이 바로 그 예다. 조선 후기 서화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金光國(1727~1797)이 백발의 노인이 된 후에야 유한준은 비로소 그와 교유하게 된다. 김광국은 대대로 내의를 역임한 중인의 명문가로, 그는 자신의 서화 컬렉션인 『석농화원石農畫苑』을 유한준에게 가져다주며 발문을 요구했다.
그림을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진정 보고 싶고, 보면 그것을 모으게 되니 이는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유한준은 김광국이 비단 그림을 수집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으로 사람을 만나고, 또 깊게 사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림을 모으기만 하는 사대부들과 김광국을 선 긋는다. 유한준은 부패하고 무능한 사대부를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으면서도, 힘겨운 처지에도 자신의 삶과 열정을 가꾸어나가는 중서층 여항인들의 삶에 우호적이었다. 이는 이념이나 신분적 편견 없이 오직 실제적 사실에 입각해 모든 개인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유한준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각도기도. 각자 스스로의 길을 찾아 최선의 성취를 이루는 것. 도와 문이 분리되고 스승이 여럿이 되는 순간,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큰길은 사라졌고, 각자가 따로 또 같이 가야 할 여러 길이 생겼다. 각자의 도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생기는 순간 이제 나는 네가 아니고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그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기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 이것이 바로 유한준이 생각한 각도기도의 삶이다. _145쪽
유한준의 각도기도론은 성리학적 이념의 틀을 넘어 개인의 각자적 삶을 긍정하는 새로운 문학을 제창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개인의 독자적 삶’을 긍정한 문학은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던 문학과는 어떤 다른 지향과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도문일치론이 성리학적 이념을 내면화한 개인의 ‘심성 수양’과 그 이념에 따라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교화적 내용’을 묘사하고 서술하는 데 치중한다면, 각자적 삶을 존중하는 유한준의 문학은 ‘거대한 이념’보다는 ‘소박한 개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지향했다. _154쪽
유한준의 문학은 어떤 특정한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각자의 삶의 원칙과 방법을 하나의 도로 삼아, 자신의 길을 가는 모든 개인의 모습을 이념적·당파적·신분적 편견 없이 오직 실제적 사실에 입각해 드러내고자 한다. 살아 있는 개인에 주목한 유한준의 문학은 삶을 이상적으로 윤색하기보다는 내면적 갈등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자기 서사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또한 노론의 당파적 입장을 견지한 유자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그에 포섭되지 않는 노장이라는 타자와 유형원이라는 남인학자의 삶과 사상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_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