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마이클 K의 고단한 여정을 통해 그려낸
타자 재현의 윤리와 사유의 한 방식으로서의 스토리텔링
★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 부커상 • CNA상 • 에트랑제 페미나 상 수상작
삶을 긍정하는 이 소설은 인간의 경험에 환하게 불을 비춤으로써 내면의 영적인 삶이 필요한 이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유의미하게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 순수한 시각이 필요한 이유를 일깨운다. _1983년 부커상 선정 이유
구순구개열 기형을 안고 태어난 유색인 마이클 K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케이프타운의 시 포인트 지역에서 정원사로 취직한다. 습하고 고온인 날씨 탓에 노모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간다고 생각한 K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태어나 자란 카루의 농장을 향해 떠난다. 삶에 대해 의문도 불만도, 기쁨도 만족도 품지 않고 사는 무색무취의 영혼처럼 그려지는 마이클 K. 기형에 유색인인 자신을 향한 차별과 사람들의 시선도, 그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더더욱 벗어날 수 없는 가난도 그에게는 별다른 절망도 좌절도 심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였지만 어머니만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다. 정원사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고향인 카루의 농장으로 향하는 참연한 여정, 길을 나선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어머니는 숨을 거두고 만다. 하지만 K는 홀로 여정을 이어간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버려진 농장에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고,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아 호박을 키우고 땅을 일구며 살아간다. 그 와중에 내전의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K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뜻모를 혐의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보내진다. 그는 음식을 거부하다가 탈출하여 시 포인트로 가 부랑자가 되어 연명한다.
2부는 강제수용소의 의료 장교가 수용소에 들어온 K를 관찰하며 기록한 일기이다. 이 일기에서 장교는 K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려 했던 자신의 경험을 기술한다. 그러나 K의 뒤틀린 입에서는 거의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대화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떤 체제에도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K는 장교가 가진 계층적 세계에 대한 모든 확신을 뒤흔든다.
식민주의자이기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적 식민주의자의 딜레마
& 대답되지 않은 질문들을 남겨둔 디스토피아적 우화
영문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컴퓨터프로그래머로도 일하다 영문과 교수가 된 쿳시는 1974년 서른넷의 나이에 장편 『어둠의 땅』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한다. 이어 두번째 소설 『나라의 심장부에서』(1977)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인 CNA상(Central News Agency Literary Award)을 수상하고, 그로부터 3년 뒤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로 두번째 CNA상을 수상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이어 집필을 시작한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는 그의 네번째 장편으로, 1983년 출간되던 해 부커상과 이듬해 세번째 CNA상을 쿳시에게 안겨준다. 3년여에 걸쳐 완성한 첫 장편 『어둠의 땅』이 요하네스버그의 출판사 레이번 프레스에서 출간되기 전까지 몇몇 출판사로부터 출간을 거절당하기도 했던 쿳시는 10여 년 사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 아버지와, 역시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독일계 백인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쿳시는 태생적으로 전형적인 아프리카너, 즉 아파르트헤이트로 상징되는 극단적인 유색인 차별정책의 주체인 소수 백인식민주의자 집단에 속했다. 유럽 백인들에 의한 식민주의 역사를 일종의 원죄처럼 떠안은 그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저질러온 “뻔뻔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힘과 권위”가 없음을 자인함으로써, 그 원죄의 태생적 공모성의 면면을 “때로는 자학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응시하고 해부하는 성실성과 윤리성”을 보여줘왔다. 이러한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과 공모성의 문제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이어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거쳐 그의 또다른 대표작 『철의 시대』 『추락』 등으로 이어지며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로 자리잡는다.
다만 이러한 주제적 일관성과 대비하여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는 그 구성과 스타일 면에서 쿳시의 여타 작품들과 다른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데, 전체 3부 구성 중 다소 파편적이고 짤막한 형태로 배치된 2부를 제외하고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부와 3부의 내러티브가 마이클 K, 즉 피식민주의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식민주의자의 입장에서 타자를 향하고 응시하는 시선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다른 작품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지점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쿳시 특유의 “윤리성”이 끈질기게 발현되어 “모호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모호한 마이클 K”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마이클 K를 재현해내는 시선은 건조하다 싶을 만큼 조심스러우며, 그 조심스러움은 결과적으로 마이클 K가 처한 상황의 양가적 특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킴으로써, 식민지 상황의 관료주의 시선으로는 그저 어눌하고 가진 것 없이 떠도는 부랑자에 불과할 그의 입을 통해 끝내 쉬이 대답될 수 없지만 사회체제와 개별 인간의 길항에 대한 가장 명징한 질문들을 던진다.
관련 서평
읽는 이의 감각을 놀랍도록 정화시켜 시각이 선명해지고 청각에는 생기가 도는 느낌을 갖게 한다. _뉴욕 타임스 북리뷰
삶을 긍정하는 이 소설은 인간의 경험에 환하게 불을 비춤으로써 내면의 영적인 삶이 필요한 이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유의미하게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 순수한 시각이 필요한 이유를 일깨운다. _1983년 부커상 선정 이유
수정 결정처럼 단단한 작품. _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남아프리카에서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낱낱이 얘기하는 훌륭한 작품. _네이딘 고디머
다면성, 형식의 독창성, 내러티브의 생산과 권위에 대한 자기의문이라는 측면에서 남아프리카에는 상대가 없다. _데이비드 애트웰
이 책이 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쿳시가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거나 생생한 묘사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벌레와 호박과 햇빛에 의지해 몇 달을 보낸 마이클 K처럼, 쿳시의 글이 매우 절제되어 있는 까닭이다. _가디언
대개의 심오한 우화가 그렇듯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는 대답되지 않은 질문들을 남겨두었지만, 아마겟돈의 경고는 흔치 않은 힘으로 울려퍼진다. _타임
본문 발췌
K는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새처럼 행복한 시절이 자신에게도 있었는지 기억해보려고 했다. _46쪽
그러나 자신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았음에도. _52쪽
“당신은 뭘 위해 전쟁을 한다고 생각하죠?” K가 물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기 위해서인가요?” _56쪽
누군가 그의 무릎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일어나!” 그는 가까스로 일어나 희미한 불빛 사이로 검은색 코트에 검은색 모자를 쓴 감독관을 쳐다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일해야 하죠?” K가 물었다. 그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말들이 먼 곳에서 메아리쳐오는 것 같았다.
감독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해.” 그러고는 막대기를 들어 K의 가슴팍을 찔렀다. K는 삽을 집어들었다. _63쪽
나는 여기에서 영원히,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살 수도 있겠구나.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매일매일이 똑같을 것이고, 할말도 없을 것이다. 큰길을 걸으며 느꼈던 조바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_68쪽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이 버려진 농장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종종, 특히나 아침에, 갑작스러운 환희가 그를 훑고 지나갈 때가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환희에 이어 막연한 미래로 인한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다. 결국 그는 기운차게 일하는 것만이 우울에 빠지지 않는 길임을 깨달았다. _85쪽
그는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맞춰 시간 밖의 공간에 살았다. _85쪽
이제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내가 어딨는지 알고 있을 뿐, 그러니 나는 이제 잊힌 존재나 다름없다.
다른 것들은 모두 그의 뒤에 있었다. _93쪽
당신은 내게 왜 달아나지 않느냐고 물었소. 하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이 좋은 곳을 두고 달아날 이유가 있겠소? 푹신한 침대도 있고, 장작도 공짜로 주고, 정문에는 보초가 총을 들고 서서 도둑들이 밤중에 당신 돈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켜주는데? 이런 것도 모르다니, 대체 어디서 온 거요?”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누가 비난을 받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울타리를 넘는 순간 당신은 거주지를 잃을 거요.” 남자가 말했다. _108~9쪽
“프린스 앨버트에서 일요일에 특별한 일이 뭐가 있겠소? 나도 전에 가봤지만 아무 의미도 없소. 가고 싶으면 같이 다녀오시오. 카페 바깥에 앉아 시원한 음료수 한잔 사서 마시고, 벼룩한테 물린 자리나 긁으시든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을 테니까. 내 말은, 우리가 감옥에 있다면 감옥에 있다고 인정하자는 거요. 그렇지 않은 척하지 말고.”
그럼에도 K는 수용소를 나섰다. _116쪽
그는 스스로에 대해, 뒤에 발자국을 남기는 무거운 존재가 아니라, 개미가 발을 구르고 나비가 이를 사각거리고 먼지가 굴러다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든 대지 위에 찍힌 점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_134쪽
그는 검은색 코트를 둘둘 말아 베고 누워 쉬며 하늘이 빙빙 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여기에서 살고 싶다. 그는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았던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 아주 간단한 일인데. 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려고 짐승처럼 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게 애석하구나.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창문에 불을 밝힌 집에 살 수 없다. 굴 속에서 살아야 하고 낮이 되면 숨어야 한다. 삶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_136쪽
K는 그들이 마침내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가 돌아와 그에게 몸을 숙이며 그의 귀에 대고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친절하기는 어려워요.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두려워하지 말고 얘기하세요. 그러면 가질 수 있으니까. 깡마른 친구여, 그게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요.” 그가 K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_242쪽
나는 동정의 대상이 되었구나, 그는 생각했다. 내가 어디를 가든, 그들 나름으로 동정을 행사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세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고아의 모습으로 다니고 있다. 그들은 나를, 죄를 짓기에는 아직 너무 어려서 먹을 걸 주고 싶은, 야칼스드리프의 아이들처럼 대한다. 아이들에게서는 더듬더듬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을 기대한다. 내가 세상에 더 오래 있었기 때문이다. _244쪽
내가 시골에서 알아낸 것이 하나 있다면,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은 충분하다는 것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의 교훈이며 전체 이야기의 교훈일까?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사건 진행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교훈이 저절로 나타나는 방식일까?) _24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