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의 거장 부차티의 단편 미학의 정수가 담긴 대표작 60선
이탈리아 스트레가상 수상작 국내 첫 소개
이탈리아 현대문학에서 마술적 사실주의, 실존주의, 환상주의를 일군 작가로 손꼽히는 디노 부차티(Dnio Buzzati, 1906~1972)는 보르헤스, 카뮈, 칼비노, 마텔, 망겔 등 여러 작가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오늘날 이탈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1988년에는 디노부차티국제협회가 설립되었고, 2022년 내년이면 작가 사후 50년이 되는 해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장편 『타타르인의 사막』(1940)에 이어, 이 책 『60개의 이야기Sessanta racconti』(1958)는 최근 한국에 두번째로 소개되는 부차티의 책이다. 문학평론가 김현 등을 통해 한국에서도 간략히 회자되어온 이 작가의 단편 미학의 정수가 담긴 대표작 60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출간 당시 보기 드물게 장편이 아닌 이 단편집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망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스트레가상’이 수여되었다.
부차티는 평생 단편집 10권 남짓을 냈는데, 그중에서도 『60개의 이야기』는 앞서 출간한 세 단편집(『일곱 전령』 『스칼라극장의 공포』 『발리베르나 붕괴 사고』)에서 직접 작가가 36편을 엄선하고, 이후 신문 및 잡지 등에 발표한 새 단편들을 묶은 것이다. 이 책은 몬다도리에서 펴내는 ‘오스카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평단과 독자를 동시에 사로잡으며 오늘의 고전으로 여러 분야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일례로 작가가 실제로 유양돌기염을 앓았던 경험에서 바탕한 「7층」은 코미디 영화와 희곡으로 각색되고 알베르 카뮈가 번역하여 파리의 극장에서도 상연되었고, 「망토」 「그들이 문을 두드린다」 「그것은 금지되었다」 등은 성황리에 무대에 올라 동명의 오페라 대본집으로도 출간되기도 했다.
SF, 판타지, 부조리극, 스릴러, 블랙코미디…
타로카드처럼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이야기와 완성도 높은 서사의 힘
“나는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해 단편을 쓴다.” _디노 부차티
부차티는 무엇보다 40년 남짓 범죄 및 사망사고, 전쟁 현장은 물론 심령술, 초자연적 현상과 관련해 예리하고 흥미로운 기사를 써온 기자인 동시에, 소설을 비롯해 시, 그림, 희곡, 오페라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문인이자 예술가이기도 했다. 『60개의 이야기』에는 그가 누볐던 취재 현장의 흔적은 물론 한때 심취했던 이집트 고고학과 신화(「호름엘하가르의 왕」), 고통과 악에 관한 신비를 전하는 전설 및 성과 속이 갈마드는 종교적 우화(「하느님을 본 개」 「유혹과 싸우는 성 안토니우스」 「레티아리우스들」 「성탄절」 「성인들」), 오랜 취미였던 산행에서 느낀 자연이 지닌 태곳적 마법의 힘(「자연의 마법」 「마법에 걸린 상인」 「필라델피아의 겨울밤」)이 스케치된다. 또한 그가 목격해온 군중의 광기와 집단심리(「그저 그들이 원했던 것」 「금지어」 등), 질병 및 전염병(「7층」 「‘L’로 시작하는 무엇」 「낫고 싶었던 남자」 「자동차 전염병」 등)과 인공위성-핵무기-폭탄 등 전쟁이 야기한 인간세상의 희비극(「수소폭탄」 「천하무적」 「1958년 3월 24일」 「전함 토트」 등)부터 불가해한 이상 현상과 미지의 존재로 인한 부조리한 실존(「물방울」 「생쥐들」 「세상의 종말」 「비행접시가 착륙했다」 「눈에는 눈」 등), 유년과 성년의 눈부신 충돌( 「마법에 걸린 상인」 「폭군 어린이」 등), 창 밖 너머의 외계와 눈앞의 사자死者까지(「망토」 「친구들」 「급행열차」 등), 실로 다종다양한 현실이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화가, 음악가, 시인, 평론가 등이 등장하는―「스칼라극장의 공포」 「시샘 많은 음악가」 「그것은 금지되었다」 「예술평론가」 「종이총알」 「소식」 등의―단편들을 통해, 자신이 몸담은 예술세계의 현실과 순수한 열정을 날카로운 풍자적 알레고리로써 포착해낸다.
SF, 판타지, 스릴러, 블랙코미디, 전쟁역사물, 연애소설, 동물우화, 부조리극 등 형형색색의 다양한 특색을 지닌 이 단편모음집은 독창적인 상상력과 완성도 높은 문학적 필치로 ‘재미’와 ‘감동’을 안기며 부차티 단편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세상의 불가해한 수수께끼를 찾아나선 고독하고 신비한 만년의 모험
욕망을 꺾는 세상과 타협해온 상심한 여행자를 위한 60개의 회오리
이 책을 출간한 1958년, 부차티는 52세였다. 이차대전 이후 세계는 미소 대립 냉전체제에서 경제 재건에 열을 올리면서도 원자폭탄 및 핵미사일 등 전쟁무기 개발과 인공위성 발사 등 우주정복에도 한창 눈치 싸움을 벌이던 때였다. 무질서한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순수하고 숭고한 신념도 무너져 있던 때, 이 60개의 이야기를 통해 부차티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소용돌이치는 집단과 뿌리 없이 떠도는 개인의 비애 속에서도 인류 보편의 잃어버린 설화적 세계를 기막히게 마술적으로 복원해낸 문학인임을 스스로 입증한다.
부차티 소설의 진정한 힘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허구의 세계를 핍진감 있는 상황 묘사와 저널리즘적 문체를 통해 하나의 오롯한 현실로 성공적으로 창조해낸 데 있다. 이를테면 아파트 계단을 통통거리며 올라가는 물방울(「물방울」), 어느 아침 도시 상공에 떠 있는 거대한 신의 주먹(「세상의 종말」), 점점 작아지는 하루살이만한 원혼의 잔망스러운 귓속말(「진정한 신사 둘에게 주는 몇 가지 유용한 지침」)이 어떻게 재앙과도 같은 상황을 초래하는지, 휴양지 산골마을 숲에서 동화 속 아이들과 놀던 사십대의 한 성인이 가족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동심의 세계에서 날아든 화살을 어쩌다 가슴에 맞고 남몰래 피 흘리며 죽어가는지(「마법에 걸린 상인」), 불 켜진 옛 시인의 창에서 거리로 내던져진 찢긴 종이 뭉치가 어떻게 신비하고 설레는 걸작에 대한 예감으로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종이총알로 변하는지를(「종이총알」), 이 기막힌 이야기꾼은 독자들로 하여금 분명히 목격하게 하고야 만다. 부차티 단편의 최절정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들은, 그의 문학은, 그러므로 아직 우리에게 세상이 불가해한 수수께끼고 모험투성이로 남은 너무나 낯선 영토임을 재인식시키는, 진정 만년의 여행자를 위한 마지막 동화임을 일깨운다.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두렵고도 낯선 60개의 이야기는, 우리를 잃어버린 그 영토로 다시 휘몰아갈 회오리나 다름없다.
【본문 맛보기】
당신이 누구인지, 사람인지 유령인지 신기루인지도 난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틀렸을까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내가 아닐까봐 불안합니다. 아주 확실하진 않지만,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나를 더 멀리, 매번 더 앞으로, 갈수록 더 중심으로, 아직 알지 못하는 당신 왕국의 경계까지 이끌고 가려 합니다.(「남쪽의 그림자」 60쪽)
마침내 빗물이 온갖 틈이나 구멍을 통해 집안까지 흘러들어 뱀처럼 현관 복도를 슬금슬금 기어와 어둑한 거실에 검은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노골적인 모욕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그저 웃어넘길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하찮은 물의 혓바닥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피해는 이게 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그들이 문을 두드린다」 74쪽)
어느 아침 열시쯤 도시 상공에 어마어마하게 큰 주먹이 나타났다. 주먹은 천천히 펼쳐지더니, 거대한 지옥의 천개天蓋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것은 바위처럼 보였지만 바위가 아니었고, 살점으로 된 듯이 보였지만 살점이 아니었으며, 구름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지만 구름도 아니었다. 그것은 신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었다.(「세상의 종말」 201쪽)
여름이 끝나고 휴가객들이 도시로 돌아가면, 가장 아름다운 장소들은 적막해진다(하지만 계곡에서 사냥꾼들은 총을 쏘고, 바람 부는 산지에서 뻐꾸기가 울어대고, 가을의 첫 마법사들은 이미 불가사의한 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내려오고 있다). 이즈음, 오후 다섯시 반이나 여섯시쯤이면 일몰의 커다란 구름은 시골의 가엾은 사제들을 유혹하기 위해 몰려든다.(「유혹과 싸우는 성 안토니우스」 324쪽)
실제로 모두에게 각자의 산사태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산비탈의 흙이 밭으로 무너진 일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거름더미가 무너진 일이요, 또다른 누군가에겐 돌담이 붕괴된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불행한 산사태를 품고 있지만, 조반니가 찾아 헤맨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지면 세 단을 채우고, 어쩌면 그에게 행운을 안겨줄 대규모 산사태를 보려 했다.(「산사태」 367쪽)
그것은 달이었지만, 우리가 밤에 보곤 하는 평온한 달덩이가 아니었다. 사랑의 묘약이 되고, 경이로운 빛으로 오두막을 근사한 성으로 둔갑시키는 사려 깊은 친구가 아니었다. 심연에서 솟아난 거대한 곰보괴물 같았다. 전대미문의 우주적 대재앙으로 무섭게 확대된 달이 지금 횃불의 불꽃처럼 고요하고 눈부신 빛을 발산하면서 조용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었다.(「자연의 마법」 403쪽)
시詩가 금지되고부터 분명 우리의 인생은 훨씬 단순해졌다. 더이상 마음이 느슨해지는 일도, 부드러운 자극도, 집단의 이익에 해가 되는 추억에 빠지는 일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생산성뿐이다. 어떻게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 근본적인 진실을 외면했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그것은 금지되었다」 473쪽)
은근한 지적, 암시적인 농담, 조심스러운 에두르기, 모호한 속삭임을 통해, 드디어 나는 알게 되었다. 석 달 전에 이사 온 이 도시에는 사용이 금지된 말이 있음을. 그게 뭘까? 어떤 말인지는 모르겠다. 이상하고 특이한 말일 수 있지만, 평범한 용어일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내 사업에 지장을 줄 수 있다.(「금지어」 516쪽)
진부한 감상벽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울한 잠에 빠져 있는 동안 그가 고독한 등불 아래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위안을 주었다. 까마득한 시간, 밤의 깊은 구석에서 꿈이 피어오르는 정점의 시간에, 영혼이 무거운 고통에서 벗어나 세상의 안개와 지붕 위로 날아다니며 오묘한 말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 은혜로운 언어는 내일 사람들의 가슴을 관통하고 소중한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그들을 이끌 것이다.(「종이총알」 538~5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