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29
김채원 대표중단편선 초록빛 모자
1975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삶과 내면을 차분히 천착하는 그만의 문체미학으로 한국문학사의 고유한 자리를 일구어온 작가 김채원의 대표 중단편들이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제29권 『초록빛 모자』로 묶였다. 초기작 「자전거를 타고」(1977), 「얼음집」(1977), 「초록빛 모자」(1979)부터 대표작 「겨울의 환」(1989)을 거쳐 근작 「쪽배의 노래」(2014)에 이르는 열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김채원의 소설은 떠나온 유년의 풍경에 대한 감각적인 회상과, 작가의 개인사와 밀착된 분단 현실의 경험, 여성의 삶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아우른다. 작가의 근원이라 할 유년 소설의 세계는 초기작 「얼음집」으로부터 「애천」(1984)으로 변주되어 「쪽배의 노래」에서 정점에 이르고, 「자전거를 타고」와 「아이네 크라이네」(1981), 그리고 「바다의 거울」(2004)은 분단의 상처에 대한 문제의식을 그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나직하지만 치열하게 들려준다. 이는 「겨울의 환」과 「서산 너머에는」(2002) 등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삶에 대한 자각과 깊은 성찰과 어우러져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하게 곱씹어야 할 그의 고유한 전언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초록빛 모자』는 “관념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오로지 일상어만으로 마음의 무늬를 고스란히 찍어내는 이 고요한 마법의 세계”를 선사하는, “무엇을 그리건 그만의 그림으로 만드는 우리의 작가”(신형철, 해설)라는 표현이 들어맞는 한 작가의 문학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김채원은 유년을 향해, 분단에 의해, 여성에 대해 써왔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초록빛 모자」 「겨울의 환」 「쪽배의 노래」 같은 명편을 읽는다. 사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작은 아니어도 꾸준히 빛을 발해온 이 작가의 고유한 문학세계는 지금보다 더 깊이 논의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쓰는가’보다는 ‘어떻게 쓰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는 작가들이 있고 김채원이 바로 그렇다. 관념과 수사(修辭)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일상어로 된 묘사만으로 마음의 무늬를 고스란히 찍어내는 이 고요한 마법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_신형철(문학평론가,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그녀, 김채원은 그리고 그녀의 소설 속 여자들은 곧 ‘나’였다. (…) 삶이 퇴색해가는 것을 너무 일찍 보아버린 그 여자, 성인이 되고 난 후 어린 날 집이 쪽배가 되어 정처 없이 밤 속을 흘러가는 것을 본다. 결국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찬찬한 관찰의 내용들을, 삶의 크고 작은 숨결들을 털어놓을 곳은 문학밖에 없으므로. 그 여자는 그렇게, 소설을 쓴다. (…) 허무한 열정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텅 비어버린 그 여자, 망연자실한 그 여자에게 또다른 그 여자가 말을 건다. 사랑이란 ‘상처받을수록 타오르는’ 것이라서 파멸의 위험을 안고 있지만, 심신이 파국으로 달려갈 때 그것을 구원하는 것 역시 사랑이라고. _문헤원(문학평론가, 아주대 국문과 교수)
■ 책 속에서
어딘가에 바다가 있을 것 같다. 이 길은 그대로 바다로 이어질 것만 같다. 아무런 변명 없이 그냥 이렇게 달려서 스물여덟의 흐름 속으로 영원히 흘렀으면 싶었다.(「자전거를 타고」, 32쪽)
그때의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이 소리 없이 스러졌듯 청춘도 어느새 스러지고 차가운 세상을 이제껏보다 더욱 통째로 피 흘리듯이 맞고 있을까. 그러나 너희들 또한 차가운 세상을 만드는 한 일원이리니. 아이들이여 지금 너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일이 너희에게 일어났고 어떤 미래가 너희에게 찾아드는 것일까. 이 세상이 한 개의 거대한 얼음집이더라도 어린 시절의 그 얼음집을 간직해다오. 얼음 속을 잘 들여다보면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듯하며 그 안에 파란 풀잎이 자라던 것을……(「얼음집」, 54쪽)
어떤 최악의 경우라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가는 것이 낫다. 낫다기보다는 그래야만 할 거다. 죽음 쪽에서 바라본다면 하다못해 유행가에 귀기울여보는 작은 기쁨 하나라도 목숨과 되바꿀 만하지 않을까.(「초록빛 모자」, 72쪽)
나는 나의 모든 비밀을 사랑한다, 소자는 울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일생 동안 많은 비밀을 만들어나가겠다. 이런 생각도 했다. 비밀을 극복하기에는 상처가 따른다는 것을 아이는 이미 깨달았을까, 그러나 어른스레 곧 눈물을 닦고 길 건너편 영화관 쪽으로 빨려들듯 달려갔다.(「애천愛泉」, 192쪽)
그러니까 산 하나를 다 태우고야 꺼질 이 무서운 불길은 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꺼져버린 잿더미, 간혹 바람에 피식피식 흰 연기만 날릴 그 소화 후의 빈 산 또한 저의 마음이지 않겠습니까.(「겨울의 환幻」, 281쪽)
저는 굳건하게 여기에 섭니다. 그것은 여자로서 서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할머니나 순젱이, 그 이전의 선조들이 전해준 마지막 인간의 조건으로서이기도 하지요. 피난 가던 때 본 눈 속에 서 있는 나무와 같이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그 가능성.(「겨울의 환幻」, 353쪽)
그것은 또한 어린 날 무엇인지는 몰랐어도 막연한 자유에 대한 그리움처럼 남아 있기도 했다. 그 발자국은 분명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발자국으로 생각되었다. 우리가 어딘가로 향한다면 그 향함 자체는 분명 좋은 곳으로이지 않겠는가. 자유와 기쁨이 있는 곳.(「자정 가까이」, 367쪽)
사는 것은 꿈이 아닐까. 아니 이곳 바로 여기가 죽으면 간다는 저세상이 아닐까. 이곳은 이승이 아니라 저승이 아닐까. 어쩌면 저세상도 이 세상과 똑같지 않을까. 그러므로 결국 이 세상의 일이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닐까.(「서산 너머에는」, 494쪽)
그렇게 떠나간 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직 밤을 건너고 있을까. 아침의 빛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납게 불던 바람이 모든 것을 망각시켜버렸을까. 배는 그 안에 태운 한 가족을 망각해버렸을까. 그런 광포한 바람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망각 속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쪽배의 노래」, 5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