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과 타락과 늙음
“바보들의 혀는 주저함이 없는 기하학 (…) 역사의 연금술을 증명할 때까지/ 산죽처럼 붙박은 그 자리/ 바뀌지 않는다.”(「불이」)
이 시에 대해 저자가 덧붙이는 말 중 “하우下愚는 변함없이 불이不移한다. 불이는 어리석음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바보들은 한자리에 붙박여 혀를 놀리며 말을 많이 내뱉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은 언제나 안타까운 틈사위라는 진인사盡人事의 역운을 선결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둥이가 한없이 길어진 사람에게도 말은 얹히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기절한 값싼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시를 찾아가는 길은 ‘기다림’에 다름 아니다. 말을 그치고, 말을 기다려야 한다.
나아가 말본새는 ‘늙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지을 수 있다. 늙는 것은 대개 타락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듣는 귀 없음과 더불어 어리석은 말들의 쏟아짐이기 때문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공부
죄 없는 순간이 자신에게 오길 기다린다면 당신은 사전을 펼쳐야 할 것이다. 사전을 찾는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기에 그 틈에 무죄의 빛살이 깃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죄 없는 삶을 묻는다면/ 사전을 찾는 시늉으로/ 책 속의 빈 곳을/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끌어안는 항복의 몸짓으로”(「사전을 펼치는 시간」) 나아가야 한다.
‘죄’는 시인의 평생 화두이기도 하다. 죄 없는 순간은 유토피아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되려 손쉽게 우리 일상에, 내 손발 곁에 다가와 있다. 사전을 찾아 손을 내미는 순간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 타자를 찾아가는 순간이다(바로 그때 에고는 자신의 기동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시인에 따르면,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다(그리고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 골몰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타자들의 운신을 깨치는 것이다(혹은 이웃이 나를 흠씬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도록 하는 것이다. 자유는 어떤 형식의 복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도움’은 우리 삶의 화두가 된다. 돕지 못하면 자기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동물의 ‘생존’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지금 자신의 손발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며, 인간관계는 오직 ‘도울 수 있는가’라는 화두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사람이라는 행行: 개입(비평)과 오해의 윤리학
“오해로 새 살이 돋고/ 비방으로 피가 돌아요/ 괜찮아요 (…) 닭보다 낮게 날고/ 시체보다 조용하세요.”(「오해로 살이 붙어요」)
시인에게 ‘오해’는 오랜 화두여서 어느새 삶의 반려가 돼버렸다. 여기서 그의 공부길이 열리기도 해 그는 ‘오해의 윤리학’을 견인한다. 사회 속에서 ‘어긋남’을 피할 수 없듯 사람 사이에서 오해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흔히 말하듯 이 오해는 미스커뮤니커이션이나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행함行과 관련된, 전적으로 수행성의 문제다. 시인은 오해가 ‘죄’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흔히 지행知行이라는 말을 쓰지만 시인은 행지가 맞는 말이라며 이를 바로잡는데, 지知가 행行이라는 총체적 수행성의 여건 속에서 잠시 이루어지는 것처럼, 오해 역시 사람이라는 행行의 총체성과 함께 생긴다고 본다. 오해에 살이 붙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체보다 조용하게’ 있어볼 것을 권한다. 시인은 그의 책 『집중과 영혼』에서 “변명을 내뱉는 것의 아주 저 편에 있는 것이 오해를 삼키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해를 피한답시고 변명에 나선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무릇 영혼을 돌보려는 자, 변명에 무능해야 한다.”
옆방의 부처
“내 정신을 베낀 놈은 수백 명이지/ 내 돈을 꿍친 년도 열은 넘지 (…) 아뿔싸/ 그만 그 말을 늦게 삼키고 말았지/ 왼손이하는일을왼손조차모르게하랬는데.”(「그 연놈들이 부처가 될 때까지」)
시인이 이해하는 부처란 자기개입의 한없이 무거운 극한에 이미, 언제나 가닿은 존재를 일컫는다. 하지만 “부처의 음성이라도/ 옆방이라면 이미 아득하”(「옆방의 부처」)다. 그리하여 인간은 언제나 어긋나고 어리석은 존재다. 비평(개입)이 있어야 바쁜 에고를 죽이고 변명에도 무능해질 것이다.
*책 속에서*
내가 어느 날 어느 이국의 아득한 곳을 혼자 걷고 있었는데
문득 담 하나를 격하고
千年
고양이 여섯이 종루 안에서 졸고 있었으니
그 마당을 여섯 번 돌면
차마, 깨칠 뻔하였다_17쪽
시는 언제나 번개처럼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준비된 생활 속에 찾아오는 행운처럼, 긴 기다림의 과정이 선재한다. 아니, ‘기다림’은 아무래도 너무 비실비실한 말이다. 그래도 이 기묘한 ‘애씀’을 이 밖에 어떤 식으로 글로 옮기겠는가._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