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새겼던 루쉰 선생의 작품 삽화 중 정수만을 모은 것이다.”_자오옌녠
판화가 자오옌녠은 평생에 걸쳐 목판화 작업에 투신, 700여 점의 판화를 조각해냈다. 『그림으로 만나는 루쉰』에는 그가 작업한 『아Q정전』의 판화 32점, 산문집『들풀』에 수록된 판화 16점,『광인일기』의 판화 29점, 『고독자』의 6점, 『옛이야기, 다시 쓰다』의 8점이 실렸다. 판화의 소재가 된 루쉰의 텍스트, 판화, 판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밑그림들, 자오옌녠의 설명이 함께한다. 또한 루쉰 생애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착한 판화들도 실렸다. 요컨대 『그림으로 만나는 루쉰』은 자오옌녠을 경유하여 만나는, 루쉰 삶과 문학의 에센스다. 때문에 『그림으로 만나는 루쉰』은 루쉰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루쉰의 작품 세계를 부담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루쉰 입문서’, 루쉰에 정통한 사람에게는 그의 저작들을 한번에 꿰뚫으며 본인의 생각과 자오옌녠의 해석을 견줄 수 있는 전문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자오옌녠의 삶과 작품 세계를 통해 목판화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 중 백미로 꼽히는 <루쉰상>(『그림으로 만나는 루쉰』의 표지에도 실렸다)의 창작 과정을 들여다보면 예술가의 고민과 ‘일’에 관해서도 가늠해볼 수 있다.
“설계를 여러 번 거듭한 끝에 구도를 잡았다. 결국 루쉰의 모습을 수직으로 하고 배경에 굵고 가늘며, 길고 짧고, 성기고 촘촘한 가로 평행선을 교차시키는 것으로 정했다. 또한 화면에 흑과 백, 허와 실을 대비시켜 루쉰 선생의 이미지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루쉰 선생의 강골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거의 모두 직선을 사용하여 새겼다. 예를 들어 루쉰 선생의 형체나 안면 오관, 머리, 옷차림 등에서 단순하고 강렬한 흑백 리듬감을 주었다.”
“자오옌녠은 중국 판화계에서 루쉰 작품을 가장 깊게 탐구하고,
가장 빛나는 성취를 이룬 예술가이다.”리윈징(베이징 루쉰박물관 연구원)
어느 루쉰 키드의 위대한 생애
1924년에 태어난 자오옌녠은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고스란히 겪어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재학중이던 그는 1939년, 동료들과 함께 일본 침략에 대응하는 미술 선전활동을 벌인다. 그의 나이 열다섯의 일이다. 1945년 2차세계대전에서 참패한 일본의 항복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된 이후 국민당 통치 아래의 사회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자오옌녠은 당시 사회의 어둠을 담은 판화를 창작한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수립된 후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66년, 마흔둘이 되던 해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고, 그는 우파로 몰려 매일 끝없이 반성문을 제출하고 비판 투쟁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 루쉰 선생의 저작들은 금서가 아니었던지라,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자오옌녠은 루쉰의 저작을 쉼없이 읽었다. 특히 「아Q정전을 쓰기까지阿Q正傳的成因」라는 글 중 “이후에 다시 개혁이 있다면 아Q와 같은 혁명당이 분명 나타나리라 믿는다. 나도 소설 속 이야기가 사람들이 말하듯이 지금보다 먼저 일어난 시기의 일이길 바란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현대 이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현대 이후에 일어난 일이거나 어쩌면 이삼십 년 후에 일어날 일일지도 모르겠다”라는 구절을 접하고는 당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을 몇십 년 전에 예견한 루쉰의 통찰력에 탄복해 다시 조각칼을 들 수 있다면 루쉰 작품의 삽화를 그리겠노라 결심한다. 그 결심은 그가 칼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그는 『아Q정전』의 첫 삽화 작업을 1978년에 시작해 1994년, 일흔의 나이로 총 60편의 삽화를 완성한다. 『옛이야기, 다시 쓰다』에 수록된 삽화들은 2003년, 그가 여든을 목전에 두고 작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오옌녠은 여전히 묻고 촉구한다.
루쉰 선생이 『아Q정전』을 쓸 때가 1921년이었다. 시대는 발전하고 사람들 생활 방식도 크게 변했다. 하지만 정신은 어떤가? 나는 지금까지도 아Q식 정신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거울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신에 아Q식의 것이 있는지 그 거울에 비추어 보길 바란다. 206쪽
『그림으로 만나는 루쉰』은 자오옌녠의 한 생애를 온전히 쏟아부어 구현해낸 ‘루쉰 정신’의 눈부신 기록이다. 1921년 『아Q정전』이 세상에 나오고 정확히 100년이 흐른 지금, 『그림으로 만나는 루쉰』을 들어 우리의 좌표를 다시금 확인해볼 때이다.
책속에서
루쉰을 소재로 하였거나 루쉰 작품 삽화인 자오 선생의 모든 작품은 모두 흑백 목각이다. 흑과 백은 색채 계열 중에서 두 극단이다. 루쉰의 견해에 따르면 흑백은 목각의 정통이다. (중략) 쉽게 자잘한 기교로 흐르지 않고 목각의 ‘힘의 미’를 최선으로 실현할 수 있다. 흑백 대비의 강렬함으로 사람들에게 순수하고 명쾌한 미를 보여주고, 여기에 덧붙여 조형의 정확성과 사상과 예술의 풍성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과 혼을 움직이고 폐부에 스며드는 예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16~17쪽
창작자가 작품을 구상할 때 거듭 생각하고 거듭 그려야만 적절한 표현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법칙이라고 할 것이다. 관건은 자신의 생각이 분명해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38쪽
너를 죽이겠다! 하지만 살인의 죄명을 쓰지는 않겠다. 이것이 바로 그 고상한 척하는 ‘군자들’의 수작이다. 61쪽
사람 사는 세상에도 보이지 않지만 많은 선이 있다. 그리고 그런 선은 형체를 지닌 선보다도 더욱 꼭꼭 모든 사람을 묶고 있다.
많은 사람은 자기 선 안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서로 결탁하고, 여러 다른 세력 집단을 형성하여 서로 같이 꼭 끌어당기면서 자기 패거리들 이익만 생각하고 전반적인 국면은 고려하지 않는다. 68쪽
몇십 년 전 이렇게 정확하게 예견한 루쉰 선생의 통찰력과 판단력에 가슴속 깊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외양간’에서 결심했다. 다시 조각칼을 들 수 있다면 『아Q정전』 삽화를 그리겠다고. 113쪽
삽화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예술성을 지녀야만 텍스트 속 인물과 감정, 배경이 일체를 이루어 풍부한 감정이 생겨나고, 추상적 텍스트를 가시적인 회화 언어로 바꿀 수 있다. 146쪽
당시의 창작 경험으로 삽화가 상당히 하기 어려운 작업임을 절실히 느꼈다. 구체적 이미지로 추상적인 글을 표현하고 게다가 독자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과장된 처리가 적합할지가 어려웠다. 만약에 적절하지 않고 인물의 형태와 정신을 표현하지 못하면 꼭 글과 어울려야 하는 삽화가 발휘해야 할 역할을 할 수가 없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글이 주는 효과를 망칠 수도 있다. 231쪽
완성했다고 해도 새로운 생각이 생기면 여전히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창작이다. 249쪽
목각 예술은 칼 고유의 표현력을 발휘해야 진정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 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