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에서 뭘 하고 있어?”
낯선 여행지에서 남편이 물었다.
몇 주 전, 차에 치여 죽은 남편이.
보르헤스, 볼라뇨, 카프카와 코르타사르의 계보를 잇는 환상문학의 신세계
“로라 밴덴버그의 글이 지닌 기이함과 우아함을 사랑한다. 밴덴버그의 이야기는 살짝 뒤틀린 베틀로 짜여 있어서 늘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세번째 호텔』은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분열된, 영리하고 탁월한 작품이다. 이 책에는 노래와 같은 울림이 있다. 하지만 그 노래의 기저에 줄기차게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은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_로런 그로프(소설가, 『운명과 분노』)
보르헤스, 볼라뇨, 카프카와 코르타사르의 계보를 이어 탁월한 환상문학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미국의 젊은 작가 로라 밴덴버그의 장편소설 『세번째 호텔』(2018)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이자 한국 독자에게는 처음 소개되는 밴덴버그의 작품이다. 갑작스럽게 뺑소니 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이 쿠바 아바나에 갔다가 죽은 남편과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이 소설은 공포영화와 여행소설의 문법을 전복적으로 사용해 삶과 죽음, 자아와 정체성, 결혼과 사랑, 젠더와 여성에 대한 밀도 높은 탐구와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낡고 빚바랜 구시가지와 매끈하고 화려한 신시가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쿠바 아바나의 풍경은,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 위에 불쑥 침입한 초현실적인 사건의 밑그림으로서 더없이 적절하다. 작가는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인지 부조화와 정신적 탈진을 겪는 주인공의 심리를 건조한 듯 담담한 문체로 묘사하며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유령인지 환상인지 모를 남편의 뒤를 쫓는 주인공의 여정은 불가해한 공백과 반전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서사적, 심리적 공백을 메우는 일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세번째 호텔』은 한 여성이 겪는 불가사의한 사건의 이면을 더듬어가는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그 베일 뒤에 감춰진 것은 사건의 전말이 아니라 이야기의 공백 속에서 당신이 발견하게 될, 어쩌면 당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을 무언가이다.
죽음에서 돌아온 것들과 사투하는
‘최후의 여자’ 클레어의 기기묘묘 쿠바 여행기
“당신은 죽었어, 클레어는 생각했다. 어떻게 그걸 잊은 거야?” _본문 150쪽
12월의 어느 날, 클레어는 혼자서 쿠바 아바나에 도착한다. 공포영화 연구자였던 남편을 대신해 아바나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원래는 부부가 함께 올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클레어의 남편 리처드가 오 주 전에 뺑소니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공항에서 택시를 탔지만 주소를 잘못 말하는 바람에 두 번이나 엉뚱한 호텔에 갔다가 세번째 시도에 겨우 예약한 호텔에 도착한다. 그래서 그곳을 ‘세번째 호텔’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녀는 남편이 고대했던 좀비 영화 〈레볼루시온 좀비〉의 개막 상영에 갈 생각이었지만, 영화관 앞에 다가서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클레어와 영화관 사이에 투명한 벽이 솟아오른 것처럼 한 발짝도 더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이다. 클레어는 결국 관람을 포기하고 아바나의 거리를 헤매기 시작한다. 승강기회사의 영업 사원으로서 평소에 출장을 수없이 다녔지만 목적 없이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은 거의 없어서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온다. 어느 박물관 앞에서 발견한, 소름 끼치도록 낯익은 남편의 얼굴로부터. 거리 위에서 죽은 남편과 마주친 순간, 그와 함께 땅속에 묻혀 있던 과거의 유령들이 일제히 깨어나 섬뜩한 눈빛으로 클레어를 돌아본다. 남편과의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진 갈등과 의문들, 그리고 애써 억눌렀던 후회와 죄책감. 이제 클레어는 남편을 찾아 생경한 도시를 헤매며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온갖 공포스러운 것들과 사투해야 한다. 남편의 공포영화 논문에 자주 등장했던 ‘최후의 여자(Final Girl)’, 목숨을 건 결전을 벌이고 끝내 살아남는 마지막 여성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
삶과 죽음이 전복된 곳,
끝없는 불확실의 심연 속으로
『세번째 호텔』은 공포물과 여행소설의 토대 위에서 두 장르의 규칙과 문법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먼저 이 소설을 지배하는 정서는 ‘공포’다. 낯선 장소에서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설정은 공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적 구조를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세번째 호텔』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죽음’, 즉 중단된 삶이 아니라 ‘삶’, 즉 중단된 죽음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것(the undead)이다. 오히려 남편이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세상은 슬픔의 영역일지언정 공포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이 지닌 확실성이 파괴되어버린 곳, 규칙과 관습이 작동하지 않는 낯선 세상에서 주인공은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의 공포 속으로 추락한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클레어는 자신이 목격한 불가해한 현상의 답을 찾아 아바나의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우연히 ‘양자물리학과 내세’라는 세미나를 강연하는 교수를 만나 죽음에 대해,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 묻는다. 교수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클레어의 편협한 시각을 지적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우주의 모든 가능성은 동시에 발생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너무 제한적이어서, 너무나도 제한된 존재라서, 우리의 의식이 그 모든 가능성을 단 하나의 가능성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리는데, 그게 이른바 생(生)이라는 겁니다.” 클레어는 교수의 말을 듣고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서 목격한 남편은 그녀가 알던 그 리처드가 아니라 ‘어떤 다른’ 리처드, 수많은 가능태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이곳에 존재하는 그녀 역시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닐까? 그 순간 단일하고 고정된 주체로서의 자아는 무너져내린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긴 여정 끝에 진정한 자아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소설의 문법 또한 완전히 전복시킨다. 이제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클레어는 되살아난 남편에게 묻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질문을 고스란히 돌려받는다. “아바나에서 뭘 하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흰 상자 속 중첩된 가능성의 세계,
치밀한 사고실험으로서의 문학
클레어는 아바나로 오기 전, 병원에서 보낸 남편의 유품에서 작은 흰색 상자를 하나 발견한다. 모서리가 테이프로 봉해진 그 상자를 그녀는 끝내 열어보지 못하고 아바나까지 들고 와서 호텔방의 금고 안에 넣어둔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연상시키는 그 밀폐된 상자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은유로서 소설 전체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세번째 호텔』은 독자를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작가는 섬세하고 능수능란한 솜씨로, 철저히 계산된 혼란을 빚어낸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어느 영화감독이 공포영화의 진정한 목표라고 말했던 것, “현실 세계에서 길을 안내하는 도구를 빼앗고, 그것을 다른 종류의 진실을 알려줄 나침반으로 대체하는” 일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로라 밴덴버그의 뒤틀린 우주에서, 일반적인 서사의 문법은 모두 힘을 잃지만 당신이 공포물 속에 있다면 명심해야 할 규칙 한 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 것,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위험은 당신의 등뒤에 바짝 다가와 있을 테니까.
▶ 추천의 말
가장 혁신적인 형태의 문학은 현실의 전위를 일으킬 수 있다. 기묘한 표면 아래 많은 것을 감춘 채 하나의 세계 안에 또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보르헤스와 볼라뇨, 카프카와 코르타사르, 모디아노와 무라카미의 작품이 그랬고, 이제는 로라 밴덴버그가 그 뒤를 잇는다. 밴덴버그의 작품은 언제나 훌륭했지만, 『세번째 호텔』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이 완전무결한 소설은 한 치의 진부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워싱턴 포스트
로라 밴덴버그의 글이 지닌 기이함과 우아함을 사랑한다. 밴덴버그의 이야기는 살짝 뒤틀린 베틀로 짜여 있어서 늘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세번째 호텔』은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분열된, 영리하고 탁월한 작품이다. 이 책에는 노래와 같은 울림이 있다. 하지만 그 노래의 기저에 줄기차게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은 청각이 아닌 촉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로런 그로프(소설가, 『운명과 분노』)
이 눈부시고 놀라울 만큼 빈틈없는 소설 속에서, 슬픔으로 인해 정신적 혼란에 빠진 한 여성은 자기 자신을 사칭하는 존재가 된다. 꿈처럼 기발하고 불가해한 『세번째 호텔』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짊어지우는 부당한 요구와 결혼이라는 기이한 혼합체에 대한 심오한 초상이다. 로라 밴덴버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하나이며 경이로움 그 자체다. 가스 그린웰(소설가, 『너에게 속한 것』)
비범할 만큼 명료한 밴덴버그의 문장들은 소설 속 장소와 인물들을 기억 속에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미래에 컬트 고전의 반열에 오를 이 작품을 읽어라, 그리고 그 요동치는 서사의 물결에 몸을 맡겨보기를.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세번째 호텔』은 여러 상징과 다층적 구조로 이루어진 소설이며, 따라서 독자는 각자 원하는 대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정해진 결말도 정답도 없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당신 내면의 나침반을 빼앗아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하도록, 안개 속에서 집안을 이리저리 헤매도록 만들 것이다. 그럴 때 내가 해줄 조언은?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두라. 이제는 우리 모두 새로운 진실을 마주할 때다. NPR
로라 밴덴버그의 신작 『세번째 호텔』을 읽는 경험은 어두운 영화관에서 나와 밝은 햇빛 아래로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의 일부는 여전히 영화의 꿈같은 장면 속에 머물러 있고, 오히려 현실 세계가 환상처럼 느껴질 것이다. 작가는 모호함을 아주 편안하게 다루고, 이 책은 특정한 해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번째 호텔』은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또다른 호텔을 연상시킨다. “원한다면 언제든 체크아웃은 할 수 있지만 절대 떠날 수는 없다”는 그곳을. 미니애폴리스 스타 트리뷴
로라 밴덴버그는 ‘언캐니(uncanny)’의 예술가다. 몇몇 초현실주의적인 회화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급하게 읽으면 그 진가를 느낄 수 없다. 작가는 화가의 눈과 범죄 리포터의 필력으로 주인공 클레어의 인지적 혼란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세번째 호텔』을 읽다보면 조앤 디디온의 캐릭터를 뒤쫓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법칙을 따르는 우주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침잠하는 느낌이 든다. 보스턴 글로브
결혼과 슬픔뿐 아니라 여행의 매혹과 공포영화의 작동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이 소설의 다층적 구조는 너무나도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어 거의 M. C. 에셔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실재와 상상의 경계는 시종 흐릿하고, 그 모호성은 감동적이면서도 마음을 뒤흔든다. 굉장한 여운과 탁월한 독창성을 지닌, 깊이 읽은 만큼의 보상이 따르는 소설. 커커스 리뷰
미스터리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 로라 밴덴버그는 공포물의 문법과 관습을 활용하는 한편,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같은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환상성을 펼쳐 보이며 주인공 클레어의 여정을 슬픔에 대한 꿈결 같은 탐구로 바꾸어놓는다. 『세번째 호텔』은 삶과 죽음, 그리고 내세에 대한 강렬한 소설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쿠바에서 죽은 남편을 쫓는 여자에 대한 이 초현실적인 소설은 기이함 속에 너무나 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책을 읽다가 시선을 들 때마다 세상이 어딘가 조금씩 달라졌다고 확신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릿허브
이야기의 플롯과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손아귀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예측 불가한 소설. 『세번째 호텔』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악몽이 태어나는 곳에서 마법을 부린다. 댈러스 모닝 뉴스
이 소설은 물결처럼 흐르는 놀라운 문장의 힘으로 부유하는 동시에 영화 이론과 형이상학, 습하고 뜨거운 아바나의 풍경을 거쳐 기억과 사랑, 상실 속으로 깊이 헤엄쳐 들어간다. 로라 밴덴버그는 도플갱어인지 좀비인지 정신착란인지 모를 이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스토리텔러 중 한 명으로서, 작가는 기이한 공포의 세계를 가슴 아리도록 인간적인 것으로 승화시킨다. 『세번째 호텔』은 반드시 반복되어야 하는 일종의 꿈이다. 이 책을 다 읽고 그 꿈을 가만히 곱씹어보라. 그리고 다시 읽어라―다시 꿈꿔라. 플라우셰어스
▶ 책 속에서
마타 감독은 관객을 공포 상태로 밀어넣어 그들의 나침반, 즉 현실 세계에서 길을 안내하는 도구를 빼앗고, 그것을 다른 종류의 진실을 알려줄 나침반으로 대체하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말했다. 이때 관객이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그런 교체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게 속임수의 핵심이다. 그것은 관객의 상상과 영화 사이의 은밀한 거래이며, 관객이 극장을 떠날 때 그 새로운 진실도 함께 묻어 나가 뱀장어처럼 피부 속을 헤엄쳐 다니게 된다. 본문 22쪽
사고가 있기 몇 달 전부터 남편은 자신이 어떤 종말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음을 분명 감지했을 거라고, 생의 일부가 깨져 유빙처럼 흘러가버릴 것임을 예감할 때 찾아오는, 날카롭게 죄어드는 공포를 느꼈을 거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당신 누구야? 생의 이 특정한 중간 지점에서,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둘 중 누구도 그가 곧 모든 것을 잃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본문 42쪽∼43쪽
돌이켜보면 그것이 그들 결혼생활의 한 가지 기적이었다―한 사람은 손톱을 집어삼키기 직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로 깊이 고민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밤새 흐느낄 때 꼭 끌어안아줄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는 것. 본문 45쪽
모든 죽음 뒤에는 일련의 질문이 놓여 있다. 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런 질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시신과 함께 땅속에 묻겠다고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질문은 삶의 조건들을 너무나 철저히 해체해버리기 때문에 거기서 등을 돌리는 건 중력을 벗어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클레어는 잊고 나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계속 건드리고 또 건드릴 생각이었다. 그녀는 삽을 들고 무덤 위에 서서 흙을 마구 파헤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본문 130쪽
클레어는 (...) 타인을 안다는 것이 고정불변하는 상태가 아님을 이해했다. 안다는 것은 유동적이고, 말로 형언할 수 없고,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의 정확한 위치, 즉 앎이 끝나고 모름이 시작되는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경계를 넘어선 다음에야 경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본문 167쪽
클레어는 너무 정직한 것, 너무 다 터놓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커플 사이에 단 하나의 비밀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정직은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이름을 달고 나온다. 잔인함도 그중 하나이며, 지나친 정직함은 사람을 산산조각낼 수 있다. 본문 168쪽
모두가 사라지고 싶어합니다, 베레스니악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그 두 가지 충동은 분리될 수 없어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삶에서 사라지고 싶은 욕망.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못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매일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니, 살아가는 게 맞나요? 우린 모두 자기 자신을 아주 조금씩 지워가고 있어요. 음주, 공상, 비밀, 부정(否定), 히스테리, 이중생활, 자살, 권태, 책략.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라지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죠. 본문 177쪽
그녀의 어머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도망치지 않으려고 휴가를 가는 거라고 늘 말했었다―일시적인 도피는 영구적인 도피를 예방할 수 있다. 본문 177쪽
물론, 결혼은 클레어를 완전함으로 이끌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일련의 질문들이 잇따랐고, 궁극적으로 그녀는 죽음이라는 그 명확한 상황조차 불확실한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극단적인 불완전함에 이르렀다. 죽음이 불확실하면 그다음에는 삶이 불확실해진다―혹은 언제나 존재했던 불확실함이 겉으로 드러난다. 돌이켜보면 그들이 아이를 갖지 않은 것, 끝맺음을 향한 자연스러운 서사 충동을 거부한 것은 파격에 가까운 행위였다. 아이를 갖는 것이 끝맺음인 이유는 그를 통해 결혼의 목적―아이를 낳는 것―이 명백해지고, 한 개인의 정수(精髓)가 이 세상에 자리를 보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본문 212쪽
어떤 이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가가 그 사람이 용감한지 정직한지, 혹은 적어도 그럭저럭 괜찮은지를 결정한다. 눈은 말이 없고 그러므로 대단히 진실되다. 눈은 자신이 본 것을 누군가와 공유할 필요가 없으며,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본문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