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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비판적 독해

저자
이언 파커, 토드 맥고원, 브루노 보스틸스, 조슈아 러메이, 에이드리언 존스턴
저자2
베리나 콘리, 에릭 포크트, 자밀 카더, 슬라보예 지젝
역자
배성민
출판사
글항아리
발행일
2021-11-22
사양
384쪽 | 140*205 | 무선
ISBN
978-89-6735-966-9 03100
분야
철학/심리/종교
정가
19,800원
“지젝은 우리 시대를 위한 사상가다, 그 자신이 틀렸을 때조차!”
8명의 학자와 지젝이 펼치는 논쟁
지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젝을 시대정신의 한가운데 놓는 비평들
이 책은 철학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지젝에 대해 8명의 학자가 비평하고 마지막으로 지젝이 그에 답하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거장이지만 동시에 당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꼽히는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고, 매년 발표되는 그의 저작들은 반복되는 데다 체계성이 뚜렷하지 않으며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애스트라 테일러는 지젝의 관점이 너무 자주 바뀐다고 지적한다. 지젝은 “이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가 몇 분 만에 “이 세상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또한 지젝은 마르크스주의 종교 비판에 맞대응할 때, 텍스트를 굉장히 선별해서 읽고, 미묘하게 바꿔치기하며, 영리하게 뒤집는 행위를 섞는다.
이런 식의 저술은 반발을 사기도 하지만, 이 책의 필진은 지젝에 대한 이런 비판이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라캉을 전유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헤겔을 재장전하고 있는 지젝 자신이 이런 이론 작업은 ‘열려 있고, 부정적이며,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필진은 지젝이 영향력 있고 그의 텍스트는 활발하게 인용됨에도 불구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고려한 시각에서 그 가치를 평가한 저서는 아직 나오지 않아, 지젝의 사상이 다양한 분과학문에 어떤 의미를 발휘하는지 재평가하고자 한다. 즉 양자물리학, 절대적이고 유물론적인 헤겔식 기독교, 탈식민주의적 폭력, 생태정치학, 의례 행동 등 지젝의 저작이 포괄하는 궤적을 쫓는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사상이 왜 여전히 혁신적인지를 지젝의 이론 틀을 활용하면서 평가하거나, 주요 사상과들과의 대화 속에 지젝을 위치시킨다. 다시 말해 지젝의 사상을 포스트모던한 시대정신의 주도적 흐름에 개입시키면서 문화 연구의 보편화된 역사주의와 인지과학의 진화지상주의, 문학 이론이 추구하는 의심의 해석학이 그의 저작과 교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리학과 기독교는 유용한가
지젝주의 비평가 이언 파커는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주의 정신분석, 헤겔주의 변증법을 이론의 자원으로 삼으면서 각 자원에 내재된 모순을 이용해 다른 자원을 비판하는 지젝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사상가’로 높이 평가한다. 방금 말한 세 이론 중 지젝에게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헤겔이다. 사유와 삶을 추동하는 영구 기관인 ‘부정’의 변증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지젝이 이해한 헤겔은 늘 ‘아니오’라고 말한다). 파커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심리학이 득세하는 까닭에 지젝의 개입이 유용하다고 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열렬한 관심을 쏟으면서 저마다 감정노동에 내몰리고, 자신을 치료적 자아 강화술과 관리 및 적응 가능한 실체로 바꾼다. 하지만 지젝은 자아란 통합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헤겔로 돌아가 부정의 변증법을 적용하는 지젝에게는 결코 ‘종합’을 이룰 방법이 없다. 심리학은 우리의 고통을 달랜다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우리는 거기에 더 단단히 얽히고 만다.
토드 맥고원과 브루노 보스틸스, 조시 러메이는 지젝의 비판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토대를 제시한다. 즉 라캉을 전유하여 독일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기독교를 재활성화하는 지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철학과 종교·정치에 대해 그의 사상이 지니는 혁명적 잠재력 및 한계들을 평가하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맥고원은 지젝이 헤겔을 마르크스의 비판자로서 이해하는 전복적 해석을 검토한다. 헤겔을 사유하는 지젝에게 정치 투쟁에서 ‘적대관계의 불가피함’은 매우 중요하다(칸트처럼 세계의 사물을 지나치게 다정하게 다루다가는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적대가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 문제는 스스로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면 적대를 넘어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진짜 사랑을 추구하는 배우자를 만나면, 완벽한 직업을 구하면, 건강에 맞는 생활 방식을 취하면 적대를 초월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지젝의 철학은 ‘적대 없는 존재는 없다’는 명제를 중핵으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호되게 비판하는 데서 출발해야 세계적 자본주의를 심문하는 길을 열 수 있다. 맥고원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헤겔 덕분에 “지젝은 폭력과 적대를 자신의 정치학에 담아낼 수 있었다.”
보스틸스는 지젝이 기독교의 도착적인 무신론적 중핵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방어하려는 하자 한계가 뻔히 보인다고 비판한다. ‘지젝은 왜 이런 때에 굳이 기독교 유산을 지키자고 과감하게 목소리를 높이는가?’ 지젝의 응답은 이렇다. “나는 골수 유물론자다. 유물론자는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내 주장이다. (…) 그리고 사실 오직 유물론자만이 이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 유물론자임을 자처하고 마르크스·프로이트를 성실히 독해하는 이로서 그의 입장에는 논리적으로 도착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에 보스틸스는 지젝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방어하려고 할 때 헤겔과 라캉을 기독교로 경유하는 삼각 구도에 갇힌 게 문제라고 본다. 거기에는 계보학적이거나 역사적 유물론적 조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보스틸스는 지젝 안의 이런 공백을 메우고자 지젝의 기독교 해석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을 수정하면서 뒤집는 방식을 검토한다.

지젝은 과녁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는가
에이드리언 존스턴과 베리나 콘리, 에릭 포크트, 자밀 카더는 지젝의 저작에 등장하는 도발적인 주장들을 조명한다. 최근 지젝은 양자역학과 미디어 연구, 생태학적 연구, 탈식민주의 연구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탐구했다. 먼저 존스턴은 지젝이 양자역학을 전유한 것은 중요하긴 하나, 완벽히 유물론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존스턴은 지젝이 양자역학을 대타자가 상정하는 하나이자 전부로 변형시키는데, 이 자체가 지젝의 존재론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존스턴의 결론은 이렇다. “비물질적 공백인 ‘무’에서 물질적 대상인 ‘어떤 것’이 발생한 사건은 이렇게 발생한 현실에서 주체가 등장하는 것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이에 지젝이 반박하자 존스턴은 지젝이 ‘과녁을 놓쳤다’며, 그 자신은 유물론 철학으로 과학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경향을 지젝과 함께 넘어서고자 한다고 밝힌다.
콘리는 지젝의 ‘에코 시크eco-chic’가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인 차원을 띤다고 비판한다. 생태학은 인류 전체가 매달리는 시급한 이슈이기에 지젝은 ‘배제된 자를 해방시키자’는 맥락에서 생태학을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생태학을 신비화하는 것은 강력히 비판한다. 가령 뉴에이지 신봉자나 정원을 가꾸는 부르주아들, 혹은 환경을 보호하겠노라는 기업들이 균형 잡힌, 조화로운 자연이 주는 교훈을 가르치려 하지만 이들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기분 좋은 감정을 느낄 뿐 근본부터 사고하는 힘을 지니지 못했다. 지젝은 ‘적대’의 관점에서 빈민촌이 ‘진정한 사건이 일어날 만한 장소’이며, ‘자기 몫이 없는’ 배제된 이들, 즉 적대에 주목하지 않은 채 환경과 싸운다면 ‘우리는 진짜 보편성에 이르지 못한 채 사적 관심사에만 머물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콘리는 생태학과 배제된 자를 하나로 모은다는 점에서 지젝의 혁명적 평등주의를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지젝처럼 사태를 철학적 수준에서 논의하면 생태학적 실천을 강구할 때 곤란해진다”고 지적한다.
포크트와 카더는 지젝의 사상이 탈식민주의 연구에 유용한지 묻는다. 지젝은 이 분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그의 사상 속에서 탈식민주의와 관련된 지적 탐구를 끌어낼 수 있다. 포크트는 지젝과 프란츠 파농의 저작에 나타난 해방적이고도 보편적인 정치학 개념들이 대면하는 장을 만든다. 포크트가 보기에, 파농과 지젝은 이론 틀이 다르더라도 가장 배제된 자가 서 있는 위치 그리고 그들과 동일시하는 몸짓에서 접점을 형성한다. 파농이 말한 ‘어디서나 비참한 자들’과 지젝의 ‘자기 몫이 없는 자들’은 같은 부류로, 이들에게서 진짜 정치의 보편화가 일어날 것이다.
카더는, 레닌을 반복하자는 지젝의 요청이 정치와 경제가 융합되는 지점에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본다. 지젝은 “(공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제거된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지젝은 세계 차원에서 혁명을 북돋우려고 레닌이 제안한 연합은 놓치고 있다는 것이 카더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지젝은 탈식민주의 주체에 내재된 혁명 잠재성을 지나치는데, 가령 탈식민주의를 티베트와 빈민가로 축소·환원하면서 그들 주체가 배설물같이 버려지도록 두는 것이 한계다.

***

마지막 장에서는 지젝의 응답이 제시된다. 그는 8명의 학자가 제기한 주요 주제와 우려에 대해 넌지시 대답한다. 지젝은 “찌꺼기 인간은 배제되고 자신이 있을 자리마저 인정받지 못하지만 보편 그 자체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헤겔이 명백히 결론 내리지 않은 것을 지젝이 마르크스를 전유하여 되살린 것으로, 프롤레타리아, 즉 자기 몫이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지젝에 따르면, 찌꺼기 인간들의 ‘권리 없는 권리’는 실제로 상위 권리이며 반성적 권리다. 이들은 자유로운 삶이라는 보편적 영역에서 배제되었으므로 그런 삶을 보장해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보편적’이다. “헤겔이 올바로 판단했듯이, 찌꺼기 인간으로서 부자는 개별자이지만, 찌꺼기 인간으로서 빈자는 헤겔의 판결과 반대로 잠재적, 보편 차원을 포함한다.” 지젝은 반복을 통해 조금씩 새로운 가능성들을 드러낸다. 따라서 8명의 필진은 지젝의 저작이 우리에게 밝혀놓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장 안에서 ‘여전히 혹은 아직도 지젝인가’를 되물으며 지젝주의적 계기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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