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 출간★
시대의 사상적 영향에서 벗어나 온 존재에 대한
겸허한 사랑으로 나아간 위대한 작가의 문학적 발자취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창작 시기는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 1845년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새로운 고골’이라는 문명을 얻은 때부터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게 된 1849년까지가 초기로, 당시 도스토옙스키가 심취한 사상의 영향과 젊은 작가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정립해나가는 과정이 작품에 뚜렷이 드러난다.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약한 마음」 「정직한 도둑」 「백야」를 꼽는다. 1849년 ‘금요회’에서 벨린스키가 고골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 형기를 보낸 시기를 제외하고, 『죽음의 집의 기록』을 집필하기 시작한 1855년부터 형 미하일과 창간한 잡지 『시대』가 폐간된 1863년 전반까지를 중기로 잡는다. 하지만 생애에서의 삼십대, 그중 8년을 유형생활로 보낸 탓에 중기에는 작품 수가 현저히 적다. 후기는 1863년 『지하로부터의 수기』 집필을 시작한 때부터 1881년 타계하기까지로,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장편소설 다섯 편(『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창작된 데 더해 「농부 마레이」 「온순한 여인」 「우스운 인간의 꿈」 등 주요 중·단편 역시 창작된 시기이다.
―「약한 마음」 「정직한 도둑」(1848)
도스토옙스키 중·단편 선집 『백야』는 작가의 창작 시기별 대표작을 엄선해 순서대로 톺아보며 이 위대한 작가의 문학적 발자취를 그려볼 수 있게끔 구성되었다. 「약한 마음」 「정직한 도둑」 「백야」는 모두 1848년 당대 러시아의 대표 문학 잡지였던 『조국의 기록』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그즈음 도스토옙스키는 프랑스 사상가 푸리에의 영향을 받아 ‘공상적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신봉한 페트라솁스키가 조직한 서클에 참여하고 있었다. 공상적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모든 인류가 형제라는 이상에 기초하여 평화로운 방법으로 지상에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설파했다. 「약한 마음」의 주인공 바샤 슘코프는 타인의 불행을 두고 자신만 행복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앞두고 그저 중요하지도 않은 업무를 제때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신착란에 이른 약한 마음의 소유자다. 「정직한 도둑」의 화자 아스타피 이바노비치는 알코올중독자 떠돌이 예멜랴를 가족처럼 거두고, 예멜랴가 값진 승마 바지를 훔쳐 판 뒤 술로 탕진했음에도 그에게 진실한 연민을 보내며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인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통해 공상적 유토피아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인간형을 그리는 동시에 이 공상적인 사상 내 균열을 간파하고 냉철히 입증해냈다. 표제작 「백야」는 이러한 작가적 역량이 무르익은 시기에 창작된 중편소설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백야」(1848)
몽상적 테마가 서정적이고도 문학적인 형태로 구현된 「백야」는 ‘감상 소설(어느 몽상가의 회상에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어느 몽상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체가 다섯 장으로 구성되며―첫번째 밤 / 두번째 밤 (나스텐카의 이야기) / 세번째 밤 / 네번째 밤 / 아침―이는 기이할 만큼 명랑하고 낙천적인 환상에 젖은 당대 청년들의 시대정신을 반추하며 그에 대응하는 현실 인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기능적 설계(“나의 밤들은 아침이 오면서 끝이 났다”)랄 수 있다. 화자는 몽상가적 성향을 냉철히 분석한다. 몽상가는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중성적인 존재’이며, 자기 삶을 매 순간 마음 내키는 대로 새롭게 창조해가는 예술가이자 거리에 실재하는 사람들로 자신만의 상상의 왕국을 건설하느라 현실의 삶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유형이다. 이 몽상가는 자신의 삶을 ‘범죄이고 죄악’이라 비판하지만, 실상 그는 아름다운 페테르부르크의 백야에 나스텐카를 만나 사랑에 상처받은 마음을 도닥여주고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타인에게 진실한 연민을 느끼는 이타적인 인물이다. 나스텐카는 현실적인 여인임에도 몽상적 성향을 지니며, 사랑하는 남자와 재회해 사랑을 이루었음에도 화자와 친구이자 형제가 되겠다는 맹세로 인류애와 형제애를 전하는 동시에 실현될 수 없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꿈을 다시금 환기한다.
―「악어」(1865)
중기를 거쳐 1865년 발표된 「악어」는 잡지 『시대』가 폐간당한 후 형과 함께 새로 창간한 『세기』에 연재한, 시대의 사상적 논쟁을 반영한 중편소설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목록 중에서는 보기 드문 풍자 소설이다. 연재 당시, 악어 뱃속을 감옥에 대한 알레고리로 본 비평가와 독자가 투옥중이던 사상가 체르니솁스키를 조롱했다고 작가를 비난하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의 파사주에서 있었던 실제 악어 전시를 모티프로 한 이 소설은, 서구에서 러시아로 유입된 자본주의, 특히나 경제원칙을 중시하는 당대 풍조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한다.
―「보보크」(1873)
1873년에 발표된 「보보크」는 당시에는 무의미하고 병적인 소품으로 치부되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작가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온순한 여인」 「우스운 인간의 꿈」과 함께 ‘철학적 환상소설 삼부작’(도스토옙스키 연구자 투니마노프V. A. Tunimanov의 정의)으로 묶이는 등 그 가치가 재평가된 작품이다. 기이한 작가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그는 어느 날부턴가 “보보크, 보보크, 보보크!”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러시아어로 ‘콩알’을 뜻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신비로운 소리의 일종으로 작용한다). ‘다른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가둔다고 해서 자신의 현명함이 증명되는 것도 아닌’데도 그는 세상에 의해 정신 나간 작자로 내몰린 상황이다. 어느 날 장례식을 따라가 묘지 사이를 서성이다가 돌연 무덤 속 시신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고, 몸이 썩기 전 의식이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파렴치하고 방탕한 인간들의 모습에 격렬히 분노하는 한편, 조금은 위로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듣게 될 가능성을 희망하며 다른 묘지를 찾아가 귀를 기울여볼 계획임을 밝힌다.
―「예수의 크리스마스트리에 초대된 아이」 「농부 마레이」 「온순한 여인」 (1876)
도스토옙스키는 1876년 『작가 일기』를 월간지 형태로 재발행하며 창간호 격인 1월호에 러시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조명한, 「구걸하는 아이」와 「예수의 크리스마스트리에 초대된 아이」 두 편의 글을 나란히 게재한다. 그는 ‘현대의 러시아 아이들’을 다루고픈 작가적 열망을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 장르로 창조해냈고, 따뜻한 감정이 살아 숨쉬는 이 작품은 당대 평론가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어 2월호에 발표한 「농부 마레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과 동일인인 화자가 등장해 스물아홉 살 시베리아에서 수용소생활을 하던 중에 문득 떠오른 아홉 살 때 겪은 일을 들려주는 구성의 단편소설이다. 농부 마레이가 베푼 온정, 농노와 주인집 아들 간의 계급을 초월해 존재하던 인간적인 온정을 묘사하며 러시아 민중의 힘을 설파하는 작품으로, 도스토옙스키 집안 영지인 다로보예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인 농부 마르크 예프레모프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11월호에 발표된 「온순한 여인」은 그 부제로도 언급되듯 ‘환상적인 이야기’로, 여기서의 환상성은 그 내용보다 형식에서 두드러진다. 소설의 도입부에 ‘작가로부터’라는 장치를 통해 앞으로 서술될 이야기가 바로 몇 시간 전 아내가 자살해버린 남편의 변을 사건 현장에서 속기사가 받아적듯이 기술했다는 점이 먼저 설정되고, 이어 그 남편이 화자로서 등장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복수를 꿈꾸는 화자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고립된 삶을 살다가 저당물을 잡히러 오던 열여섯 살 소녀에게 청혼해 아내로 맞는다. 그는 전당포에 온 이 소녀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 때,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한 표현을 빌려 “나, 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악행을 원하지만 정작 행동은 선량한, 어떤 완전체의 일부”라 자신을 소개했다. 세상에 등돌린 삶을 사는 그는, 아내만은 아무런 설명이나 대화 없이도 자신을 존중해주는 존재이기를 바라며 결혼생활 내내 고의적으로 침묵한다. 결국 온순했던 아내는 공격적으로 변해 그에게 맞서다 마침내는 자살하고야 마는데, 이 소설은 바로 그 온순했던 아내가 왜 자살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서 완성된다.
―「우스운 인간의 꿈」(1877)
「우스운 인간의 꿈」은 1840년대 공상적 사회주의와 결별한 후에도 지상 낙원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못한 작가의 믿음이 응축된 작품으로, 최후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집필을 견인한 후기 대표작 중 하나다. 화자인 ‘나’는 사람들은 모르는 진리, 즉 이 세상이 존재하건 혹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건 다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 후로 울적해져 생을 끝내려 한다. 어느 날 밤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 순간, 한기로 온몸을 덜덜 떠는 어린 소녀가 그의 팔을 잡고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나’는 발을 구르며 소리쳐 아이를 쫓는다. 집으로 돌아와 권총을 앞에 두고 앉았으나 그 어린 소녀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 ‘아까 나는 연민을 느꼈다. 그 아이를 꼭 도왔어야 했다. 그런데 왜 돕지 않았을까?’ 자신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이러나저러나 다 마찬가지라서. 화자 ‘나’는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다 부지중에 잠들어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죄악의 근원이 되어 인류의 역사를 압축한 듯한 일련의 변화를 체험한다. 화자의 꿈은 곧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믿음을 대변한다. 더는 공상적인 사회주의자의 꿈이 아닌, 분열된 세계의 상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깨닫고 당장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이상을 말이다. 꿈에서 깨어난 화자는 ‘삶에 대한 인식은 삶 자체보다 우위에 있고, 행복의 법칙에 대한 지식은 행복 자체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 사상에 맞서 싸우길 다짐하며 거리로 나가 전날의 그 어린 소녀를 찾아내고야 만다.
추천사
도스토옙스키를 읽으십시오,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십시오, 그저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도스토옙스키를 욕하십시오. 단, 읽으십시오, 가능한 한 오직 그만을. _인노켄티 안넨스키(시인, 평론가)
「백야」에는 감상적인 자연주의의 진정한 시인이 쏟아낸 고통스러운 시가 담겨 있다. _아폴론 알렉산드로비치 그리고리예프(시인, 평론가)
본문에서
멋진 밤이었다. 그렇게 멋진 밤은, 친애하는 독자여, 오직 젊은 시절에나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던지, 한번 쳐다보면 저도 모르게 스스로 이런 질문이 들 정도였다. ‘이리도 아름다운 하늘 아래 살면서 어째서 사람들은 온갖 화를 내거나 변덕을 부리는 걸까?’ 이 또한 젊은이다운, 정말이지 젊은이만이 품을 수 있는 의문이지만, 친애하는 독자여, 하느님께서 이런 의문의 기회를 당신 영혼에 더 많이 부어주시기를……! _「백야」(115쪽)
누구나 어른이 되면 예전에 품었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이니까요. 그 이상들은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돼버립니다. 만약 거기 다른 삶이 없다면 이 먼지 부스러기들을 가지고 다시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습니다._「백야」(153쪽)
이 어리석은 몽상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 무엇으로도 쫓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몽상도 꽤 생명력이 긴 편이거든요! _「백야」(154쪽)
다른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가둔다고 해서 자신의 현명함이 증명되는 건 아니니까. “K가 미쳐버렸다, 고로 우리는 이제 현명하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_「보보크」(272쪽)
지상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거기서는 삶과 거짓말이 동의어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거짓말을 멈춰보는 겁니다, 재미를 위해서 말이죠. 젠장, 무덤에도 뭔가 의미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_「보보크」(295쪽)
오, 진실함이여! 사람은 바로 진실할 때 승리를 거두는 법이다. _「온순한 여인」(340쪽)
나는 그녀의 젊음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기뻤다. 왜냐하면 젊음이야말로 진정한 관대함이기 때문이다. 비록 파멸의 끝에 위태롭게 서 있을지라도 괴테의 위대한 말은 빛을 발하지 않던가. 젊음이란 단 한 방울만 있어도, 살짝만 마음이 기울어도 관용을 베풀기 마련이다. _「온순한 여인」(341쪽)
나는 언제나 오만했고, 언제나 모든 게 아니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특히 행복에서는 결코 타협하는 법이 없었기에, 나는 전부를 원했다. _「온순한 여인」(351쪽)
아마도 우리를 꿈으로 이끄는 건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며 머리가 아니라 심장인 것 같다. _「우스운 인간의 꿈」(4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