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장편소설 시리즈 ‘면민 실록’의 첫걸음
『산 사람은 살지』는 충남 안녕시 육경면 역경리에 사는 김동창・이기분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주로 기분이 2010년부터 기록한 일기와 상부(喪夫)하고 2019~2020년을 살아가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기분이 과거에 쓴 일기를 2019년과 2020년에 들춰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현재를 짚어본다. 이 일기는 실제로 홀로 남으신 작가의 어머니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더욱 현실적이다.
작가는 시골의 핍진성에 유독 공을 들였는데 그것은 “텔레비전의 시골은 ‘연출된(왜곡하고 조작한)’ 시골”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작품 속 시골은 도시인이 잠시 머물며 그 정취를 만끽하고 농사에 실패하더라도 허허 웃어넘기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시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산다는 상상을 해본 적 없고, 나중에 죽어 묻힐 자리까지 봐두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특히 실감나는 충청도 사투리가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그래서 진짜로 가고 싶은 규, 안 가고 싶은 규?”
“잘 모르겄어야. 별로 가고 싶진 않은디 해놓은 말이 있어서.”
“그럼 목욕이나 가셔유. 목욕하시고 저희랑 점심이나 드셔유.”
“따져대면 어쩐다냐?”
“까먹었다고 하슈. 잘 까먹으시잖유.”
에라 모르겠다. 작은애 차 타고 내뺐다. _243쪽
2020년까지 기분이 겪었던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기분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이토록 평범한 사람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살았고 결국 악착같이 오늘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모든 인물은 기록해야 할 특별한 대상이다. 동창은 8남매 중 막내이고 이 작품에는 8남매와 그 배우자들, 조카들, 동네 사람들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육경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면민의 이야기는 『산 사람은 살지』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네 부모님 이야기
“이젠 안다. 자식 걱정은 죽는 날까지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산 사람은 살지』는 2019년 5월부터 2020년 5월까지 월별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농가에서는 달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농사일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파악한다. 시골이라 하면 평상에 한적하게 앉아 있는 노인들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소설 속 시골은 도시 못지않게 바쁘다. 과거에는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현재에는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끊임없이 농사일을 하는 기분 부부의 모습에서 자식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은 부모를 걱정하는 모습은 여러 매체 속 흔한 장면이지만 작가가 구축한 촘촘한 역경리의 모습 덕에 현실적인 감동으로 다가온다.
기분은 조카네 과수원에서 일하고 온 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과 하나 잘못 땄다고 그르케 지청구허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냐. 그래도 내가 지 작은어머닌데 동네 사람 앞에서 학교 선생처럼 따박따박 훈계를 해대니, 아이구 창피해.”
“안 가시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소리 들으면서 왜 가셔요?”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가만히 있으면 돈이 나오냐?” _172~173쪽
‘그럼에도’ 산 사람은 살지
이 작품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기분은 몸이 약해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자살을 세 번이나 시도했고, 50년 동안 동고동락한 남편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부고가 온다. 70대인 기분 주변에는 죽음과 병과 요양병원이라는 우울한 단어들이 가득하지만, 읽는 사람은 오히려 삶을 생각하게 된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고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나이인 기분도 오월의 풀처럼 일어나 오늘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고 역경리에 혼자 남게 된 기분에게 사람들이 걱정 어린 말을 건네자, 기분은 낙천적이고 어딘가 느긋한 말투로 이렇게 답한다. “산 사람은 살지 뭐가 걱정이냐.”
기분은 또 남편 무덤의 풀을 뽑아댔다. 풀들도 살아보겠다고 저리 악착을 떠는데 산 사람이 못 살겠나. 살 것이다. 힘껏 살 것이다. _3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