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목할 만한 요소들
▲ 입체적인 인물 이해 및 심리 묘사
- 618년 9월 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이 죽었다. 중국을 통일한 수 제국에 정면으로 맞선 그의 담대함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그는 일생을 수나라와의 끝없는 긴장과 전쟁 속에 보냈고, 결국 승리했다. 그는 사람을 잘 부렸다. 부하를 신임하고 전쟁터에서 전권을 위임했다. 612년 명장 을지문덕이 역사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양왕의 동생이자 훗날 영류왕이 되는 건무가 대동강 어귀에 상륙한 수나라 보급선단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39쪽)
- 632년 1월 신라를 54년 동안 다스렸던 진평왕이 죽었다. 그는 덩치가 우람했다. 하지만 결코 둔중하지 않았다. 성숙한 남자였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 632년 선덕여왕은 45세가 넘는 나이에 신라의 왕으로 즉위했다. 당시로서는 할머니였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파가 된 뒤에는 빛을 잃었다.
- 김춘추는 독재자 연개소문을 보고 혁명을 꿈꾸게 됐다. 그는 이미 일사불란한 독재체제의 강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었다. 그해(642) 대신과 왕족들을 추방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한 백제 의자왕이 신라를 급습해 신라 서부 지역 총사령부인 대야성이 함락됐고,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었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는데도 신라는 다수의 귀족회의체 화백을 통해 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분쟁의 소지가 많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느라 결정이 늦어졌다.(284쪽)
▲ 책 전반에 걸친 자세한 전투 묘사
-전투의 공간에도 적정 병력이 있다. 2인용 참호에 5명이 들어가면 효율이 떨어지듯이 백제는 신라가 요새화한 운봉 분지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한 꼴이 됐다. 백제군의 대열은 신라군보다 밀집돼 있었다. 양측의 궁수들이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고 해도 백제군이 더 많은 피해를 봤을 것이다. 백제군의 퇴각이 시작됐다(177쪽)
- 진평왕은 함안에서 신료들과 함께 죽은 귀산을 맞이했다.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한 자들을 왕이 직접 보기 위해 왕경에서 함안까지 마중나간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중상을 당한 귀산 등이 진평왕을 만나기 위해 함안까지 갔다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막성 전투 종료 후 그곳에 있던 상당수의 신라 병력이 왜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함안 쪽에 재투입되었고, 그 행렬 속에 귀산 등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때도 규슈에는 왜군 2만5000명이 배치되어 있었고, 언제 함안 지역에 상륙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까지도 신라에 대항하는 가야 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군이 왕경인 경주를 직접 침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군이 함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실 이외에도 유력한 근거가 있다. 당시 신라에 대항하는 가야 세력들이 왜의 원군을 기다리며 잔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2쪽)
- 이듬해인 603년 왜국에 중요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해 2월 신라 원정군 총사령관 구메황자가 죽었고, 4월 그 자리에는 다가마황자當摩皇子가 임명됐다. 하지만 백제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는지 아니면 패전의 상처가 매우 컸던 것인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고구려가 군대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184쪽)
▲ 전쟁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전쟁에는 끝없는 피로감, 공포심, 갖가지 결핍감이 얽혀 있다.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게 될 치명적인 부상의 위험도 매우 높았다. 병사들이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전쟁을 치르게 하려면 왕의 휘하에서 최선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왕이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아야 한다.(187쪽)
- ‘화살받이’들은 전진만 해야 했다. 그들이 다 소모된 후에야 토번군 본대의 차례가 돌아왔다. 토번은 병력을 외부에서 포획해 전쟁을 했다. 본대의 병력 대부분도 전쟁 직전에 토욕혼 지역을 공격해 산 채로 잡아온 당항黨項과 백란白蘭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토번은 전쟁을 하면 병력이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포획된 인간집단을 부리는 기술이 탁월했다. 토번군은 원
초적인 힘과 포획조직의 시스템 그리고 포획 자원의 운용기술이 어우러진 ‘전쟁기계’였다.(217쪽)
▲ 승부처에 해당하는 전략전술의 디테일
641년 중반 이남 칸은 중국을 침공하기 위해 유목전사들에게 보전훈련을 시켰다. 병사들을 각각 5인 1조로 만들고 한 사람은 말을 잡고 진陣 뒤에 있게 하고 말에서 내린 네 사람은 걸어서 앞에 나가 싸우게 했다. 승리하면 말잡이에게 말을 받아서 적을 추격하게 했다. 훈련에도 엄격한 군율이 적용됐다. 훈련의 목적은 기병이 상황에 따라 말에서 내려 보전을 하다가 다시 기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능의 습득이었다. 승리가 확실해지고 적의 후퇴가 시작될 때 기마로 전환했다. 처음부터 기마를 자제한 것은 말을 지치지 않게 했고, 결정적으로 기마전을 할 때 말의 양호한 체력 상태를 담보했다. 설연타는 병사 1인당 네 필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네 필의 말도 전투가 장기화되면 일정한 간격으로 교체해야 했다.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네 필의 말을 제때 공급하려면 후방에 24필의 말이 있어야 한다. 안정적인 말 공급은 기병전에서 승리의 필요조건이었다.(246쪽)
- 험한 산악지대에서의 전투는 부대가 정연한 대열을 이뤄 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30~50명의 병사가 무리를 이뤄 산림이 우거진 골짜기 구석구석에서 싸웠다. 시야가 좋지 않아 활은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긴 창도 용이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단창과 곤봉을 이용한 패싸움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생각된다.(297)
▲ 긴박한 전세의 일목요연한 전개
무주 덕유산 방면의 가잠성이 백제 수중에 떨어졌고, 지리산 중턱의 아막성이 언제 함락될지 몰랐다. 백제는 신라의 심장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1개의 고지를 선점했고, 나머지 하나도 차지할 것 같았다. 진평왕은 신라 왕경에 훨씬 더 위협적인 가잠성을 빠른 시일 내에 탈환해야 했다. 아막성에서 지리산 중턱을 넘으면 다시 가야산을 넘어야 경주에 닿을 수 있다. 하지만 백제군이 덕유산을 넘어서면 말을 달려 성주에서 대구를 거쳐 왕경인 경주에 곧바로 타격을 가할 수 있다.(191쪽)
▲ 거침없는 공간 이동과 세력구도의 거시적 조망
- 629년 북방 돌궐의 내분이 극에 달했다. 당이 돌궐을 평정하고 초원과 중원에서 모든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돌궐과 당 양극체제에서 당이 세계를 지배하는 단극체제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고구려의 병력 대부분이 초원·중원에 인접한 서북방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는 신라가 북진하여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침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209쪽)
-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반란의 계절이었다. 한 해 전인 642년 백제에서 대규모 숙청이 있었고,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집권했다. 장안에서 태자의 반란이 발각되고 7개월 후인 643년 11월 왜국에서도 정변이 일어났다. 아버지를 감금하고 권력을 스스로 차지해 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소가노 이루카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유력한 태자 후보였던 야마시로노 오에山背大兄 왕을 습격해 끝내 자살하게 했다. 쇼토쿠 태자 집안의 멸문을 목격한 스이코 천황의 아들 나카노 오에와 그 신하 나카도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소아씨 일문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라에서도 대야성 함락 이후 미래의 쿠데타 주체들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339쪽)
- 이세적의 전면 부상은 7세기 중후반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644년 그는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는 데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655년 고종 대에 측천무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660년 당군의 백제 침공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땐 그가 당군을 지휘하고 있었다.(350쪽)
▲ 고대 국가들의 ‘첩보전’ 양상 집중 조명
- 방어하는 입장에 있던 고구려가 당나라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서돌궐과 토번 같은 강국의 움직임에 주목했다면, 침공하려던 당은 고구려의 지형지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원했다. 장안을 출발한 진대덕은 13년 전 영류왕이 당에 제출한 고구려 봉역도를 머리에 넣고 있었다. 진대덕은 고구려를 다니면서 많은 중국인을 만났다. 고급 정보는 아니지만 그들을 통해 고구려 일반에 관해 상당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고향) 집은 (중국) 어느 군郡에 있었는데 수 말년에 군대에 나왔다가 고구려에 들어와 잡혀 남게 됐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유녀遊女를 처로 삼게 했으며, 고구려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거의 절반이 될 것입니다.”(『자치통감』) 612년 고구려에 들어온 수나라 병사 30만 가운데 상당수가 포로로 남았다는 것을 이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622년 당과 고구려 사이에 포로 교환이 있었다. 고구려는 1만여 명을 송환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였다.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된 그들은 고구려에서 강제 노동으로 근 30년을 보냈고 사오십 대 중반이 됐다. 당시로서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었다.
▲ 당나라 이정의 전투 역량
말을 잃어버리면 가혹한 군율을 적용했다. 만일 전투 때 말잡이가 순서를 잃고 우왕좌왕해 말안장과 말을 놓치는 자는 목을 벴다.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말을 놓치지 않고 관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엄격한 군율 아래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가능하다. 또한 이정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이 후퇴할 때 하마기병은 도보로 몽골 초원의 말은 야생성이 강해 악조건에서도 잘 견딘다. 돌궐인과 설연타인들은 모두 이러한 말을 탔다. 30보 이상 따라가면 안 되고, 말을 타고 즉시 따라가는 것 역시 금한다. 다만 적의 후퇴가 확실히 감지되고 요란스럽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
하면 그들을 추격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도 여러 부대가 대열을 가지런히 해 전진하라. 전투 시 갑자기 하마한다고 하더라도 적이 패퇴한 이후에 말을 타고 추격하라.”(253~254쪽)
▲ 왜국이라는 변수의 재발견
왜국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돌아선 까닭은? 불교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기치 아래 배불파인 물부씨를 타도하고 집권한 소아씨는 외국으로부터 다양한 불교 문물을 가져와야 했다. 소아대신(소가노 우마코)이 집권한 이후 고구려와 왜의 외교관계는 급물살을 탄 것으로 보인다. 소아대신이 백제 일변도의 왜국의 외교관계를 다각화하려 했던 것은 고구려가 백제와는 또 다른 거대한 선진문물의 창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사신의 고구려 방문 시기는 왜국에 정변이 있었던 587년 7월 직후일 가능성이 높다. (292쪽)
▲ 고대사 기록의 검증과 수정
특정 국가 간의 전쟁이 되풀이되는 것은 국제 역학구조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644년 고구려가 당을 선제공격한 듯 보이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무리를 이끌고 영주도독부에 침입해 노략질하므로 장검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했다.”(『신당서』 「장검전張儉傳」)『책부원귀』 「장수부」에도 기록된 이와 같은 사실은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당을 선제공격했다는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신당서』에서는 644년 7월 장검의 고구려 침공 원인을 ‘신라가 자주 구원을 요청해서’라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양국간의 긴장감이 흐르던 644년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했다면 『자치통감』이나 『구당서』 『신당서』 제기에 그 기록이 보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셋째, 연개소문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644년 9월에 미인을 태종에게 바치기도 했다. 고구려 선제공격설은 그 노력들과 상충된다.(373~374쪽)
▲ 당나라 내부에서도 전쟁을 반대했다
644년 11월 낙양에 도착한 태종은 이전 수나라 때 고구려 전선에 종군한 경험이 있던 퇴역 장군 정원숙鄭元璹을 불렀다. 그는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동까지 길은 멀고 양식의 운반도 어렵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성을 잘 지켜 이를 급히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자치통감』) 그는 늙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고구려에서 수많은 부하를 잃은 사람의 충언 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날은 수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니오.” 12월 태종이 떠난 낙양에 남아 수도권 경비를 담당하던 우위대장군 이대량이 죽었다. 그는 죽기 전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군을 철회하라는 서신을 남겼다. 두 사람은 이 전쟁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의 고구려 침공 결정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티베트의 손챈감포와 파미르 고원 너머의 서돌궐 칸의 귀에도 들어갔다. 서돌궐이 644년 9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인 언기를 차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구려와의 전쟁 패배와 이어진 내란으로 수나라가 멸망한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것이 당나라에도 재현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 공성전, 농성전, 기병전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다. 성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농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적인 단계다. 고립된 성은 공성기의 공격으로 결국 함락되기 일쑤였다. 상황이 거기까지 가지 않기 위해서는 기병력이 받쳐줘야 한다. 공격받는 성 자체의 기병으로는 한계가 있다. 주변의 성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645년의 고구려 전쟁에서는 각 성 주변에서 기병전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당군은 그 싸움에서 우위를 확보한 이후 성을 포위하고 공성기를 사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포위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당군은 언제 등 뒤에서 고구려 기병의 습격을 받을지 몰랐고, 성 내부에서 문을 열고 나온 기병의 공격을 받을지도 몰랐다. 고구려 기병의 첫 승리는 당군이 요동성에서 육중한 공성기를 운반해오는 일에 차질을 주었을 것이 확실하다.(470쪽)
▲ 황제를 볼모로 한 고구려의 외교전
당군 총사령관 이세적은 태종이 요동성에 도착하기 이전에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한 그는 신성 공격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장검도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요동성 공략을 위해 병력을 돌렸다.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작전에 정치가 개입하면서 그 순수성은 떨어졌고, 병력 10만을 보유하고 있던 고구려의 거성巨城 신성과 건안성이 살아남았다. 이제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본체인 황제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태종과 장손무기가 내놓고 밝힐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7월 말에서 8월 초반 사이에 초원의 강자 설연타가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당서』 「집실사력전執失思力傳」에 그 침공을 막아낸 기록이 보인다. 설연타가 당나라 수도권 부근에 공격을 시작한 상황에서 당군은 고구려 심장부 깊숙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미 설연타의 침공에 대한 대비가 있었고, 집실사력이 그들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하더라도 심리적인 중압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고구려의 대설연타 공작은 성공했다.(514~5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