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적 평등을 향한 열망과 실패
이렇게 충분성과 평등은 세계 차원으로 격상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복지에 대한 고민도 어디까지나 국민 복지, 즉 국가 하나의 규모에서 멈췄지 세계적인 차원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분배의 세계적 평등에 대한 열의는 분명 남아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맹아가 싹텄던 서구‧북반구 국가들이 아니라 탈식민지 국가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이제 국민을 위해 충분성과 평등이라는 짐을 모두 짊어졌고, 특히 사회 정의와 관련하여 충분성이 아니라 평등을 우선시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탈식민지 국가들은 그들의 복지 체제를 수립하며 근대 복지국가의 국가주의적 제약을 지적했다. 그리고 복지를 전 지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을 비롯해 이런 흐름을 지지하는 목소리들도 생겨났다. 특히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국가가 승리하면서 국제주의적 전망이 패배했고, 결국 ‘인권은 보편성 개념을 수반한다’는 중요한 진실이 방치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탈식민지 개발도상국들이 신국제경제질서NIEO를 발족하여 이 흐름을 주도했다. 그들의 목표는 부국과 빈국의 세계적 평등화였다. 그러나 이들은 인권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를테면 니에레레는 부유층에게 유리한 전 지구적 구조로부터 ‘경제적 해방’을 이루려면 국내 인권의 실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위선적인 이중 잣대 때문이었을까? 이후의 국제 경제 질서로 성장한 신자유주의와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던 신국제경제질서는 결국 여러 이유에서 실패로 끝났다. 이제 그 빈자리에 신자유주의가 입성하게 된다.
사소하고 무력해진 인권, 신자유주의와 공존하다
인권 개념은 197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냉전 후반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맞물려 있었으며, 국제적 평등을 내세웠던 여러 탈식민지 국가에서 빈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과도 연관 있었다.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기본 욕구라는 패러다임이 등장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웠다. 경제학에서는 기본 욕구를 정의하고 이를 정책에 활용하기 위해 수량화했으며, 인권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세계인권선언은 국민 복지가 아니라 억압적 국가로부터 수호해내야 할 개인의 정치적 권리를 위한 것으로 재정의되었다. 이렇게 기본 욕구에 대한 고찰이 인권 혁명과 교차하며 충분성을 강조하는 운동과 정책들이 힘을 얻었다. 결국 평등은 폐기되고 충분성이라는 이상만 살아남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 혹은 사회주의 정책의 폭력성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인권을 도덕적으로 순수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동유럽이나 남아메리카에서는 국가가 생명권과 사상‧행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었고, 국제적 평등을 핑계 삼았던 독재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세계의 빈곤층을 지금 당장 돕기 위해 국제적인 불균형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특히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미국에서 기본 욕구 개념을 신국제경제질서에 대항할 전략으로 강조하여, 기본 욕구와 인권을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연결시켰다. 기본 욕구와 인권은 정책적 보호의 최저치를 정의하는 기준 역할을 했으며, 미국은 평등을 제쳐두고 충분성만을 약속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기본 욕구와 인권 개념은 결국 분배의 평등을 피하게 해준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세계에 본격적으로 안착하는 데 큰 힘으로 작용했다. 인권 운동이 형태를 갖춘 바로 그 시기에 민영화, 규제 완화, 국가의 사회적 지급 철회 등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급부상했다. 이는 우연이 아니었으며, 인권은 자기도 모르게 신자유주의의 공모자가 되었다. 폭력적인 사회주의 국가나 독재 국가에서 인권 운동은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수호했을 뿐 거시적인 구조를 지적하거나 경제‧사회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당연할 수 있지만 아쉬운 일이었다. ‘사회주의’라는 단어의 사용 감소와 ‘인권’이라는 단어 사용 증가가 같은 시기에 맞물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에서 알 수 있듯, 인권은 단지 기본적인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인권 운동이 대항했던 폭력이 무너진 자리에는 자연스레 신자유주의가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인권은 물질적 평등에 참여하지 못했고 새로운 정치경제의 위계를 방해하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이와 공존했다. 이렇게 평등을 도외시하는 충분성, 신자유주의의 동반자가 된 인권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 책은 인권이나 인권 운동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듯이 “신자유주의는 인권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잘못”이며, 인권이 부적절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나사못을 돌리는 데 쓸모가 없다고 망치를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점은 인권이 어떻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교묘한 기수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지고한 이상이 불평등이라는 커다란 악과 양립할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저자는 크로이소스 왕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크로이소스 왕은 모든 것을 가졌으며, 사람들이 굶주리길 원하지 않을 만큼 관대하고 자비롭고 일체의 폭력과 억압을 미워한다. 그는 모두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충분한 보호를 주장하기도 한다. 대신 모든 것을 그가 분배하며, 전체적인 불평등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세계는 정말로 이런 세계인가? 전 지구적 평등이라는 유토피아는 정말로 유토피아일 뿐인가? 충분한 것만으로도 정말 충분한가?
인권의 역사에 관해 새뮤얼 모인보다 더 날카로운 회의주의를 보여준 이는 없었다. 『충분하지 않다』에서 그는 인권 이론가와 옹호자들이 모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다 사실은 세상을 악화시킨 게 아닌지 묻는다. 이 책은 정치적, 경제적 과제들에 대한 더 넓은 토의를 확실하게 불러일으키는 귀중한 학술적 연구를 담고 있다._애덤 커시, 『월스트리트저널』
이 책은 인권의 현 상황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 『충분하지 않다』를 읽으면 비평과 윤리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뛸 것이다._마크 구데일, 『보스턴리뷰』
부가 분배되지 않는 우리의 시대에, 인권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새뮤얼 모인의 매혹적이고 시의적절한 이 책은 지난 200년간 여러 정치적, 철학적 운동이 인간성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좇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가 여기서 멈추고 말았는지 탐구한다._마티아스 리서, 『전 지구적 정의에 대하여』 저자
새뮤얼 모인은 비효율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서구식 인권 모델의 편협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 『충분하지 않다』는 탈식민지화의 정치적, 지적 소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일부이며, 팍스 아메리카나에 의해 창조된 자유주의 질서와 세계 거버넌스 제도를 날카롭게 추궁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꾸준히 보강되고 있는 이 책의 (자기)비판적 에너지는 필수불가결한 현대 전통으로서의 평등과 정의에 대한 지향을 회복하는 하나의 조건이다._판카지 미슈라, 『런던리뷰오브북스』
마그나카르타에서 세계인권선언으로 발전한 개선 행진 같은 인권 역사의 이야기를 새뮤얼 모인만큼 뒤흔든 사람은 없었다. (…) 이 책은 인권이 단순히 국가 권력의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힘으로 경제적 평등을 촉진하기 위해 활용된다면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재고해볼 것을 요청하고 있다._벤저민 네이선스, 『뉴욕리뷰오브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