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인의 시집 『쉬!』를 문학동네포에지 42번으로 다시 펴낸다. 『심상』으로 등단한 것이 만 40세였으니 “젊지 않은 나이에 노래를 익”힌 셈이나 “어느새 득음의 경지를 열어젖힌”(김명인) 시인, 그렇게 우리에게 “도대체 늙지 않는 노래”(이종암)를 선물한 그의 여섯번째 시집이다. 1985년 등단해 2021년 더 먼 여행을 떠나기까지 36년, ‘마치 시마(詩魔)에 들려 있는 듯’ 그 치열함 길었으나 그 떠남 앞에선 너무 짧았다 말하게 하는 그다. 표제작이라 할 시의 제목은 「쉬」이고 시집의 이름은 『쉬!』임에, 느낌표 하나 있음과 없음 사이에 삶을 담고 우주를 품어냈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_「쉬」 전문
“어이쿠, 시원하시것다아” 일상에서 툭 불거진 말, “쉬, 쉬이” “끄윽 끅” 입에 턱 붙는 말. 살아 있는 말이자 삶을 위한 말. 압축적 언어로 간명한 이미지를, 그리하여 삶에 바싹 붙은 순간들을 훌쩍 시로 올려내는 시들이다. 시인이 소리내어 부를 때 보름달은 북이 되어 둥둥 울리고(『달북』) “밤새도록 반짝반짝 어둠을 파내던 별들”은 목탁으로 흘러들어 “향 맑은 소리”가 된다(『새벽』). 삶을 사랑하여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이니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했던 그의 말에 끄덕이게도 된다.
시뻘건 욕창이 등가죽에다 꽃 박아놓은 것 같습니다. 커다란 소들이 비명도 없이 그 쓰라린 데를 끔벅끔벅 지나가고요,
소음과 매연으로 꽉 차 지옥같이 들끓는 거리를 참 느리게 통과하면서 큰 눈이 자꾸 더 깊어지는지요,
깊어져 진실로 아름다워지는지요, 먼 데를 보는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오래 흘러갑니다. _「모닥불 1」 부분
항시 낮은 곳으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아픔에도 꿋꿋한 이들 쪽으로 향하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낮음과 높음이, 허공과 바닥이, 삶과 죽음이 뒤섞인 ‘인도 소풍’에서, 시인의 눈이 곧 “인도 미인들의 검은 눈”이 되고(「짜이」), 남루한 움막집에서 빨래하는 이의 “저 검고 깊은 눈”이 되고(「빨래궁전」), 쇠똥덩어리를 말린 땔감으로 불을 피우는 이의 안타깝도록 깊은 눈이 된다. 앙상하게 야윈 손 위로 혼자 고생만 하는 아내의 모습이 겹쳐 “이리저리 고개 돌리며” 자꾸만 “찔끔”거리는 바로 그 눈이다(「말라붙은 손」). 그러나 또한 그렇게 낮은 곳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한사코 밝은 구석을 찾는” 눈,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기어이 웃음을 웃고야 마는” 눈(최재봉),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 민들레 같은 눈이다(「밝은 구석」).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간 데거나 길바닥 파인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꺼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밝은 구석이 있다. 끝끝내 붙박인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_「밝은 구석」 부분
시인은 집에서 길이 시작되고 또 집에서 끝난다 했다. 여행 또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니, ‘세상의 모든 길을 다 헤매봐야 그 세상 모든 길은 결국 집으로 간다’ 했다. 그렇게 일평생 노래를, 길 위에 시를 새긴 시인은 이제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시의 집이 다름 아닌 이 시집이겠다. 그 집에서 길은 또 시작되겠다.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_「바다책, 다시 채석강」 전문
■ 기획의 말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 시인의 말
‘재미’라는 말 안에 인생 전부,
전반을 욱여넣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해본다면
나는 아직 시 쓰려는 궁리,
쓰는 노력보다 더 그럴듯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이 한 욕심이 참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하는 줄 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시를 쓴다.
가끔,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끝장낼 수 없는 시여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
2006년 1월
문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