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표는 아나키스트와 국가주권주의자, 민주주의자와 엘리트주의자, 자유주의자와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와 세계주의자 등등이 서로 논쟁할 때 쟁점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 나는 우리 시대에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몇몇 문제들에 대해 단 하나의 타당한 답이 존재한다고 독자들이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지만, 나 자신이 어떤 답에 공감하는지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_36-37쪽
우리 시대 가장 격렬한 논쟁들
지금 한국에서는 장애인단체의 이동권 요구 시위로 정치권과 시민단체 내에서의 논쟁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서울 지하철의 수백만 승객이 특정 단체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라는 야당 대표의 SNS 글은 이 논쟁에 불을 지폈고 주요 언론들은 여러 인사들의 의견을 앞다퉈 게재하고 있다. 소수 집단이 자신들의 교통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다수의 시민에게 불편을 초래해도 되는가? 데이비드 밀러는 소수와 다수 간의 이견이 발생할 때 “그들은 단적으로 소수자다. 만약 모두가 오로지 자신의 분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할 뿐이라면, 소수자들은 질 수밖에 없다. 논쟁의 힘은 그들에게 유일한 무기이다. (…) 소수자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좀더 열정적인 방식으로 발언할 필요가 있고, 해당 집단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특정한 쟁점들에 대해서는 그 집단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 소수자 문제 일반과 관련하여 어떠한 경우든 호의적이지 않은 다수자로부터 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목적을 위해 민주 사회에서는 기꺼이 헌법에 일정한 기본권들을 명문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앞에서 우리가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를 정치철학의 오랜 물음들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그런 물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으로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로서는 이제 그런 견해가 정당화되었기를 바란다.” _193쪽
선출된 대표자는 과연 더 나은 결정을 하는가?
이 책은 모든 장에 걸쳐 수많은 질문과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첨예한 질문들에 플라톤과 홉스, 루소, 로크, 슘페터,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마르크스 등 정치철학 거장들의 주장을 거론한다. 매우 다양한 욕구와 능력, 선호를 지닌 수많은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질서를 유지해나가는 데 필수적인 사유의 조건들 때문이다. 2주에 한 번 공용부엌을 사용하는 자가 자주 사용하는 자와 동일하게 청소하는 것이 공정한가? 아니면 사용빈도에 따라 부담을 조정해야 하는가? 이것을 사회로 옮겼을 때 사회적 비용과 편익에 대한 공정한 분배는 어떻게 할 것이고, 공정함에 미치지 못해도 우리는 여전히 법에 복종할 것인가? 개인에 대한 인정과 정치적 의무는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만약 민주주의가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왜 민중에게 주요한 문제들을 민중이 직접 결정하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현실로 만들지 않는 것인가? 보통의 시민들을 대표하도록 선출된 사람들이 과연 시민들보다 더 잘 결정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정부의 개입으로 보호되어야 할 개인적 자유의 영역이 있는가? 소수자 집단이 공정하게 처우받기 위해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헌법상의 권리를 넘어설 수 있는가? 이렇듯 저자는 사회가 정치를 필요로 하는 이유와 정치의 한계, 정치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되는 삶의 영역에 이르기까지를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사유하고 모색하게 한다.
“인류의 미래가 우리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에야말로 그 미래에 관해 꾸준히, 그리고 철저하게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함께 결정할 필요가 있다.” _229쪽
“불편함은 인간의 자유라는 더 커다란 선(善)을 위해 사회가 감내할 만한 것이다.” _존 스튜어트 밀
이 책은 제7장까지 구성돼 있다. 각 장의 순서가 논리적 흐름이라기보다는 유기적이고 상호 보완적으로 연결돼 있다. 1장 ‘정치철학은 왜 필요한가’부터 2장 ‘정치권력’, 3장 ‘민주주의’와 4장 ‘자유와 정부의 한계’ 그리고 5장 ‘정의’, 6장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에 이어 7장 ‘국민, 국가, 그리고 전 지구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정치철학의 오랜 주제인 권력과 정의 사이의 선, 그리고 시장 경제에 어떻게 사회 정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모색한다. 사회적·정치적 제도와 개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이익의 분배 방식에 주목하고, 오랜 기간 지배적 관념으로 자리잡아온 사회 정의에 격렬하게 도전해온 페미니스트와 다문화주의자들의 주장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짚어본다. 그리고 소규모 정치 공동체에서 도시국가, 국민국가를 넘어 세계시민주의에 이르는 발전과 한계, 그리고 전 지구적 정의에 대한 의미와 실현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밀러의 입장이 현대의 정치철학적 논의의 한 면모에 대해 반성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_역자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