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근대질서는 어떻게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는가
근대 이전에 국가의 경계는 지역 인간 공동체의 삶과 지리적 조건을 중심으로 규정되었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경계가 나뉜다. 국경은 단순하게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민족의 경계이고 문명의 경계이자 이념, 종교, 인종의 경계이다. 19세기 초 문명등급의 경전적 기준이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질서는 전 세계의 공통인식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와 같은 사회를 ‘야만국가’에 위치시키고,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사회를 ‘반문명국가’ 혹은 ‘미개화한 몽매국가’로 정의하며, 유럽과 미국 기독교 사회를 ‘문명국가’로 자리매김시켰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인류의 삶의 방식을 여러 등급으로 서열화한 것은 서구의 지리적 확장과 패권적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출현하여 탈식민화가 이뤄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책의 번역자는 역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유럽적인 규범이 전지구적으로 통용되어야 하는지, 비유럽 지역은 왜 서구의 패권 확장을 그들 자신의 더 나은 발전 기회로서 수용해야 하는지, 다양한 지구상의 인간과 그들의 삶을 특정 기준에 따라 획분하고 그것에 차등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지, 즉 지구상의 세계질서는 영토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차원에서도 기하학적인 경계에 의해 구분되고 등급화되었는지.”
역사적으로 볼 때, 문명론은 오히려 유럽 계몽운동이 내세웠던 이성주의 담론과 함께 서구 세계가 잔혹한 식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무역을 강제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구성한 것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형태이다. _량잔, 「문명, 이성과 종족개량」에서
글로벌 히스토리 연구를 위한 다섯 가지의 방법론
이 책의 주편인 리디아 류 교수는 유럽이 창조한 질서가 지구의 구석구석으로 침투함에 따라 문명등급론이 출현한 이후의 사람들은 지구의 공간과 지구상의 인심을 두 축으로 두는 이중구조의 지정학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지정학의 이중구조와 그 역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식을 모색함으로써 복잡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혼란에 대처하고, 미래의 세계질서를 새롭게 구성하자고 말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방법론으로 다섯 가지의 설명을 덧붙인다.
첫째, 국가, 지역,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담론실천이 어떻게 현재의 세계질서를 창출했는가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자국의 역사를 배제하는 세계사 연구와 타국의 역사를 다루기 힘든 국가별 역사 연구자들의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한 ‘글로벌 히스토리’는 국가별 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지 않고 자국의 역사를 전 세계의 지정학 범위 안에 두어 상호추동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셋째, 추상적 사상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이 아니라 사상을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언설, 글쓰기 및 기타 실천(숫자도표, 국제조약, 도상, 시공의 조직방식 등을 포함)으로 간주하여 이러한 행위실천이 어떻게 사회에 진입하고 학과를 만들며, 인심을 움직이고 변화를 추동하거나 역사를 창조하는가 등을 연구한다. 또한 개별 학문의 한계를 넘어 융합적이고 다언어적인 탐구를 통해 각종 역사와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 연구자의 입장에서 학과의 정통을 지키려는 폐쇄적이고 수구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탐구를 위해 근대 학과를 개방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지닌다. 다섯째, 글로벌 히스토리의 시각을 갖추기 위해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언어로 된 1차 문헌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세계적 최신 학술 성과를 파악해야 한다.
전 세계로 눈을 돌리면, 문명론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중에 감화되어 더욱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고 있다. 중국에서도 그것은 내재적인 역사논리로서 여전히 발전주의를 추동하고 있다. 또 구미 국가에서도 그것은 누차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러한 문명론이 정치적 무의식의 방식으로 작동할 때 더욱 위험하다는 점을 인류가 모두 심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_리디아 류, 「서문」에서
현재의 세계질서를 작동시키고 있는 원리는 무엇인가
문명등급론이 글로벌 히스토리 연구의 중심 문제로 제기된 주된 원인은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학과—문과와 사회과학을 위주로 한 연구영역, 그리고 진화론적 생물학, 체질인류학, 우생학 등과 같은 여러 과학의 분과학문—와 같은 시기에 출현하여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문명론과 근대 학과는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식민체계의 전파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문명과 야만에 대한 근대시기의 구분은 국제법의 사상적 기초였으며, 이는 근대 세계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관건 가운데 하나이다. 리디아 류는 문명등급의 출현을 연구함으로써 국제법의 출현과 국제법이 어째서 처음부터 줄곧 세계 통치와 관련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학제 간 연구의 모범
이 책은 근대 문명등급론의 형성과 동아시아로의 전파과정을 비롯하여 지리학적 발견, 국제법 체계, 언어, 여성권리, 만국박람회, 식물학, 인류학 등 다양한 근대 학문과 지식에 문명등급론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중국의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확장기 유럽 근대성의 위선적 문명에 대한 풍경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근대 문명등급론의 의미는 단순히 개념적, 학술적 의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기에,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인류의 의식을 구성하고 변화시켰으며, 세계질서의 변화와 어떻게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살펴본 문명등급론은 중국의 근현대 문화와 사유의 형성과 변화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이자, 동시에 중국을 통해 본 문명등급과 세계질서의 관계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다양한 연구자의 개별적인 관심사에 의해 내용이 구성되었음에도,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연구 진행에서부터 결과물인 서적의 출판까지 수차례에 걸친 밀도 있는 토론과 검토, 수정을 거쳤다. 그럼으로써 열한 편의 연구는 각각 나름의 전문적 독창성을 지니게 되었고, 전체의 논리와 주제의 체계와 일관성은 학제 간 연구의 모범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