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대기』 『화씨 451』 등 오늘날까지 SF의 필독서로 통하는 명작을 비롯해, 칠십여 년의 작가 생활 동안 오백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한 레이 브래드버리. 1950년대 SF의 황금기에 활동한 그는 “현대 SF를 주류 문학의 장으로 끌어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라는 평과 함께 장르의 틀을 넘어 20세기 미국 문단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으며, 2012년 6월 5일 부고가 전해졌을 당시에는 스티븐 킹, 닐 게이먼, 스티븐 스필버그, 미하엘 고르바초프, 버락 오바마를 비롯한 소설가, 영화인, 정치인들의 진심어린 추도의 글이 잇따랐다. 문학동네에서는 1962년작 『사악한 것이 온다』를 출간 60주년, 타계 10주기를 맞아 국내 초역으로 선보인다.
“내 엄지가 뜨끔한 걸 보니, 무언가 사악한 것이 오는구나.”
유년기의 향수와 공포가 공존하는 매혹적인 다크 판타지
미국 중서부의 소도시 그린타운. 나란한 이웃집에 사는 동갑내기 소년 윌 핼러웨이와 짐 나이트셰이드는 태어날 때부터 형제처럼 함께해온 단짝 친구다. 핼러윈과 열네 살 생일을 앞둔 10월의 어느 밤, 기묘한 기적소리에 이끌려 마을 외곽의 초원으로 뛰어나간 둘은 폭풍우의 전조와 함께 마을에 흘러들어온 수상한 카니발단 ‘다크와 쿠거의 그림자 쇼’를 맞닥뜨린다. 돌아가는 방향에 따라 시간을 빨리, 또 거꾸로 감는 회전목마, 사람을 공포스러운 환영에 빠뜨리는 거울 미로, 그리고 온몸이 문신투성이인 정체불명의 카니발 단장 다크. 화려한 퍼레이드와 볼거리로 구경꾼들을 현혹하는 카니발에서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이면을 발견한 두 소년은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과 욕구에 이끌려 갈수록 깊이 발을 들이고, 마을 도서관에서 일하는 윌의 아버지 찰스 핼러웨이는 몇십 년을 주기로 마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카니발단의 비밀을 파헤치려 한다. 이윽고 찾아온 모험과 악몽이 가득한 하룻밤 사이, 두 소년은 훌쩍 자라 소년 시절에 영원한 안녕을 고하게 되는데……
우주의 먼지 속에 노스탤지어를 심고 떠난 서정시인
20세기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 문학의 또다른 정수
레이 브래드버리는 SF계의 ‘빅 스리’로 불리는 동시대 작가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는 또다른 방면에서 독보적인 세계관을 구축해온 작가다. 개척지로서의 우주와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무대로 과학기술 진보의 이면과 현대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인간성의 가치를 비추어내는 한편,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아스라한 정조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공포를 함께 담아낸 서정성 짙은 작품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사악한 것이 온다』는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워키건을 모델로 한 가상의 소도시 ‘그린타운’을 배경으로 삼은 장편소설로, 마찬가지로 유년기의 경험을 모티프로 한 『민들레 와인』(1957년), 후속작 『여름이여 안녕』(2006년)과 함께 ‘그린타운 3부작’으로 불린다. 목가적인 여름날 풍경을 그린 전작과 달리 핼러윈을 앞둔 늦가을의 들뜨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에서, 브래드버리는 앞날에 대한 동경과 순수를 간직한 두 소년의 기묘한 모험담에 ‘아메리칸 고딕’ 특유의 전통적인 호러 요소와 초자연적 설정을 더해 개성적인 색채의 성장소설을 완성했다.
시적 문장으로 담아낸 선악의 알레고리
세대와 시간을 초월한 생명력을 지닌 걸작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 등장하는 마녀의 예언에서 따온 제목처럼, 소설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나타난 불길한 전조로 시작해 선과 악, 젊음과 늙음, 여름과 가을이 대비되는 구조로 이어진다. 마을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꿰뚫어보고 유혹하는 어둠의 카니발 무리는 명백히 악의 상징이며, 불안한 사춘기의 경계에 서 있는 윌과 짐,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에 회의를 느끼고 남몰래 젊음을 갈망하는 쉰네 살의 찰스 핼러웨이는 그 대척점에 있다. 그리고 끝내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믿음과 환희의 힘을 통해 이뤄지는 이들의 승리는 어른이 되기 위한 소년들의 눈부신 통과의례이자, 노화와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뒤집는 해답이 된다.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겸 감독 진 켈리의 제안으로 처음부터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구상된 이 작품은 1983년 디즈니에서 잭 클레이튼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2003년에는 연극으로, 2007년에는 라디오드라마로 각색되며 몇십 년째 꾸준한 생명력을 입증했다. 또한 작중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유랑극단과 기인 쇼의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이미지는 후대 작가에게 다양한 영감을 제공했는데, 소설가 스티븐 킹은 ‘사악하고 초자연적인 힘에 맞서는 선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그것』 『욕망을 파는 집』 등의 대표작에 담아내며 이 작품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했다. 수수께끼의 회전목마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장르의 고전을 탐독하고 싶은 사람은 물론, SF의 세계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로도 적격이다.
● 추천글
『사악한 것이 온다』와 『화씨 451』 같은 이야기는 브래드버리만이 쓸 수 있다.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다. 종종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절대로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닐 게이먼(소설가)
음악 같기도 하고 최면 같기도 한 브래드버리의 문장은 읽는 이의 감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끌어들인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현실 세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사이언스 픽션 위클리
그의 스토리텔링 재능은 우리 문화를 재편성하고 세계를 확장했다. 버락 오바마(전 미국 대통령)
브래드버리는 나의 거의 모든 SF 작품의 뮤즈였다. SF와 판타지, 상상의 세계에서 그는 불멸의 존재다. 스티븐 스필버그(영화감독)
오늘 나는 희미해져가는 거인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강한 여운과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스티븐 킹(소설가)
● 본문에서
바깥세상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이 특별한 밤, 종이와 가죽을 벽돌처럼 쌓아올린 이 땅에서는 언제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 도서관은 머나먼 나라에서 온 향신료의 정제 공장이자, 외국의 사막이 편히 잠든 곳이었다. (25쪽)
보통 카니발 천막을 치는 장소라면 벌목 현장처럼 시끌벅적하고, 짐을 내리고 굴리고 부딪히는 소리에, 사자의 포효 같은 먼지가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 그런데 이 카니발은 꼭 오래된 영화 같았다. 고요한 극장 안에 희고 검은 옷차림의 유령이 출몰하고, 은백색 입을 열어도 달빛만 뿜어져나올 뿐 그 어떤 동작도 소리를 내지 않아, 관객들은 바람이 뺨의 솜털을 스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무성영화. (67쪽)
과거로 거슬러가는 기분 나쁜 꿈처럼 회전목마는 계속 역회전했다. 뒤로 질주하는 짐승을 음악이 헐떡이며 쫓아가고, 쿠거는 빛과 그림자처럼 명백하게 시시각각 젊어져갔다. 젊어지고 어려지기만 했다. (96쪽)
작고 귀여운 소년의 얼굴이 핼러윈 가면처럼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가면의 눈구멍 안에는 쿠거의 눈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렷하게 빛나는 푸른 별 같은, 여기 다다르기까지 백만 년은 걸릴 만큼 오래된 별빛 같은 눈이었다. 매끈한 밀랍 가면에 뚫린 작은 콧구멍에서 쿠거 씨의 숨결이 얼음처럼 차갑게 뿜어져나왔다. 가지런한 치아 뒤에서는 밸런타인데이 사탕 같은 혀가 꿈틀거렸다. (104쪽)
“가을종족은 인간 사이를 누비며 영혼을 채집한다. 이성의 육신을 먹어치우고, 죄인으로 무덤을 채운다. 그들은 늘 광포하게 전진한다. 돌풍 속을 딱정벌레처럼 가로지르고, 살금살금 기어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필요한 것을 찾아내 걸러내며 서서히 이동한다. 달을 흐릿하게 물들이고 맑은 강물을 탁하게 한다. 거미줄도 그들이 오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떨다가 끊어진다. 이게 바로 가을종족이다. 그러니 그들을 조심하라.” (229쪽)
어떻게 설명해야 이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공통된 체험에서 나오는 공감이라고 하면 될까? 아니면 생명의 시멘트라고 할까? 거대한 우주에서 무언가를 향해, 혹은 무언가로부터 멀어지고자 끝없이 유영하는 태양, 그 주위를 맴도는 땅덩어리 위에서 오늘밤 이렇게 셋이 모여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설명하면 될까? 우리는 시속 1,600미터의 비행물체에 함께 올라타 있다. 우리는 밤에 저항하는 공통된 감정을 갖고 있다. 너희의 관계도 그 작은 공통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234쪽)
“그들은 울음을 사랑하고 눈물이라면 환장을 해! 네가 울면 울수록 놈들은 네 턱의 소금기를 핥으며 기뻐할 테고, 훌쩍이면 고양이처럼 네 숨결을 빨아들일 거야. (……) 밤의 종족이 견디지 못하는 건 웃음이야. 웃음은 태양을 품고 있어. 그리고 그들은 태양을 싫어하지.” (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