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
최초의 말, 시원으로 떠난 순례의 기록
“수도원에서 거리로 나온 실재계의 시인”(원구식)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문학동네포에지 48번으로 다시 펴낸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2005년까지 7년에 걸쳐 묶어내었던 시편들이 17년 만에 마땅한 자리에 돌아왔다. “연금술사의 고뇌”(김유중)이자 “순례자의 언어”(오형엽)로 옮기는 이 보고서는 곧 “잃어버린 시원(始原)의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시원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시인의 내적 고백”(송승환)이다.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
따뜻한 물 흐르는 동굴에서
서둘러 어둠을 껴입었지
찰박찰박, 어둠 사이로 붉은 등을 내비치는 탯줄
그 고요의 심지에 불을 댕기고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지
나는 말을 부르는 소리부터 배웠지
탯줄이 사위를 밝히고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나는 편자를 갈고 있었지 _「사수자리」 부분
이재훈 시인이 돌아가려는, 혹은 회복하려는 시원(始原)은 최초(始)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말’들이 사는 들판(原)이다. 어둠 속에서 “말을 부르는 소리부터 배웠”다는 ‘나’를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말발굽 소리”는 말이 끄는 수레 소리, 풀무질 소리, 쇠망치 소리 그리고 다시 말발굽 소리로 변주되며 시집 전반에 끊임없이 흐른다. 그 무수한 소리 속에서 꽃이 피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다(「수레바퀴 지나간 길」). 만돌린과 나팔, 노랫소리로 가득한 이 들판이란 풍경도 면회 오는 이도, 그저 아무도 없는 빌딩 숲(「빌딩나무 숲」), 곧 도시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때로는 도저한 절망, 때로는 간절한 울음으로 이 환멸을 벗어나려는 시인의 시선은 야생과 원시, 신화의 세계로 향한다.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질 때, 태초의 벽화 앞에 선 시인은 마침내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을 깨워 스스로 추장이, 기꺼이 기수가 되어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말이 쏟아져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드득후드득 내달린다 _「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최초의 말(馬)이자 최초의 말(言)을 찾아나선 시인의 순례기이면서, 더없이 귀한 언어의 사료(史料)다. 시인은 신화가 바로 최초의 시, ‘최초의 말’이라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일이 곧 새로운 신화의 창조이기도 할 것이다. 첫 시집에서 이미 처음의 처음, 그 태곳적 기원을 성실히 답사해 한 편의 ‘보고서’로 엮어내었던 시인은 여전히 시라는 안장 위에 있다. 그 촘촘한 기록을 다시 펴냄에, 시원(始原)이자 시원(詩原)으로의 여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_「순례」 부분
■ 기획의 말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