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직분과 평범한 일상 사이
법을 직업으로 삼은 이가 들려주는 진솔한 ‘사는 법’ 이야기
대부분 법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상상할 때, 엄격해 보이는 법복과 법모, 법봉으로 대표되는 무겁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숨막히는 법정에서 법봉을 세 번 내리쳐 판결을 내리는, 때론 솔로몬처럼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판사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법모와 법봉은 권위주의의 청산을 위해 1966년 이후 쓰이지 않고 있다. 법원에 견학 오는 학생들에게 ‘더이상 법봉에 대해 질문하지 않도록 해달라’ 부탁하는 판사들의 책상에는, 법봉 대신 무지막지한 서류 더미와 이를 손쉽게 넘기기 위한 사무용 골무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재판 기일에는 법정을 들락거리느라 한없이 바쁘지만, 재판 없는 날에는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재판기록을 읽거나 자료를 점검하고 판결문을 쓰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현실에서 일하는 판사의 모습은, 어찌 보면 직장을 다니며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서울고등법원에서 근무하던 송민경 전 부장판사가 퇴임을 하며 펴낸 에세이 『법관의 일』은, 무거운 직분과 평범한 일상 사이를 오가는, ‘직업인으로서의 법관’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매일 아침 정각 6시에 일어나 잠든 아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부엌으로 나가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고 팔굽혀펴기를 서른 개쯤 한 뒤 키친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판사라기보다는 어쩐지 소설가와 비슷해 보인다. 달리기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좋아한다는 이야기에선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송민경은 늘 책을 가까이한다. 평소에 그를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신형철에 의하면, ‘동시대 한국문학을 줄줄 꿰고’ 있을 정도다. 그의 문학편력은 한국문학에만 그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에 등장하는 엘리너에게서 이상적인 법관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김금희의 소설 『복자에게』에 등장하는 이영초롱 판사의 모습을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플로베르의 소설을 읽으며 판사도 소설가처럼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사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판결을 책임을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라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기도 하고, 철학자 들뢰즈가 바라는 두번째 직업이 법률가였다는 사실을 통해 법적 사고 과정에 상존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송민경에 의하면 ‘법관의 일’이란,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을 법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마주하는 가운데, 무수한 주장과 증거의 이면에 놓인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법관은 “무언가를 알아내야 함과 동시에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무언가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법을 이해하는 일이,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단순히 독자들에게 법관이 하는 일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판사의 관점, 즉 법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에 잠시나마 동참해보도록 권한다.
“법관은 오로지 법을 북극성 삼아 숱한 회의와 의심을 이겨내며
끝끝내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한다.”
‘법관’은 헌법과 법원조직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임명되어 사법부를 구성하고 대법원과 각급 법원에서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지칭한다. 대개 판사를 법관이라 칭하곤 하지만, 넓은 범위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도 법관에 포함된다. 어찌 보면 법관이라는 직업이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일반적인 시민들에게 있어 ‘법원’이라는 장소가 ‘평생 가지 않아야 좋은 곳’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법을 통해서 다뤄져야만 하는 무수한 사건들이 있으니, 이 무거운 직분을 누군가는 떠안은 채 맡은 책무를 다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판사는 우리 삶에 어느 날 생겨나는 사고와 불행, 불화와 갈등을 법의 그물망 위로 건져올려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올바르게 처리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판사가 소위 ‘원님 재판’을 하는 사또 나리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송민경에 의하면 판사는 오히려 법적 사고하에 “많이 관찰하고 적게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주 많이 똑똑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직업이 판사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판사는 성실한 수험생처럼 살짝 주눅 든 긴장한 태도로 “당사자가 출제한” 복잡하게 얽힌 법적 난제를 가급적 신속하고 정확하게 풀어내야 한다. 이 작업은 모든 문제 풀이가 그러하듯이, 해답이라 불릴 수 있는 객관적인 무언가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그래서 판사는 늘 ‘어쩌면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초조한 긴장감을 갖고 일할 수밖에 없다. 법관으로서 밝혀내야 할 사건의 진실과 법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믿음이 없다면 어쩌면 이 과정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사실 판사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나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날 수밖에 없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현실을 매번 마주하다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는 악을 비판하기 이전에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악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악은 비판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결국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법은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시간을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법은 뒤늦게나마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래서 법관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비아냥거림에도, 오로지 법을 북극성 삼아 끝끝내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사람들이 공동의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대체로 갈등과 분쟁의 양상을 띤다. 수많은 이가 각자의 필요와 욕구, 계획과 전망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흔한 경제학 상식이 일러주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 반면 이를 충족하기 위한 자원과 기회는 희소하거나 제한되어 있으니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한정된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키워나가고 또 나누는 것이 공정하고 효율적일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송민경은 우리 사회에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 현안 문제들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함께 해결해나가고자 한다.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미투운동’과 그에 따라 공론화된 성인지감수성에 관한 이야기, 무수한 배달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플랫폼노동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공유경제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생겨난 ‘타다’의 소송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가 법관으로서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토록 넓은 범위의 주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사회에 대한 그의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이다.
현재 그는 법무법인(유한) ‘율촌’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오랜 법관 생활을 정리하고, 좋아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으며 살고 싶어하던 그의 뜻대로 새로운 인생의 길에 접어든 셈이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법률을 연구하는 법률가로서의 인생이 모두 이 책 안에 겹쳐 있다.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세상의 진실과 관계하는 최선의 형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를 통해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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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일이란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을 ‘법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마주하는 가운데, 무수한 주장과 증거의 이면에 놓인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법관은 무언가를 알아내야 함과 동시에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무언가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하는 사람이다.(13~14쪽)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한 기담 같은 사건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회의하게 만드는 악행, 어처구니없는 우연과 한순간의 부주의가 빚어낸 참담한 불행을 매일같이 접하다보면, 그 모든 백팔번뇌에서 벗어나 조용히 쉴 수 있는 달팽이집 같은 공간이 절실해진다. 그렇게 나는 재판을 마치고 나면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움츠러든 달팽이가 되어 달팽이집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것이다.(28쪽)
법관이 우선 체득해야 할 직업윤리는 ‘자기절제’의 윤리, 즉 법의 관점보다 자기 관점을 앞세우지 않으려는 겸손함이다. 법관이 판단을 ‘조금만’ 내리는 것은 법치주의에서 파생한 직업윤리에 바탕을 둔다. 시인 정현종의 시구처럼, ‘권력은 그 행사를 삼갈 때 힘차고, 그 삼가는 게 저절로 그렇게 될 때,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권력의 자기절제는 윤리적인 일인 동시에 아름답기까지 한 일인 것이다.(40쪽)
법관이 적당히 똑똑해도 되는 이유는 ‘적게’ 판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법’의 상자 안에 갇힌 채 그 안에서 내다보이는 시각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 법관에게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점은 오히려 핸디캡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굉장히 똑똑한 나머지 법의 모순과 불합리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법을 따르기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독자적 해결책을 제시하고픈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까.(112쪽)
스마트한 터치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놀라운 마법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많은 이들의 수고가 숨어 있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 물품을 배송한 후에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란다’는 아침인사까지 곁들여 배송사진을 전송하는 마켓컬리 배송기사들의 노고가, 수줍은 우렁각시마냥 주문한 음식을 문가에 슬며시 놔둔 채 초인종을 누르고 떠나는 배민라이더스 라이더 같은 분의 노동이. 다시 말해, 당신과 나의 우아한 랜선 생활은 플랫폼 노동자 덕분에 가능하다는 말이다.(162쪽)
나는 악을 비판하기 이전에 악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악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악은 비판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인간의 악은 이렇다. 악은 양심을 배신하는 의지가 아니라 뒤틀리다 못해 배반당한 양심 그 자체다. 그렇게 타락한 양심으로부터 초래되는 행위는 악의 부수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왜곡된 자기 관점 안에 갇혀 있기에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대개 깨닫지 못한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때문에 악인을 벌하는 일보다 이해시키는 일이 우선이다.(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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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메일을 주고받다가 처음 그를 만난 날 나는 ‘송민경’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여서, 나와 동갑인 남자가 그토록 맑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세상 바쁜 판사가 동시대 한국문학을 줄줄 꿰고 있어서 많이 놀랐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가 보내온 원고를 읽고 다시 결정적으로 놀란다. 이 밀도 높은 책에는 법학의 본질에 대한 간(間)-학문적 고찰이 있고, 법을 다루는 직업인의 섬세한 자기성찰이 있으며, 그 성찰의 힘으로 사회적 이슈에 개입해 들어가는 시의적절한 지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관의 일’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다. 이 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관되게 들려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세상의 진실과 관계하는 최선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간곡히 묻는 목소리라서, 이 책이 들려주는 모든 법 이야기들이 결국 ‘사는 법’에 대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에게만 떠맡길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일 아닌가. 지금도 깍듯이 서로 존대하고 있지만 역시 그와 막역해지기는 쉽지 않겠다. 이 책을 읽고 생겨난 깊은 경애의 마음을 억누르지 않는 한 말이다.”_신형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