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너 파전은 짧은 에세이(각주 1)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 집에 있던 방은 모두 책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책 없이 사는 것보다 옷 없이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을 밥을 먹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중에서 ‘작은 책방’이라 불리던 방은, “다른 방의 번듯한 책꽂이에서 쫓겨난 온갖 책들이 길 잃은 아이나 떠돌이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책도 많았지만 소중한 책이 더 많았다.” 엘리너 파전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던 그 작은 책방이야말로 “나에게 마법의 창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그 창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다른 세계, 다른 시대를 보았다. 그것은 시와 산문, 사실과 환상의 세계였다”라고 회상합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읽어야 한다/배워야 한다라는 권고 때문에 읽는다기보다, 현실보다 상상의 세계가 훨씬 매력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는 열쇠를 찾아낸 아이들의 기쁨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다정한 글이지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엘리너 파전이 묘사한 이런 순간들에 대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책을 친구로 삼을 수 있었던, 이야기의 힘에 기꺼이 사로잡혔던 순간이요.
이번 호의 특집의 주제는 ‘책벌레’로 잡아보았습니다. 무용한 책더미에서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으로 풀풀 날리는 먼지 때문에 더러워지는 걸 감수하며 새로운 세계로 덤벼들던 순간을 기억하는, 그리고 지금도 그걸 계속하고 있는 책벌레들이 주인공입니다. 독자와 사서와 연구자와 서점 직원(과 도둑)까지, 책이 구성하는 세계에서 작가만큼이나 중요한 축들이 집중 조명됩니다. 결과적으로 책에 대한 책, 독서 행위와 독자에 대한 책, 책을 둘러싼 욕망와 범죄와 파멸이 뒤엉키는 책들을 한군데 모았습니다.(물론 어디까지나 ‘범죄소설/논픽션’의 범주 내에서 신중하게 책들을 골라보았습니다.)
설령 작가들이 모종의 이유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하고 숨어버리더라도, 이 책벌레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발굴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아래 인용한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처럼, 원고는 결코 불타지 않습니다. 책은,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파괴의 운명에서 책들을 건져올리고 안전하게 숨기고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열성적으로 읽으며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작가가 아예 생각도 못한 관계성을 끄집어내고 재해석하고, 작품이 쓰였던 과거와 작품을 읽는 현재 사이의 간극에서 새로운 컨텍스트를 발견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원고는 거듭 돌아올 겁니다.
“무엇에 대해서라고, 무엇에 대해서라고? 누구에 대해서라고?”
볼란드는 웃기를 그치고 말했다. “지금 같은 때에? 이건 놀라운 일인걸! 그래 당신은 다른 테마를 발견할 수 없었던가요? 좀 보여주시지 않겠어요?” 볼란드는 손바닥을 위로 하여 한 손을 내밀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거장이 대답했다. “그것을 난로에 태워버렸어요.”
“미안합니다만 믿지 못하겠군요.” 볼란드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원고는 타지 않았습니다.”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박형규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중.
(각주 1) 『작은 책방』(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펴냄) 중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