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현실에 풍요로운 몽상을 중첩하며 세상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순수를 추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여온 박판식 시인의 구 년 만의 신작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를 문학동네시인선 170번으로 출간한다. 시인은 생활 세계의 한복판에서 얽히고설키며 고통받는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남루한 현실을 자조하는 대신 단단하게 살아내고자 하는 시의 힘을 보여준다.
나의 영혼은 고깃집의 갈고리에 매달려 있다, 파리들이 달라붙는다
자 이제 다시 계속해볼까요
어디든 마음을 다해 가라, 이 문장을 똑같이 따라 해보세요
누구든 내 마음에 들어오세요
지상에서의 행복이 소나기 같다는 걸 그 누가 모르겠는가
_「내가 누구예요?」에서
첫번째 시집 『밤의 피치카토』에서 서정적인 백일몽과 중세풍의 이교도적인 상징물을 이미지화하며 현실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환상의 미학을 보여준 시인은 두번째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에서 깨진 거울처럼 흩어진 현실의 조각들을 시의 언어로 이어붙이며 세계의 것이자 자신의 것이기도 한 흉터를 대면했다. 이번 시집에서 시적 화자는 아버지이자 남편, 그리고 혈연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생활의 한복판으로 밀려온다. 시인은 가족과 이웃 등 세속의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구체적 에피소드와 생생한 실감으로 시에 담아내면서 살아가는 내내 무수한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곧 삶임을 다시 한번 자각한다.
아내와 나는 같은 세숫대야에 얼굴을 씻지 않는다
아들과 딸 하나씩을 발명하고 우리는 기진맥진이다
작은 호랑이처럼 헐떡이는 아이들
김이 다 달아난 밥 한 공기를 놓고
위층에 새로 세든 불행한 엄마와 그녀의 엄마가 차례로
벽에다 그릇 던지는 소리를 듣는다
내일은 넋이 빠져나간 외할머니를 보러
시외버스를 탈 것이다
죽음은 어떤 장소도 시간도 아니다, 죽음은 오히려 반듯한 질서
구포국민학교 2학년 오후반 이후 나는 늘 지각중이다
_「때가 되었다」에서
이렇듯 풀리지 않는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삶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짐짓 태연하게 느껴진다. 그가 삶을 섣불리 자조하거나 성찰하려 들지 않고 직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박상수에 따르면 화자는 “어떤 커다란 깨달음이나 서정적 도약도 덧붙이지 않고, 또한 선악의 판단도 가하지 않으”며, 어설프게 감상적인 문장을 꾸며내지 않고 “차라리 삶 안에서 뒹굴며 자기의 육체로 모든 것을 살아”낸다. 고통을 토로하기보다 그 자체를 여실히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외면하기보다 빠짐없이 목격하고 시로써 드러내기를 택한 것이다.
흰색 보드판 앞에서 젊은 고물상 주인이
늙은 여자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일 때도
그들의 배후에서 천장 없는 가건물로 폐품들이
더 올라갈 수 없는 높이로 올려지고 있을 때도
나는 생각하게 된다
(...)
인생은 얼마나 더 큰 커브를 돌다 쓰러져야만 끝나는 게임일까
_「크로노미터」에서
박판식의 시에서 일상의 희노애락애오욕은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지 않고 다시금 일상에 머문다. 비록 생활은 여전히 진창이고 번뇌와 망상으로 가득차 있는 “슬픈 기념비”(「개미에 관하여」), 혹은 “질 것 같은 전쟁”(「곧」)이지만 박판식의 화자는 이 세계를 버리지 않고 남아 있으려 한다. 이 결정은 거창한 이념 때문이 아니라, 영혼은 슬픔에 침투당해 파리 날리는 고깃덩어리로 매달릴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순간순간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못된 남편이고 호통치는 아빠였습니다
오늘만은 나도 어린아이가 되어
머릿속을 몽롱하게 떠다니는 아내의 고민과 걱정을 씻어주고 싶습니다
저기, 프라이드치킨과 청량음료를 기다리며
새끼 곰들처럼 비쩍 마른 굴참나무 가지에 식구들이 하나씩 매달려 있네요
_「마르고 닳도록」에서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에는 이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운 세속에서 인간의 고통과 번뇌를 탐구함과 동시에 사랑의 목소리를 내기를 멈추지 않는 박판식의 시적 자세가 담겼다. 시인은 소시민들의 고된 현실을 관찰하는 목격자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생동하는 삶의 의지를 써내는 기록자이자,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에 끝끝내 무뎌지지 못하리라는 예감에도 지금을 살아내고자 하는 삶의 여행자이다. 그는 담담히,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말하는 듯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삶과 뒤엉켜 사랑하는 것이 또한 시인의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