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하고 섬세한 언어로 삶을 관통하는 스토리텔러, 앤 패칫의 신작 장편소설 『더치 하우스』가 출간되었다. 2001년 발표한 소설 『벨칸토』가 1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펜/포크너 상과 오렌지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앤 패칫은 이후 발표한 『경이의 땅』『커먼웰스』로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고루 받으며 그 입지를 단단히 세웠다. 2019년 발표한 『더치 하우스』는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워싱턴 포스트> <오프라 매거진> <보그> <타임>, NPR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소설 『더치 하우스』는 필라델피아 엘킨스파크의 화려한 저택 더치 하우스를 배경으로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삼대에 걸쳐 일어난 일을 다루는 특별한 스케일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다”라는 평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주인공인 대니와 메이브의 삶이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오가며 서스펜스 넘치게 펼쳐진다. 특유의 미니멀하고 익살맞은 문장은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삶의 면면들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이내 “삶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부모를 잃고 살던 집에서 쫓겨난 뒤 과거의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던 이들은 흐르는 세월 속에 회복과 용서, 그리고 또다른 상실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이내 과거를 비추는 현재의 빛은 더욱 또렷해진다. 『더치 하우스』는 기억과 해석의 주관성, 가족이란 관계의 불가해함, 강박과 치유와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능숙하게 풀어내며 읽는 이의 마음속에 묵묵하지만 굳건한 울림을 남긴다.
비애가 마지막 숨을 내뱉고 소멸할 때,
비로소 또렷이 과거를 비추는 현재의 빛
두 남매인 대니와 메이브는 엘킨스파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집, 더치 하우스에 살았다. 더치 하우스는 “적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언덕 위로 몇 인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름답고도 괴상한 외관을 가진 집이다. 담배 도매상으로 떼돈을 번 반후베이크 부부에 의해 1922년 완공되었고, 경제 대공황과 2차대전을 거친 뒤 남매의 아버지인 시릴에게 팔렸다.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했던 남매의 어머니 엘나는 더치 하우스의 호화로움에 숨이 막혀 남매가 어릴 때 가족을 떠난다. 메이브는 충격에 앓다가 당뇨병에 걸려 평생 고생하게 된다. 이후 무뚝뚝한 방식으로나마 남매를 위하던 시릴이 갑작스럽게 생을 다하자, 새어머니인 앤드리아는 남매를 더치 하우스에서 내보내고 유산의 대부분을 가로챈다. 메이브는 아버지가 그들을 위해 남겨둔 교육 신탁금을 활용해 앤드리아와 그녀의 두 딸 노마와 브라이트를 향한 작은 복수를 계획한다.
대니와 메이브는 집에서 쫓겨난 뒤에도 종종 더치 하우스 앞 길에 차를 대고 대화를 나눈다. 일견 이상해 보이는 이 행동은 놀랍게도 몇십 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두 남매가 집에 대해 보이는 강박은, 이들의 관계가 그렇듯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설은 바로 이러한 시점과 해석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현재를 과거에 투사하지. 우리는 과거를 지금 알고 있는 것의 렌즈를 통해 돌아봐. 그러니 우리는 과거를 과거의 우리로서 보지 못하고 현재의 우리로서 볼 뿐이야. 그건 과거가 급격히 다른 모습이 된다는 걸 의미하고.” 참혹했던 상실의 기억도, 현재의 ‘렌즈’, 즉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어떤 기억이나 해석도 완벽하게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가 아는 것만큼만 볼 수 있다. 거기에 우리를 쉽게 잠식하는 비애와 분노마저 걷어내지 못한다면 과거를 투영하는 렌즈는 영영 흐리고 부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매의 행위는 과거를 또렷이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느린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온전한 극복을 위한 필연적인 시간이었을지도.
세상을 보는 방식의 유동성에 주목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남매의 어머니 엘나와 새어머니 앤드리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엘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돕겠다는 선한 일념 때문에 어린 자녀들을 떠났다. 그녀의 선택은 세상을 조금 나은 방향으로 바꿨을지는 모르지만 딸인 메이브를 병들게 하고 아들인 대니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앤드리아는 자신의 남편이 죽었을 때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지만 결국 아이들을 집에서 내쫓으며 남편의 유산을 손에 넣었다. 두 여성의 선택은 어떤 면에서도 완벽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한편으론 너무나 어리석게 보인다. 하지만 인간적인 선택이란 결국 모두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치 하우스』는 가족과 삶의 잔혹하고도 다정한 속성을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상실의 기억을 공유한 두 남매의 특별한 유대
투명하고 강력한 더치 하우스의 힘
메이브는 아버지가 앤드리아의 두 딸을 포함한 자녀 모두를 위해 남긴 교육 신탁금을 최대한 많이 써 없애려 계획하고, 그 복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대니는 교육비가 가장 비싼 기숙학교와 메디컬스쿨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또 불행하게 하는지 알게 될 때쯤 서서히 과거에서 멀어져 꿈을 좇으려 하지만 누나 메이브 또한 과거의 일부이기에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기차에서 만난 설레스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할까봐 섣불리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그러다 화학을 가르치는 에이블 박사로부터 좋은 정보를 입수하고,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자 대니의 오랜 꿈이기도 했던 부동산 일에 처음으로 뛰어들게 된다. 대니는 “제비처럼, 연어처럼, 철새가 이동하듯 경로를 따르는 무력한 포로”로서 보냈던 무수한 세월을 뒤로한 채, 비로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인다. 그렇게 삶이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 같던 때, 위기는 갑자기 찾아오고 원하지 않았던 재회가 이어진다.
남매의 삶은 처음 더치 하우스를 지었던 반후베이크 부부와 가족들을 위해 더치 하우스를 통째로 구매했던 시릴 콘로이의 삶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더치 하우스의 곁에서 이들은 사랑을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꿈을 꾸고 또 좌절하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너무나 허무하게 다시 마주치기도 한다. 극복한 줄 알았던 상처에 아파하고 새로운 위기가 순식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더치 하우스』가 일깨워주는 것은 “와르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우리를 지탱하는 존재가 있으리란 사실이다. 그 존재로 인해 우리가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거란 사실. 과거의 기억이든, 지붕이든, 사랑과 애증이든 그 존재와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무언가로 무장한 채 삶은 계속될 거라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투명하고 강력한 더치 하우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중요한 발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