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유의 가장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저서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1897~1962)는 프랑스 현대 사상의 원천이 된 독보적인 작가/사상가이다. 그는 철학, 문학, 사회학, 인류학, 종교, 예술을 넘나든 위반과 전복의 사상가이면서 ‘20세기의 사드’라 칭할 만한 에로티슴의 소설가이기도 하다.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양의 글을 남긴 바타유를 두고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분류할 수 없는’ 작가로 규정한 바 있다. 또한 바타유는 특유의 난해하고 시적이며 무질서하고 수수께끼 같은 문체 탓에,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작가/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주받은 몫』을 비롯한 바타유의 사유는 이후 프랑스 현대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셸 푸코의 저작에 나타나는 광기와 비이성 등 ‘저주받은 몫’의 영역에 대한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해체deconstruction 작업과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도 바타유에게 빚진 바가 많다. 또한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consommation’ 개념은 직접적으로 바타유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에 대한 논의 역시 성聖과 속俗에 대한 바타유의 논의를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그 밖에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주권적 권력’ ‘벌거벗은 생명’ 같은 개념들도 바타유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타유가 생전에 출간한 주저로는 『내적 경험』(1943), 『저주받은 몫』(1949), 『에로티슴』(1957) 등을 꼽을 수 있으며, 그중 표면적으로 ‘정치경제학’을 표방한 『저주받은 몫』은 단연 가장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저서에 속한다. 바타유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소진/소모consumation’ ‘넘침/과잉exuberance’ ‘주권souverainete’ 같은 개념들이 문화사와 정치경제학, 인류학의 관점에서 비교적 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저주받은 몫’인가?
바타유는 일반경제의 관점에서 “생명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필요necessite가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사치/과잉luxe’”(16쪽)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과잉의 에너지, 곧 부富의 ‘소진/소모’가 ‘저주받은 몫la part maudite’을 이룬다.
바타유는 생산/축적의 활동이 필연적으로 과잉을 수반한다고 본다. 즉 살아 있는 유기체는, 특히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축적한다. 이 에너지는 일정 시점까지는 어떤 체계(유기체부터 경제/사회 체제까지)의 성장에 사용되지만,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면 그 에너지의 과잉, 잉여분은 자발적이든 아니든 어떠한 이득도 없이 무용하게 상실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파국적인 전쟁은 이런 소진/소모 행위의 정점이다. 또한 과시적이고 경쟁적인 증여 행위인 북미 인디언 사회의 ‘포틀래치’(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증여 교환의 풍습)나 인신공희까지 이루어지던 고대의 희생제의도 유용성과 대비되는 무용한 소진/소모라는 맥락에서 고찰할 수 있다.
“희생제물은 유용한 부의 총량에서 취해진 어떤 잉여surplus이다. 그리고 희생제물은 아무런 이득 없이 소진/소모되기 위해서만, 그러므로 오직 그렇게 완전히 파괴되기 위해서만,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희생제물로 선택된 순간, 그것은 폭력적인 소진/소모가 예정된 저주받은 몫이 된다.”(99쪽)
아무 이득 없는 소진, 완전한 파괴의 몫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둡고 불쾌하게 느끼는 것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회피와 제거의 대상이 된다. ‘저주받은’ 몫인 것이다. 생산/축적에 대비되는 소진/소모는 바타유가 『에로티슴』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논하게 되는 금기/위반과도 짝을 이룬다. ‘위반’은 ‘금기’를 전제할 때에만 유의미하며, 바타유에게 위반은 금기의 파괴가 아니라 금기의 완성이듯, 소진/소모는 단지 생산/축적의 거부가 아니라 생산/축적을 전제로 한 초월이자 위반이다.
책의 부제에도 등장하는 ‘일반경제’는 바타유에게 있어 ‘유용한’ 생산/축적뿐 아니라 소진/소모로서의 ‘무용한’ 소비, 낭비, 탕진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바타유는 때로 파괴와 상실로도 이어지는 무용한 소진/소모를 유용한 생산 활동과 더불어 인간성과 인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두 축으로 간주한다. 또한 이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과도 연결된다. 생산, 축적, 노동, 소유 등은 일상적인 ‘속’의 세계에 해당하며, 반면에 종교, 희생, 낭비, 소진 등은 비일상적인 ‘성스러움’의 세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바타유의 관점에서, 순수한 탕진과 남김 없는 파괴의 몫, 비정상적인 ‘저주받은 몫’인 소진/소모 없이는 생산/축적이라는 정상성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저주받은 몫’이라 해도 단지 저주인 것만은 아니며, 비정상과 비일상 자체도 ‘일반적’인 것으로 수렴된다. 그렇기에 바타유의 사유는 역설의 반反철학으로 규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