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영웅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조명
이 책은 800년경의 바이킹 시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를 다루고 있다. 서장에서는 바이킹들이 프랑크 왕국 중심의 서유럽을 침공하면서 유럽에 큰 변동이 시작된 역사를 다룬다. 남방에서는 함부르크 내습과 라인강 주변으로 침공이 이뤄졌고 동방으로 향했던 스웨덴 바이킹들은 모스크바 주변에 홀름가드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볼가강 아래쪽으로 내려간 무리는 카스피해로 향하여 캅카스로 들어가 바그다드로 향했다. 바이킹들은 러시아 원정을 통해 러시아 인명人名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북유럽 이름인 ‘에르게, 올레그, 잉마르, 이고르, 발데마르, 블라디미르’ 등이다. 그러니 키이우와 로스코프 등은 원래 바이킹들이 만든 도시인 것이다. 한편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우선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를 습격해 식민을 시작했으며 ‘그린란드’라고 과대 선전하여 식민 희망자를 모집했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지금보다 더욱 자연 조건이 가혹한 곳이었는데, ‘그린란드’라는 이름에 끌려 삽시간에 다수의 희망자가 모여들었다. 985년, 배 25척에 가축을 태운 이주자 일단이 출발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14척뿐이었다. 이윽고 그린란드 남단 동부와 서부에 각각 100호, 200호가량의 집락集落이 형성되었다.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는 3000명가량의 인구가 사는 식민지가 생겼던 듯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아메리카 발견이라는 드라마가 탄생된다. 레이프 에이릭손은 35명의 동료들과 출발해 북미 대륙을 보았고, 해안선을 따라 수백 킬로미터를 남하했다. 그리고 최초로 상륙했던 곳을 헬룰란드Helluland라 이름 붙였고, 다시 남방으로 항해하여 상륙했던 곳을 마르클란드Markland(삼림森林의 땅. 래브라도인 듯하다)라 불렀고, 더욱 남방까지 항해하여 상륙했던 땅을 빈란드Vínland(포도의 땅. 뉴펀들랜드인 듯하다)라 명명했다. 야생 포도를 발견했기 때문이고, 보스턴과 뉴욕 사이라고 한다.
왜 바이킹은 소멸될 수밖에 없었나
바이킹은 몇 차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아메리카 개척에서 벌어진 인디언과의 투쟁을 생각하면, 극소수로 이루어진 산발적인 바이킹 이민이 성공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그 뒤 북유럽 본국으로부터의 연락도 끊어져 전멸해버렸다. 또한 남방으로 향했던 바이킹들은, 영국·노르망디·시칠리아 등 어디에서나 왕이 되었던 수령에게 복종하여 병사가 되었다. 이로써 초기 바이킹들의 자유롭고 독립된 정신적 활력을 잃어버렸고, 동방으로 향했던 바이킹들도 이윽고 대러시아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점점 소실해버렸다.
바이킹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노르만 왕조는 소멸했고, 시칠리아에서도 스타우하우펜가家가 되었으며, 노르망디도 프랑스인의 손에 돌아갔다. 남은 바이킹들도 더 이상 자신들을 노르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인이 되고 영국인이 되고 이탈리아인이 되어 그 나라에 녹아들어갔고, 12세기 무렵에는 서유럽 각지에서 거의 노르만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국 북유럽에서는 그들의 해적무역을 대신하는 새로운 ‘한자 동맹’의 시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패권을 쥔 덴마크, 절대왕정 이룬 스웨덴
제1장에서는 북유럽의 기독교화와 국가 형성의 과정을 다룬다. 바이킹 시대가 끝날 무렵부터 북유럽은 중세사(좀 더 정확하게는 중세 이전의 역사)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또 바이킹 시대의 자취가 남아 있던 시기와 기독교 선교가 승리한 시기와도 겹친다. 덴마크는 그 과정에서 내전을 거듭했고, 스웨덴에서는 작은 왕국이 나란히 일어나 서로 싸우거나 공통의 왕을 모시거나 하다가 통일로 향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지방의 족왕이었던 미발왕 하랄이 900년 무렵 지금의 노르웨이 중부 지방을 평정하고 나라를 통일했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6세(재위 1355~1380)는 노르웨이 중세 마지막 국왕인데, 그가 죽은 뒤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삼국을 하나로 모은 칼마르 동맹이라는 동군同君 연합이 성립되었고, 덴마크를 상위국으로 삼은 유럽 최대 연합왕국이 출현하게 된다. 저자는 그 과정을 자세히 짚고 있다.
칼마르 동맹은 스웨덴의 반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련의 반란에 이은 독립 의사와 행동의 결과였고 마침내 구스타브 바사가 반란을 성공시킨다. 이 일은 나중이고 우선 그 이전의 역사를 보면 엥엘브렉트Engelbrekt가 유능한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1435년 아르보가에서 실질적인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일부 역사가는 이것을 너무 낭만적으로 해석하여 스웨덴 의회의 발생이라 보고, 엥엘브렉트를 덴마크 해방을 위해 싸운 영웅이라 간주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거의 알 수 없다.
북유럽에서 가장 먼저 패권을 쥔 나라는 덴마크였다. 크리스티안 1세가 죽고 왕위는 아들 한스(재위 1481~1513)가 이었다. 그는 스웨덴의 반란을 견제하고 스톡홀름 입성을 강행하여 칼마르 동맹을 부활시키기도 했지만, 스웨덴 정세 단속에는 애를 먹었다. 더구나 한스는 국내에서 유틀란트 자치농민을 탄압하다 농민들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다. 이것이 스웨덴 반란 측의 사기를 북돋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한편으로 스웨덴의 반란을 탄압했는데, 그러나 국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귀족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귀족들은 크리스티안의 숙부이자 전왕 한스의 동생인 프레데리크 공을 왕위에 추대했다. 사태는 프레데리크의 죽음과 함께 격화되었다. 중앙 귀족들은 가톨릭 구교파여서, 독실한 신교인 세자 크리스티안(훗날의 3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한편 유틀란트 귀족들은 신교를 지지하는 크리스티안을 추대했다. 더구나 이 틈을 타고 뤼베크가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명분으로 삼아 대군을 편성하여 침공해왔다. 이 와중에 코펜하겐은 크리스티안 2세를 지지했고 곧 포위당했다. 그 이후 7년 전쟁이 발발했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잔혹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덴마크는 전쟁의 타격에서 빠르게 회복할 만한 국력이 있었다. 상업·무역·농업의 발전은 계속해서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프레데리크는 학술·과학을 장려했고 세계 최초로 성좌표星座表를 만든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1546~1601)를 배출했다. 프레데리크 2세는 명성이 치솟은 과학자를 곁에 두고 싶어 튀코에게 벤Hven이라는 섬을 하사하고 여기에 관측소를 세우는 것을 지원했다. 이후 이 섬의 브라헤 천문학연구소가 유럽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4세 아래에서 덴마크의 국력은 절정기에 도달했고, 동시에 급격한 정세 변화 속에서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잔혹한 역사적 경험이 중립국가의 길로 이끌어
그 이후는 발트해의 대국 스웨덴 탄생의 역사가 시작되고 스웨덴이 절대왕정을 구축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스웨덴 왕 칼 10세(재위 1654~1660)는 무위를 떨친 국왕이었다. 그 무렵 폴란드와 러시아는 3년에 걸쳐 우크라이나 쟁탈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강대해지는 것은 스웨덴 입장에서 위협이었다. 칼은 1655년에 출진, 폴란드에 쳐들어갔다. 이것을 본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에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 폴란드는 러시아군에게 바르샤바·크라카프를 함락당했고 폴란드 왕은 도망쳤다. 러시아는 리보니아에서 폴란드와 휴전, 한편 네덜란드는 스웨덴의 성공에 깜짝 놀라, 무역 이권과 통상권 확보를 위해 함대를 파견, 브란덴부르크 선거후選擧侯(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 황제의 선거권이 있던 7명의 제후)도 적으로 돌렸다. 칼 10세는 주적 덴마크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스웨덴에는 함대가 없어 덴마크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런데 1657~1658년 겨울은 드물게 보는 엄청난 한파 때문에, 덴마크의 대해협·소해협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살짝 얼어 두께가 얇은 얼음이었다. 그러나 칼은 빙상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칼 11세는 1672년에 국왕이 되었다. 승마와 사냥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은, 전사戰士의 생활에 최대의 관심을 가진 유능한 국왕이었다. 한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는 잇따른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다시 스웨덴에 싸움을 걸었다.(1677년) 스웨덴과 덴마크의 숙명적인 전투가 재개되었다.
칼 12세(재위 1697~1718) 시대에 스웨덴 발트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칼 12세가 여러 차례 겪은 극적인 전쟁 과정에서 그 경위를 더듬어볼 수 있다. 그는 대국 스웨덴이 붕괴하는, 규모가 작은 ‘신들의 황혼’을 상징하는 국왕이다.
19세기는 정치적·경제적 근대화의 시대이며, 또한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좌절과 내셔널리즘의 고조를 볼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05년 영사제도를 둘러싸고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 와중에 러시아로부터 핀란드가, 1944년 아이슬란드가 나치 점령하의 덴마크로부터 독립했다. 20세기 북유럽은 사회민주주의 정권하에서의 복지국가화와 ‘중립’ 정책(다만 전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는 NATO에 가입. 또한 유엔의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20세기까지의 북유럽 역사를 이야기하듯 들려준다. 한 덴마크 영화에는 스웨덴 소년이 동창들로부터 “스웨덴 사람 같으니!”라며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다 읽고 북유럽 5개국의 중세 바이킹 시대부터 근대에 걸쳐 덴마크에 이어 스웨덴이 발트해 연안(발트 3국과 북부 독일 지방 포함)에서 패권을 겨루는 과정을 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북유럽 각국은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지금도 역사적으로도 매우 복잡한 관계에 있다. 왜 덴마크인들이 스웨덴인들을 모질게 싫어하고 노르웨이인들에게는 강한 동정심을 느끼는지, 그들이 ‘공생국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된 1864년의 굴욕적인 사건이 무엇인지 등을 이 책을 통해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