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안개에 싸인 알바니아 고원지대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복수극
발표 당시 유럽에서 극찬을 받으며 영화화되기도 한 『부서진 사월』은 전통적 알바니아, 고대의 어렴풋한 기억과 섞여드는 신화적 알바니아의 모습을 보여준 카다레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의 중심 소재는 알바니아의 북부 고원지대에 남아 있는 옛 관습법 카눈의 전통이다. 카눈이란 무엇인가? 카눈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알바니아 고유의 관습법으로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령 어떤 이유로 한 가문의 누군가가 다른 가문으로부터 살해당하면 그에 따라 복수가 시작된다. 상대 가문의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피의 복수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부서진 사월』은 그 피의 복수라는 임무를 운명적으로 부여받은 주인공 그조르그에 의해 장엄하게 진행된다. 이십대 청년 그조르그는 며칠 밤을 매복한 끝에 원수의 가족 중 한 명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다. 그의 임무는 마침내 완수되었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복수의 희생양이 될 차례다. 작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조르그의 한 달이 채 못 되는 휴가를 긴장과 초조, 전율, 때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변주하며 긴박하게 그의 뒤를 좇는다. 그와 함께 관습법 학자 베시안과 그의 아내 디안, 카눈 해석가, 피(血)의 세금을 거둬들이고 고원지대에 관한 문서를 관리하는 일을 겸하는 기묘한 피 관리인 등이 등장하며 알바니아 북부 고원의 황량하고 음산한 풍경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삶과 죽음의 처절하고 숨막히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알바니아 고유의 관습법 ‘카눈’
끊임없이 반복되는 피의 복수는 무엇을 위함인가?
소설이 진행되는 사이사이 카눈에 따라 벌어진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제시된다. 사실 이것들은 관습법에 따른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예들이다. 카눈을 최대한 확대해서 보여주기 위한 예들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보게 되는 것은 매우 집약되고 확대된 모습의 카눈이다. 카다레는 이를 통하여 우리 삶에 내재하는 근본적 부조리성과 비극을 매우 강렬하게 형상화한다.
소설에 나오는 대로 관습법 카눈은 일상생활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해놓고 있다. 카눈은 “물질적인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삶의 단 한 분야도 다루지 않는 것이 없”다. 복수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복수를 하려는 자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경고를 한 후 총을 쏘아야 하고, 총을 쏘아 상대를 죽인 후에도 그냥 자리를 떠서는 안 된다. 죽은 자의 몸을 반듯하게 돌려놓아야 하고 죽은 자의 머리에 그의 총을 기대놓아야 한다. 살인자가 충격으로 제대로 처신할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해 카눈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시신을 돌려놓는 일이나 총을 기대놓는 일을 부탁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까지 한다. 베사, 그자크스, 도레레스, 무란 등 카눈 관련 용어를 사용해가며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또는 서술을 통해 카눈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지만 작가가 카눈을 바라보는 입장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는 알 수 없다. 해설가 유형의 등장인물인 학자 베시안의 입을 통해서는 카눈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피력하지만 또다른 등장인물, 예를 들면 알리 비낙의 보좌관인 의사의 입을 통해서는 카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카다레는 알랭 보스케와의 대담에서 “복수는 관습법의 일부일 뿐이며 그런 복수의 기본개념도 ‘피의 평등성’, 즉 ‘인간의 평등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흘린 피에 대해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살인을 저지른 자가 슬픔을 당한 집으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잔인한 감정과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배우는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신화와 전설에 기초한 작품세계의 보편성
신화와 전설에 대한 애호는 그의 유년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카다레가 태어난 기이로카스터르는 호메로스와 아이스킬로스의 나라인 그리스로부터 30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치이며, 주민의 대부분이 이상한 추억과 이상한 가족연대기, 이상한 풍습 속에 사는 몽환적인 도시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설과 비극과 신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유년 시절 할머니들에게서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덧붙는다. 카다레 스스로도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알바니아의 구전문학, 특히 이야기의 형태로 들은 고대 산문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구전산문들의 매혹이 너무도 커서 그가 처음 책이라는 것을 접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고대산문과 유사한 책들만을 골랐다. 이때 읽은 책이 『맥베스』였는데, 그는 『맥베스』에 등장하는 유령과 그 강렬한 인상에 전율했다. 저승, 꿈, 죽음, 신비 등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아온 요소들이었다. 구전문학, 민요시, 셰익스피어 등이 그의 작품세계의 기초를 형성한 셈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세계의 전설들이 녹아나 하나의 잡종 신화로 재탄생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설가 유형의 등장인물도 특기할 만하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합창대를 연상시키며, 작품 속에서는 기자, 텔레비전 안테나, 곡하는 여인들, 노인 무리, 관찰자, 음유시인, 스파이, 라디오 방송국 등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들은 정보나 소문, 험담 등을 수집하고 퍼뜨리는 자들이다. 이 역시 카다레가 구전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말해준다. 꼭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이 아니더라도 카다레는 작품 속에서 한 사회, 한 집단, 한 사건이나 한 개인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때 그의 시선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표면이나 외관보다는 그 내면을 집중탐사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들은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두루 읽히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 추천글
프랑스에서, 이스마일 카다레의 명성은 그의 조국 알바니아의 이름보다 크다. 그의 소설은 알바니아의 역사와 삶에 깊이 뿌리박고, 거기에 서식하고 있는 신화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피로써 피의 대가를 회수하고, 다시 그 피로써 피의 빚을 갚는 복수의 방식으로 땅 위에 질서를 세워나가는 알바니아 관습법의 세게가 그의 소설 속에서 검은빛을 품는다. _김훈(소설가)
『부서진 사월』을 읽으면 우리는 이스마일 카다레가 왜, 그리고 얼마나 비극과 비극의 대가인 아이스킬로스, 셰익스피어에 열중했었는지 쉽게 이해하게 된다. _에릭 페(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스마일 카다레라는 빛나는 혜성은 일단 책을 덮은 후에도 독자들의 마음을 오랫동안 뒤쫓는다. 이 혜성이,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가, 가장 접근하기 힘들고 가장 폐쇄적인 나라, 독수리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온 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다. _르몽드
카다레는 우리 시대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인 문학의 혈맥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_르피가로
● 본문에서
“베리샤가(家)의 그조르그가 제프 크리예키크를 쏘았어요!”
(……)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그 목소리는 순간 그를 무력감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몸으로부터, 가슴으로부터, 그리고 살갗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잔인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받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베리샤가의 그조르그. 그는 마음속으로 그 무자비한 포고 사항을 알리는 관원의 고함소리를 되뇌었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삶이라는 회반죽덩어리 속으로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13~14쪽)
3월 17일이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댔다. 3월 21일. 4월 4일. 4월 11일. 4월 17일. 18일. 죽음의 4월.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지속되겠지, 죽음의 4월, 죽음의 4월, 그리고 더이상 5월은 오지 않을 거야. 결코 5월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24쪽)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 그는 살인 의식은 관습법의 일부분일 뿐이며, 피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부분에 비한다면 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이 놀랐다. 그러나 관습법의 각 부분은 아주 가느다란 실의 타래처럼 서로 깊이 얽혀 있어서, 이편이 어디서 끝나며 저편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각 부분, 말끔히 세탁된 것이 피로 얼룩진 것을 낳고, 피로 얼룩진 것이 말끔히 세탁된 것을 낳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지는 것 같았다. (32쪽)
고원지대의 수수께끼 앞에서 그의 두뇌가 그런 식으로 경직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고원지대는 그에게 합법적이고,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세계의 전부였다. 나머지 세상, ‘아래 세계’는 악취가 풍기고 퇴화만을 거듭하는 질퍽한 함몰의 세계일 뿐이었다. (168쪽)
“당신도 아시겠지만, 카눈에 따르면 부상을 입힌 경우 벌금으로 배상해야 합니다. 부상 부위의 벌금은 각기 따로 지불되며, 값은 부상 부위가 신체의 어느 부분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머리에 부상을 입힌 경우에는 몸통에 입힌 경우보다 배상금이 두 배 많고, 몸통의 부상도 허리 위냐 아래냐에 따라 다시 두 군으로 나뉩니다. 다른 분류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배석자로서의 임무는 단지 그런 부상의 수와 부위를 결정하는 겁니다.”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