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아이, 풍경, 시간을 인식하고 느끼는 감각
『작은 태양』은 타이완의 국민 작가 린량이 쓴 에세이로 지난 40년간 타이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꼽혀왔다. 이 책은 국내 독자들에게 두 가지 창이 돼줄 것이다. 하나는 아이들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창, 다른 하나는 타이완의 생활사를 엿보도록 하는 창이다.
첫발은 단칸방에 살림을 차린 저자의 신혼 이야기로 내딛는다. 대기는 늘 수증기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물에 흠뻑 젖은 물고기처럼 걸어다니는 타이베이에서 신접살림을 마련한 두 사람의 결혼 초년 생활은 「단칸방」이라는 글 한 편으로 마무리되고, 시간은 널을 뛰어 첫째 잉잉, 둘째 치치, 막내 웨이웨이가 태어난 복닥복닥한 나날들로 휙 날아간다. 총 43편의 산문이 이어지는데, 아빠 주위를 맴도는 행성처럼 아이들은 제 자리를 잡고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해간다.
이 집 아이들은 특별한 교육을 받지도, 세계를 누비며 견문을 넓히지도, 자연 속에서 맘껏 뛰놀지도 않는다. 대도시에서 맞벌이하는 부모는 집에 돌아와도 살림하고 글 쓰느라 바쁘며, 첫째와 둘째는 300근의 책가방을 메고 주어진 생활반경 속에서 원을 그리며 살아간다. 막내는 터울 진 언니들 틈에서 어떻게든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쓰지만 방치되기 일쑤라 주로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다. 쓸쓸히 하루를 보내던 중 언니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막내는 드디어 ‘혼잣말’ 수업을 마치고 현관에 나가 환영사를 외친다. “언니들아, 집에는 뭐 하러 왔는데!” 집 안은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물건들로 늘 엉망이다. 이렇듯 린량이 꾸밈없이 그려낸 가족의 모습은 우리의 생활을 본뜬 듯하다.
그런데 기이한 점은, 너무나 단란하고 따뜻해서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이런 아이가 되고 싶다, 이런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샘솟게 한다는 것이다. 공간을, 아이를, 풍경을, 시간을 인식하고 느끼는 감각이 생경할 정도로 살아 숨 쉰다. 린량의 가족 다섯과 같은 다정함이 있다면 어떤 생활도 평범치 않다는 것을 저자는 글로써 보여준다. 아이를 이렇게 키우라는 조언도,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잘 컸다는 자랑 하나 없지만, 그의 가족사 15년을 읽으면 각자의 어린아이가 내면에서 기어나와 나에게 말을 건다. 네 생활은 하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사랑이 샘솟았고, 그 시간은 소중했지. 이런 동반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평이한 말로 이루어진 예술의 작가, 린량
린량은 1924년생으로 타이완 아동문학의 거목으로 불린다. 왕수펀 아동문학가가 말하길, 린량의 동화는 따뜻하고, 산문은 유머가 넘치며, 문학론은 예리하고, 인품은 돈후하다고 했다. 60여 년간 어린이 책을 쓰고 번역하고 연구한 린량의 작품들은 선善과 미美를 향해 힘차게 내달린다. ‘선’과 ‘미’라는 말은 그의 생활을 돋보기로 들여다본 관찰자가 뽑아낸 너무 추상적인 낱말이지 않을까. 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글과 삶에서 이렇게 귀납시킬 수밖에 없다. 구체적 세계들이 다른 어떤 단어로도 집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린량이 보여주는 건 세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이야기 나누고, 유치원과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이다. 그는 그저 이런 일상생활을 충실히 재현하는 글을 쓴다.
이를테면 막내 웨이웨이는 ‘텔레비전 고아’가 되는 것을 극혐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TV를 켜자마자 아이는 자기가 ‘심하게 교양 없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바지에 오줌을 싸거나 바닥에 똥을 누고, 벌러덩 드러누워 잠든 척하거나 꽃병을 부순다. 막내는 결코 TV를 용납하지 않는다. TV 앞에서 어른들이 목을 쭉 뺀 채 커다란 상자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자신한테 관심을 안 두면 이 ‘텔레비전 고아’는 참는 방법을 모른다. TV뿐만이 아니다. 책을 볼라치면 막내가 책을 빼앗는다. 글을 쓸라치면 펜을 빼앗는다.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눌라치면 그 사람을 몰아내버린다. 집을 좀 치울라치면 오줌을 싼다. 책상을 정리할라치면 똥이 마렵단다.
하지만 TV는 막내의 어휘력을 늘려준 주역이기도 하다. O형의 이 아이는 TV 속 말들을 그대로 빨아들여 다음과 같은 말을 곧장 쏟아놓는다. “나 오늘 엄청 신나.” “엄마, 무지무지 사랑해요.” “작은언니가 날 학대해.” “큰언니가 최고로 귀엽다니까.” “아빠, 저리 좀 가주세요.” “꼬마 친구들, 어린이 세상에 잘 오셨습니다. 다 같이 즐겨요!”
이게 좋은 일이다 아니다를 판단하지 않고 아빠로서 저자는 입에서 텔레비전 말이 흘러나오고, 머릿속에 텔레비전 사고를 장착하고, 즐기는 취미도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는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을 인생 문제로 받아들인다.
첫째 잉잉의 생활 묘사도 들여다보자. 잉잉이 아침에 일어나면 저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젯밤에 다 못 풀고 잔 수학 교과서를 가지고 또 서재로 올 것이기 때문이다. “형 나이가 동생 나이의 두 배보다 여섯 살 적으면…….” 저자의 대뇌는 다시 첫째의 계산기가 돼주어야 한다. 하나같이 목욕을 싫어하는 아이들이지만, 수학 마니아(?) 첫째는 목욕하라는 말에도 수학 핑계를 댄다. “근데 조금만 기다려 주실래요? 수학 문제를 반밖에 못 풀어서요.” 이 말을 내뱉고 나서도 다시 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더는 늦출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아이는 몽유병자처럼 휘적휘적 욕실로 들어간다. 잉잉이 수학 문제를 들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지만 부모는 잉잉이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게끔 ‘크게’ 만들기로 결심한다. 즉 일체의 간섭을 거둔 채 아이에게 ‘책임감’을 모조리 떠넘긴다. 아이가 제 운명과 싸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부모로서 무척 괴롭다. 마음이 쓰라리기보다는 ‘가렵’달까. 걸핏하면 공짜로 ‘시범’을 보이고 싶고, 걸핏하면 아이들 앞에서 아빠의 수학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린량은 아동문학을 ‘평이한 말로 이루어진 예술淺語的藝術’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동명의 책에서 아동문학은 이해하기 쉽고 통속적인 언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후대의 아동문학 창작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평생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탐색하던 사람으로 그의 펜 끝에서는 어떤 평범한 일도 흥미롭고 특별하게 재탄생된다.
아이들은 부모 마음에 품은 작은 태양이다
이 책은 ‘단칸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창문 밖은 세상, 창문 안은 집. 우리 집에는 방이 딱 한 칸 있고, 우리 방에는 빈 벽이 두 개 있다.” 저자는 나무판자로 된 벽 하나에 담홍색 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 때마다 새삼 느낀다. ‘참 작기도 하지, 우리 집!’ 부부 두 사람이 방 한가운데서 마주 보고 선다. 공간은 꽉 찬다. 그들의 작은 방은 세상없이 안쓰러운 고아처럼 느껴져 두 사람은 작은 마음을 보태 그 모든 결핍감을 채우겠노라 다짐한다. 다행히 타이완의 음습한 우기를 뚫고 작은 태양 셋이 태어난다.
작은 태양 셋은 육아 기계인 아빠를 배려하려고 나름껏 노력한다. 저자가 원고를 쓰느라 밤을 새우면 손가락 세 개가 저마다 세 개의 입에 갖다 대고 “쉿, 쉿, 쉿” 소리를 낸다. 이 애가 저 애한테 조용히 하라 하고 저 애가 이 애한테 조용히 하라 한다. 차르르, 커튼이 드리워진다. 첫째가 말한다. “커튼 치면 햇빛이 안 들어와서 아빠가 더 오래 주무실 수 있어.” 두 살 막내가 돌돌 말린 이불을 펴주겠다며 침대로 기어오르다 주르르 미끄러진다. “떨어졌어! 떨어졌어!” 막내의 탄식이 들린다. 첫째와 둘째가 다시 손가락으로 입단속을 한다. “방문 잘 닫고 가자. 누가 들어와서 시끄럽게 하면 안 되니까!” 둘째 목소리다. 작은 발 여섯 개가 쿵쾅거리더니 문이 쾅 하고 닫힌다. 고운 마음씨들이 만들어준 ‘수면 환경’ 속에서 저자는 잠이 확 깬다. 서로의 배려가 흘러넘쳐 샛길로 새버린 진풍경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 중 하나는 표현력이다. 축축한 빗속에서 살아가는 타이완인들을 저자는 물고기로 묘사한다. “올해 춘절은 ‘비 오는 명절’이다. ‘행인들을 말 없는 물고기로 만드는’ 궂은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가오슝으로 여행을 떠나면서는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타이베이를 떠난 우리는 가오슝에서 태양을 따라잡았다”라는 빛나는 표현을 구사한다. 태양이 길동무가 돼주어 실컷 여행을 잘하고 온 아빠와 세 딸은 다시금 진창길로, 음습한 도시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일더미 속으로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달라져 있다. 이들 가족은 남쪽에서 태양을 만났고, 마음속에 작은 태양을 품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하얀 개 스노까지 합세해 일상에는 따사로운 볕이 드리운다. 윗세대와 아랫세대, 인생과 인간성, 역사와 현실을 응집해 더 높은 곳을 향해 가려는 힘이 이들 가족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눈부신 단어와 문장들 속에 담겨 작은 태양처럼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