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모방 욕망, 죽음 충동
가상과 실재의 모호한 경계
김영하 문학의 기원, 『호출』 개정판
김영하 등단 25주년을 맞이해 시작된 ‘복복서가×김영하 소설’ 시리즈 2차분 6권 가운데 앞서 출간된 『오직 두 사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빛의 제국』에 이어 나머지 3종이 모두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소설은 김영하식 슬픔의 미학을 볼 수 있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 한국의 이십대 또는 이십대적인 삶을 그려낸 『퀴즈쇼』 그리고 충격적인 첫 소설집 『호출』이다. 나르시시즘, 모방 욕망, 죽음 충동 등과 같은 현대의 증상을 명쾌하게 포착하면서 특유의 대담하고 건조한 문체를 보여주는 『호출』은 총 열한 편의 단편으로 매력적인 날것의 세계, 간헐천처럼 분출하는 위험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수록작들의 순서를 재구성하고 표현을 세밀하게 다듬으면서도 첫 소설집이 주는 날것의 느낌은 살려 담았다. 또한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자신의 기원을 되돌아보며 쓴 ‘작가의 말’을 새로 실었다.
첨단의 상상력, 세련된 감수성으로
현대의 증상을 일찍이 예견한 소설집
『호출』에 수록된 작품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거울에 비친 나’를 탐색하는 이야기들이다. 거울은 자신을 비추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이 자신 자체는 아니다.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 ‘나’는 아내의 친구와 몰래 성적인 만남을 갖는 도중 버려진 차의 트렁크에 갇히게 된다. 그 안에서 ‘나’는 아내의 친구에게 자신의 거울이라고 믿었던 존재들에 대한 배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무너진다. 표제작인 「호출」에서는 통신기기인 삐삐가 거울 역할을 한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삐삐를 건네는 상상을 하던 ‘나’ 역시 자신의 상상과 삐삐라는 거울 장치에 갇힌다. 「내 사랑 십자드라이버」와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에서는 각각 기계와 컴퓨터게임이 거울 역할을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은 현실에서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보다는 더 완전하게 만들어진 세계에 천착하지만 결국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마뱀」에서 ‘나’는 우연히 만난 남자가 준 도마뱀 모형 때문에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으며, 종국에는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둘째 부류는 자기파괴 충동이 지배하는 이야기들이다. 「총」에서는 무장탈영병이 파멸적인 인질극을 벌인다. 편지 형식으로 쓰인 「손」에서는 사랑에 실패한 화자가 타인의 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마지막에 그 집착은 자신의 손에 대한 파괴적 충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아름답다」의 ‘나’는 ‘진짜 죽음’을 찍고 싶어하는 사진작가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여자를 따라 외딴섬으로 간 ‘나’는 여자의 비밀을 듣고 ‘진짜 죽음’을 찍게 된다.
마지막 부류는 믿고 있던 가치가 무너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다. 「전태일과 쇼걸」 「베를 가르다」 「도드리」에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학생운동을 했던 과거를 가진 인물들이 나온다. 믿었던 이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갑자기 나타난 상황에서, 인물들은 감상에 빠져 과거를 추억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감상에 빠져든다.
세기말의 『호출』과 현재의 『호출』
1997년 초판이 발행된 『호출』은 김영하가 1994년 11월부터 1997년 7월까지 약 3년 동안 쓴 단편을 모아 엮은 것이다. 소설 속 풍경은 리얼한 것 또는 리얼해야 하는 것이라 믿었던 1980년대 이념의 위상이 유토피아적 허구로 추락한 1990년대의 혼란과 허무를 나타낸다. 인물들은 현대사회의 피상적 삶과 소통 불능의 욕망에 좌절하거나 병적 나르시시즘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다. 작가는 1990년대 일상의 지표를 드러내는 소재들을 차용하고 환상과 현실을 모호하게 뒤섞으며 폭력, 죽음,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전복적으로 탐구한다.
『호출』은 첨단의 상상력과 날렵한 호흡, 차갑고 세련된 감수성 등 김영하 문학의 특징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1990년대 한국문학의 뛰어난 성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등단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올라선 김영하의 신세대적 패기와 비범한 역량이 녹아 있는 초기작들은 25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롭고 문제의식은 더 첨예하다.
■ 책 속에서
내 거울은 나를 속였다. 진정한 거울은 나와 함께 이 트렁크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다. 아니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거울은 없다. _32~33쪽 「거울에 대한 명상」
오로지 저 삐삐는 나로부터 오는 신호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흥분을 느꼈다. 내 일생 동안 한 번도 그런 존재를 소유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발신되는 신호만을 수신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를 말이다. _46쪽 「호출」
그러나 어찌 보면 ‘전적으로 우연한’ 일이란 없는 것이다. <……전태일>과 <쇼걸>이 같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확률만큼 그런 우연은 발생한다. 그것까지 필연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 삭막할 것이다.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_83쪽 「전태일과 쇼걸」
도마뱀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도마뱀은 나와 함께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좀더 명징한 정신으로 돌아온다.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 다시 벽을 바라보았을 때, 도마뱀은 걸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정확하게 걸려 있었다. _183쪽 「도마뱀」
아까 내가 찍은 사진들 봤죠?
네.
그건 가짜예요. 내가 정말로 찍고 싶은 건, 죽음이에요. 그런데 언제나 가짜 죽음만 찍는 거예요. 내 곁에는 그다지도 죽음이 흔해빠졌는데 정작 내 사진에는 진짜가 없어요. _290쪽 「나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