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너지는 힘으로
영원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될 것이다.”
문학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문학, 아름다움을 걷어낸 자리의 아름다움
강지희 첫 평론집
“‘대형 신인’이라는 평가에 맞춤한” “붉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파란 불꽃으로 문학을 향해 돌진”(평론가 김미현)하는 평론가 강지희의 첫 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08년 조선일보에 한강론이 당선되면서 비평활동을 시작한 강지희의 꼬박 15년의 기다림 끝에 도착한 귀하고도 반가운 첫 평론집이다. 한국문학장의 최전선에서 쉴 결 없이 활동해온 한 젊은 비평가의 단행본이 이제야 당도한 데는 텍스트의 수많은 결을 헤아리고 오래도록 깊이 사랑하는 작가의 고심이 자리하는 한편, 2010년대 중반부터 우리를 덮치며 범람한 ‘페미니즘 리부트’와 ‘촛불혁명’을 통과하며 “낭만주의의 껍데기가 깨어져 나간 자리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다시 읽”(6쪽)히는 전회의 국면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맞이한 연유도 있을 것이다.
강지희의 글은 한 여성 비평가가 21세기 한국과 한국문학에, 누구보다 섬세한 지진계로서 먼저 진동하고, 함께 읽고, 내외부의 흔들림에 충실히 감응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파토스의 그림자』는 동시대 한국문학의 첨단에서 시대의 아픔에 공명하고, 관성적인 낙관에 저항하며, 예기치 못한 절망 속에서도, 기어이 되살아나는 아름다운 생명체처럼 가까스로의 빛과 그림자에 의지해 써내려간 기록이기도 하다. 결코 “소유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그림자의 자유로움”(10쪽)으로 하여금 “단정한 에토스”에 포섭되는 대신 “날 선 파토스”(8쪽)로 이행하며 새롭게 써내려간, 여성 문학사의 끝과 시작을 한데 품은 『파토스의 그림자』. 그의 글은 보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를 조명하고, 광장에서조차 탈락한 소수자와 함께하는 방식으로, 동시대 문학을 발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발명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파토스는 번개처럼 등장해 에토스를 깨뜨려버렸다.
기존의 믿음들이 비틀리고 부서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찾아온 세계의 공백은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 해방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파토스는 그저 고통스러운 파국과 균열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
고, 근본적인 지점에서 역동성과 활기와 함께 효과적인 행동의 동력을 제공한다. _「책머리에」(7쪽)
“상처 입은 파토스를 한시도 떠나지 않는 그림자 연인의 행보” _김미현(문학평론가)
“더 많은 불협화음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의견들과 마주치기를 바라며”
로고스의 빛이 아닌 파토스의 그림자로 가닿는 섬세한 손길
『파토스의 그림자』는 총 4부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1부 ‘번뜩이는 천 개의 눈’은 시대와 치열하게 불화하는 동시에 열렬하게 연대하는 ‘날 선 파토스’를 만나볼 수 있는 글들을 모았다. 세월호 참사와 촛불혁명, 미투 운동 등을 거치는 동안 광장에서 일어난 일과, 끝내 광장에서 가시화되지 못한 존재들을 밝히며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걸쳐 발표된 문학 텍스트를 분석한다. “페미니즘 문학은 해방을 맞은 것일까, 도둑맞은 것일까?”(「관조가 아닌, 연루됨을 위해」)라는 자문이 “여성들은 이해 가능한 보편적 특질을 갖춤으로써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해 불가능한 타자적 존재로서 고유하게 존중받아야 한다”(「이 밤이 영원히 밤일 수는 없을 것이다」)는 지극히 자명하고도 곡진한 문장으로 전개될 때 우리는 함께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2부 ‘불협화음으로 춤추는 여성들’은 새로운 여성 문학사라 일컬을 수 있는 글들로 채워졌다. 여성 스릴러의 태동을 미리감치 예감하는 기민한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비롯해 김금희, 최은영, 박민정, 최은미 등 거침없이 작품세계를 펼치고 갱신하는 여성 작가들의 위상과 의의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글들은 각 작가의 작품집에서 불가분한 해설로 처음 조우했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다시금 배치됨으로써 강지희가 그려내는 여성 서사의 계보-성좌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로 재탄생했다.
의미 있는 말이 되지 못하더라도, 설사 방향이 비껴가서 나중에 반성하게 되더라도, 누군가는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며 고민중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썼다. 관조하는 구경꾼이 되지 않기 위해, 실패를 통해서 다시 질문하기 위해, 불편하게 계속 연루되기 위해 썼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혁명인 미투 운동이 신성화되지 않기를 바라며 썼다. 그 앞에서 우리가 어떤 진영으로도 나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어떤 문제도 없이 순수하거나 무결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라, 지속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운동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더 많은 불협화음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의견들과 마주치기를 바라며 썼다. _「관조가 아닌, 연루됨을 위해」(66쪽)
3부 ‘광장을 산책하는 언어’는 박상영, 김지연 등 동시대 퀴어 문학의 새로운 경향성을 짚는 데서 시작해, ‘퀴어’한 존재론을 장애와 교차 사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특히 김초엽의 소설을 다루며 “기술과 시술이 개입해 들어오는 몸을 어디서부터 장애로 볼 것인지는 사회의 관점에 달린 것”이란 점을 버르집으며 “비장애 신체성을 표준으로 만들어온 사회의 정상화 기제를 폭로”(「극복되지 않는 몸」)하는 탁월한 통찰은 비단 텍스트 분석으로 국한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미학과 정치, 윤리를 제안하는 지점까지 뻗어나간다.
4부 ‘환상의 불꽃놀이’는 변이하는 신체들과 환상성이 결합하는 서사들이 묶였다. 한강으로 시작해 윤이형, 현호정으로 가지 치는 글들은, 신화에서 비롯한 문학적 상상력이 포스트휴머니즘까지 다다르는 여정을, 이 둘이 실은 긴밀히 이어져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더불어 황정은과 윤고은의 소설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평문은 신자유주의 세상 속 얇은 바늘이 되어 저항의 구멍을 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타진해본다.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동시대의 새로운 미적 경험의 자리에서 발산되는 진동을 인식하며, 역동적인 정념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일 것이다. 2015년과 2016년 이후의 변화들에서 독자들이 문학을 감각하는 방식이 달라졌음을 읽어낸 것처럼, 2020년의 변화들에서 비평은 문학이라는 노동 아래 자리한 물적 조건을 긴밀하게 사유하며 새로운 수행성을 함께 발견해나가야 될 것이다. 문학의 지각변동 앞에서 그 생경함에 놀라 권위주의적인 비평으로 회귀하는 대신, 유연함을 잃지 않고 문학과 삶이 만나는 자리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다. _「동시대성을 재감각하기」(315쪽)
끝으로 『파토스의 그림자』는, 강지희의 글쓰기는 다름 아닌 사랑의 연대(年代/連帶)기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사랑에 빠졌을 때보다 사랑이 끝난 뒤에 비로소 상대를 더 깊이 이해”(10쪽)하게 됨을 절감하는, “문학에 대해서만큼은 뜨거운 사랑 속에서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갱신해나갈 수 있기를 바”(12쪽)라는 평론가 강지희. 이토록 문학 앞에서 겸허하게 사랑받고 사랑하기에, “빛이 아닌 그림자의 자리에서 사랑이 아닌 이별의 자리에서”(12쪽)조차, 오늘도 문학을 향한 사랑과 고백을 숨길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문학의 아름다움이란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각기 다른 특질로 고유하게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요체를, 마찬가지로 이채롭게 아름다운 글로 증명해내는 비평가 강지희. 그가 한 시대에 대하여 성실히 문학으로 답변한 기록이, 문학과 치열하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만난 시절이, 진심을 다해 흔들리고 버티고 두 손을 맞잡은 흔적이, 이곳에 있다. 아름다운 만큼 섬세하고 유려한 만큼 정확한 문체로, “이 무너지는 힘으로 영원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축성되는 순간을 『파토스의 그림자』에 담았다.
■ 작가의 말
나의 평론이 무언가에 비유된다면 강렬하고 차가운 로고스의 빛이 아니라, 어둠까지도 부드럽게 포용하는 파토스의 그림자에 가깝기를 바랐다. 파토스가 지나간 뒤 선연하게 남은 것들을, 그 격정과 상실의 낙차가 만들어내는 흔적들을 정확히 기록하고 싶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보다 사랑이 끝난 뒤에 비로소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해버리는 것처럼, 빛이 아닌 그림자의 자리에서 사랑이 아닌 이별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견디며 써나가고 싶었다. 하나의 존재에 무수히 많은 그림자들이 드리워지듯 하나의 문학 텍스트에는 무수히 많은 해석이 달리겠지만, 텍스트가 시대와 나를 관통하는 순간의 파토스를 정확하게 잡아채서 절대적인 하나의 그림자가 되고 싶었다. 빛에 따라 그 모양과 농도가 계속해서 변하는 그림자의 유연한 힘을 닮고 싶었다. 존재에 가장 밀착해 있지만 결코 소유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그림자의 자유로움으로 세계와 조우하고 공명하고 싶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찾고자 했던 내가 홀렸던 문학의 빛은 아마도 한여름의 눈부시고 장엄한 광휘가 아니라, 낡은 베일 사이로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다 부서져내리는 빛과 그림자였던 것 같다. 시대를 또렷하게 응시하며 영향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바꾸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그림자-되기.
2022년 가을
강지희
■ 추천의 말
‘대형 신인’이라는 평가에 맞춤한 강지희 평론가의 n번째 같은 첫 평론집 『파토스의 그림자』는 붉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파란 불꽃으로 문학을 향해 돌진한다. 이 평론집의 글들이 자주 주목하는 텍스트 속 ‘서늘한 장면’의 온도가 서늘하지만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균열, 잉여, 공백 등과 가깝지만 지나치게 가깝지는 않은 ‘파토스’의 이름으로 세월호, 촛불, 미투 등과 연관된 문학적 사건에 오래 머무는 ‘능력’과 거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의지’를 전방위적으로 보여준다. (…) 다프네 신화부터 드라마 <오징어 게임>까지, 고어(gore) 자본주의부터 포스트휴머니즘까지, 한강부터 김초엽까지 아우르는 이 평론집의 글들이 우울해도 무해하고, 불편해도 충만한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을 살리려고 거창하게 애쓰지 않는데도 문학이 자연스럽게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니 그 자체로 21세기 문학 속 낙법(落法)의 최고 낙법(樂法)을 보여주는 강지희 평론들로 부터 n번째 영향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_김미현(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우리를 덮치며 범람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는 페미니즘 리부트의 물결이,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거쳐 촛불혁명의 불길이 일어났다. 이런 흐름과 더불어 한국문학장에서도 그동안 문학을 지탱해오던 믿음들이 의혹과 심문의 대상이 되었다. 문학이 순수하지도 숭고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맨눈으로 보았다. 파도가 쓸려나간 해변, 낭만주의의 껍데기가 깨어져 나간 자리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다시 읽혔다.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문학 속의 보편적인 선과 악, 아름다움과 윤리를 바라보는 건 불가능해졌다. _「책머리에」(6쪽)
한국문학장은 더 나은 미래를 예견하며 인간을 위무하는 단정한 에토스가 아니라, 타협 불가능한 단절을 만들며 기존의 의미들을 파산시키는 날 선 파토스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부서진 자리에서 문학은 죽는 대신,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기이하고 아름다운 생물체처럼 다시 살아났다. (…) 인간[Man]이 알고 있다 믿었고 재확인했던 세계가 여전히 반쪽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이 주는 혼돈의 파토스가 새로운 문학을 추동한다. 그리고 이 파편화된 세계 속에서 보편자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들이 회귀한다. _「책머리에」(8쪽)
그러나 ‘순수하다’는 형용사는 얼마나 불순한가. 사회는 기존의 통념을 거스르지 않으며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들에게 ‘순수한’과 ‘귀여운’이라는 형용사를 적극적으로 부여해왔고, 그 말은 대개 남성보다는 여성을 긴밀하게 수식해왔다. (…) 여성들은 이해 가능한 보편적 특질을 갖춤으로써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해 불가능한 타자적 존재로서 고유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_「이 밤이 영원히 밤일 수는 없을 것이다」(21쪽)
하지만 더이상은 나비처럼 여성을 상상하고, 농락하고, 재현하고,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예술이 되어왔던 이상한 힘들 앞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불모가 그들의 영원한 풍요가 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가느다랗고 아름답지만 쉽게 찢겨버리는 연약한 날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어둠 너머를 보는 시퍼런 칼날 같은 눈을 가질 것이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기적이 될 것이다. 자학과 자기모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당당한 웃음으로 맞설 것이다. 희열 속에서 마음껏 읽고 쓸 것이다. _「이 밤이 영원히 밤일 수는 없을 것이다」(32쪽)
인류 보편을 향한 이 사랑에는 그늘 한 점 없고, 여성의 자리 또한 없다. _「광장에서 폭발하는 지성과 명랑」(36쪽)
페미니즘 비평은 불연속적인 모순들로 가득한 젠더 범주들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삶의 형태들을 발견해가며 경쾌하게 이어져야 한다. 지금의 내게 페미니즘 비평은 다른 이에게 “같이 살자”며 손을 내미는 연대의 비평이다. _「관조가 아닌, 연루됨을 위해」(65쪽)
1990년대는 여성 문학의 부흥기였지만 어느 순간 확고해진 여성 문학의 범주가 여성 작가들에게는 벗어나야만 하는 하나의 굴레가 되었다. 그 결과 2000년대 한국문학은 여성 문학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무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2000년대는 그야말로 어떤 것들도 다 여성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러한 현상이 여성 문학이라는 의미를 텅 비게 만들었다. 여성 문학이 해방을 맞은 것일 수도 있고 도둑맞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_「2000년대 여성 소설 비평의 신성화와 세속화 연구」(88~89쪽)
이 여성 스릴러들에서는 지금 시대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의 정동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흘러나온다. 이 정동이 변하지 않는 남성적 세계와 마찰하는 동안 서스펜스는 점점 더 커지며 희열을 생산한다. 여성들이 사납게 분출하는 분노와 공격성은 오랜 세월 가부장제의 끈질긴 동력이었던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을 향한 부채감을 끊어낸다. 그들이 위악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욕망하고 파괴하는 방식은 이성애 중심적인 가부장제 질서를 부수고, 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여성들이 성장하는 하나의 길을 열어낸다. 지금 현실에서 독자들의 욕망과 가장 밀착해 있으면서, 기존 서사들의 재현 방식을 날렵하게 갱신하는 장르가 여기에 있다. 여성들이 여성들에게 물려주는 이 모든 사랑과 증오의 유산 속에서, 여성들은 비체라는 오명을 집어던지며 새로 태어나는 중이다. _「투명한 밤과 미친 여자들의 그림자」(173쪽)
소설의 바탕이 되는 주요한 생각 중 하나는 우리가 유일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부정적으로 치닫는 대신, 실망과 균열들을 끌어안은 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의연하게 걸어가도록 한다. 시작도 끝도 분명치 않은 그들의 사랑과 이후의 삶은 여름날의 불꽃놀이보다는 이 불꽃놀이가 끝난 후의 기나긴 여운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주는 적막한 위로에 기대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은 그 짧은 여름을 영원히 살아간다. _「끝내 울음을 참는 자의 윤리」(244쪽)
기술과 시술이 개입해 들어오는 몸을 어디서부터 장애로 볼 것인지는 사회의 관점에 달린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애는 수동적으로 고통을 겪어내는 몸에 그치지 않고, 퀴어처럼 수행성을 지닌 몸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 장애의 수행성은 비장애 신체성을 표준으로 만들어온 사회의 정상화 기제를 폭로하며 다른 몸들을 가시화하는 쾌감을 분출한다. 그렇게 김초엽의 장애는 새로운 사랑을 발명한다. _「극복되지 않는 몸」(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