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의 책소개
그러나 나는 언제나 물었다
왜 우리는 만났는가
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가 _「풀잎에 붙어 비 맞는 달팽이처럼」 부분
우리 개도 늙으면
나처럼 천천히 걸어다닐 것이다
남 보기에는 쓸쓸해 보일지 몰라도
아니 정녕 그게 쓸쓸할지는 몰라도
쓸쓸한 게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배 좀 고픈 게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마저
알게 될지도 모른다 _「다시 새벽을 기다리며」 부분
자다가 깨서 찬물 마시고
한번 크게 웃은 이 밤
산아래 개구리들은
별빛으로 목구멍을 헹군다_「다시 산에서」 부분
1984년 『반시』 8집에 「강」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소박하면서도 현실문제를 간결 선명하게 표현해”낸다는 평을 들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홍성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를 문학동네포에지 58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2006년 6월 초판을 발간했으니 그로부터 꼬박 16년 만이다. 초판 출간 당시 편집부에서 이를 김홍성 시인의 첫 시집으로 소개했으나 사실 1991년에 하락의 흐름 8번으로 『바람 속에 꽃씨 하나』라는 시집을 500부 소량 찍은 일이 있다. 이후 15년 만에 53편의 시를 실어 두번째 시집을 펴낸 것이다.
초판 발문을 쓴 유성용 시인은 김홍성을 가리켜 상처를 피할 길 없는 이 세상에서 함부로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가 되고 싶었으리라 말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말 못할 슬픔과 고운 것들이 수시로 여리게 반짝인다고, 그의 경륜은 함부로 깊이를 드러내지 않으나, 그 폭은 참으로 넓고 쓸쓸하다고. 시인은 “왔는가 했더니 벌써 가버리는 여기”(「희망가」), 슬퍼할 겨를 없이 바쁜 사람들 틈에서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슬픔을 느낀다. 그는 노래하려 한다. 삶이란 우리가 걸린 거미줄이며, 허공에 걸려 메말라 껍데기만 남은, 바람에 부서져 날리는 먼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슬픔을 담기엔 충분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늘 다시 시작해야 하는 노래를(「남자와 여자, 적과 동지」). 그는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 땅’, 이 사바세계(堪忍國土)에 하얀 설산이 내다보이는 창을 하나 내달고자 한다(「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햇빛과 바람이 들어오고, 달빛과 별빛이 스며들고, 새소리 빗소리가 넘어오는 신성한 창을. 그 창에는 떠나간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리움이 기대어 자란다. 밤중에 오롯한 등잔불이 켜지는 그 창이 그리워서 누군가가 돌아온다. 오랫동안 이 땅을 헤매고 있던 누군가가.
벌판에서 태어나리라
드넓은 벌판 보리수 밑에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리라
김매러 나온 늙은 아낙 땀에 절어 찝찔한 젖 빨며
업둥이로 자라리라
물소 등에 앉아 풀피리 불고
벌판에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자라리라
말라리아도 코브라도 콜레라도 굶주림도 겪어보리라
늙은 어미 먼저 죽고 없어도 혼자 살아보리라
맨발로 벌판을 걸으며 독수리 밥 빼앗아 날로 먹으며
벼락도 맞고 짱돌 같은 우박도 맞고 몰매도 맞으면서
질기게 살아보리라
한번 울면 천둥같이 울면서
한번 걸으면 백 리를 내달으며 설산까지 가보리라
설산 어귀에 이르기도 전에 자랄 건 다 자라리라
잔뼈도 주먹도 콧수염도 턱수염도 다 자라고
불알 두 쪽도 거치적거릴 만큼 자라리라
이제 무엇이 더 될까 고민할 만큼 자란 몸
벼랑 아래로 던지고 싶을 만큼 자라리라
굶고 또 굶어서 독버섯 먹고 미쳐서
벼랑 아래 몸 던지고도 안 죽고 살면 더 살아보리라
마을에 내려가 양치기네 곰보 딸 사위도 돼보고
애비 노릇도 해보리라 도적질도 해보리라
밤이면 집 없는 개를 껴안고 자면서
또다시 귀이개 하나로
뉴델리 봄베이 캘커타 마드라스 코친
역에서 역으로 떠돌아보리라
세상 귓구멍 만 개는 더 후벼보리라
후벼낸 귓구멍마다 속삭이리라
이 세상 몇 번이고 다시 와서 살고 싶다고
다시 와서 이렇게 저렇게 닥치는 대로 살고 싶다고
그리고 꼭 한마디 덧붙이리라
못 오면 말지요라고
_「귀 후벼주는 남자의 노래」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