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첼란 전집
‘무시무시 섬뜩 아름다움’이라 그때 언니가 말했었지.
‘눈물자국의 가장자리에서 배우렴/사는 것을.’
그리하여 오늘부터 나는 첼란의 이 구절을 섬길 테다, 언니야!
김민정(시인)
아우슈비츠 이후 독일어권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이며, 2차세계대전 이후를 대표하는 유럽 시인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명인 파울 첼란. 그의 시와 산문, 연설문을 묶은 『파울 첼란 전집 3』, 부코비나, 부쿠레슈티, 빈 시절의 초기작을 묶은 『파울 첼란 전집 4』, 파리 유고에서 나온 시를 묶은 『파울 첼란 전집 5』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로써 지난 2020년, 첼란의 탄생 100주년 사망 50주기를 맞이해 대표 시집을 네 권씩 묶은 1, 2권으로 첫선을 보였던 한국어판 파울 첼란 전집이 완간에 이르렀다. 대표작은 물론 초기 시와 유고시, 산문과 연설문까지 모두 아우른 것으로 이제 독자들은 선집이나 단권으로 접해왔던 첼란과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폭넓게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판 파울 첼란 전집은 2000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총 일곱 권으로 출간된 『파울 첼란 전집Gesammelte Werke in sieben Bänden』을 저본으로 삼아 (첼란이 랭보, 발레리, 오시프 만델스탐, 셰익스피어, 페소아 등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묶은 두 권을 제외한) 다섯 권으로 구성되었다.
이 전집은 허수경 시인의 유고이기도 하다. 이십대 후반 독일로 떠나 2018년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생의 절반 이상을 ‘실향’ 상태로 지내며 모국어로 쉼없이 작품을 발표해왔던 시인이,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고향을 잃은 채 독일어로 시를 썼던 첼란의 세계를 우리말로 옮겼다. 몇몇 갈피 첼란의 시와 함께한 시간이 배어 있는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에서 허수경 시인은 ‘시의 수많은 이미지가 첼란의 유대인의 존재에서 나오지만 첼란의 언어는 다만 첼란이라는 시인의 절대적인 언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말한다. 시인은 “삶의 순간순간에서 나온” 첼란의 언어 그 자체에 집중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옮겨놓는다.
“무시무시 섬뜩 아름다움”
홀로코스트를 심장에 새긴 첼란의 시
파울 첼란은 1920년 부코비나 체르노비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부코비나는 18세기 후반까지 오스만제국, 그후로는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세계대전 후 루마니아에, 2차세계대전중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었다. 첼란이 태어날 당시에는 루마니아 영토였으나 유대정신을 계승하길 바랐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대인 학교에 다니며 히브리어를 배웠고, 독일문학에 심취했으며 표준독일어 교육을 중시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썼다.
십대 시절 남몰래 시를 쓰기 시작하지만 대학자격시험을 치른 후 의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 투르로 떠났고 일 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1940년 소련이, 일 년 후 루마니아가 재점령하면서 파시스트 정부와 나치 독일에 의해 게토가 된 체르노비츠에서 첼란은 시를 쓰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번역했다. 그리고 곧 나치에 의해 유대인 학살수용소 추방이 시작되었다. 수용소로 끌려간 첼란의 아버지는 병사하고 어머니는 총살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고, 첼란은 탈출했다가 다시 루마니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 뒤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의 경험과 함께 부모의 죽음은 이후의 삶과 시 세계에 영구히 각인되었다.
1944년 2월에야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던 첼란은 체르노비츠를 떠나 부쿠레슈티에서 러시아 문학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하고 루마니아 잡지에 처음으로 시를 실었다. 1948년 빈에서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가 나왔지만 회수하고, 1952년 공식적인 첫 시집인 『양귀비와 기억』을 시작으로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1955) 『언어격자』(1959)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1963) 『숨전환』(1967) 『실낱태양들』(1968)을 펴냈으며, 사후 『빛의 압박』(1970) 『눈의 부분』(1971) 『시간의 농가』(1976) 등이 출간되었다. 1958년과 1960년에는 독일 문학계의 주요 문학상인 브레멘 문학상과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후 반유대주의와 보수주의 경향이 만연했던 서독 문학계에서 첼란은 “관심과 경탄을 불러일으키며 이목을 끌지만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고 그 자신도 그것을 원치 않는” “외래종Exot”의 존재였다. 급기야 비평가들은 ‘현실과 거리가 먼 시’ ‘이해할 수 없는’ ‘은유로만 가득한 시’를 쓰는 시인으로 손쉽게 꼬리표를 붙여버렸고, 이 ‘난해성’이라는 그릇된 평가에 대해 첼란은 단호히 저항했다. “쓰인 단어 하나하나가 현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하지만 아니, 그들은 그런 말을 원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치 수용소에 대해 출판된 최초의 시들 중 하나이자 20세기 유럽 시의 표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 그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죽음의 푸가」조차 처음에는 혹평과 모욕을 견뎌야 했다. 독일어로 시를 쓰는 유대인 시인으로 첼란이 독일 문단에 받아들여지기까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골 사건Die Goll Affäre’으로 칭해지는 표절 시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초현실주의 시인 이반 골의 시를 번역한 첼란이 그의 시를 표절했다는 이 의혹은 근거 없음으로 밝혀졌지만, 나치에게 부모를 잃고 자신도 홀로코스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로 공포와 고통에 시달린 그에게 또다른 상처를 입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첼란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럼에도 언어였다. 비인간적인 역사를 살아내며 ‘리얼리스트’로 “현실에 상처 입고도 현실을 찾으면서”(브레멘 문학상 수상연설문) 그것을 말 하나하나에 새겼다. ‘미화하지 않고 시적인 것이 되려 하지 않는’ 언어로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경악을 말했고, 시가 침묵으로 향해 가는 전후의 경향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미-더이상은-아님’에서 ‘그래도-아직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에게 드리웠던 난해성, 비의秘義의 그늘을 걷어낸 자리에, 언제나 ‘너’에게로 향하는 시, 대화와 만남에서 시의 본질을 찾았던 시인이 있다.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은 부코비나를 떠나 부쿠레슈티와 빈에 머물다가 파리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시를 썼고 스스로 죽음을 택해 그곳에 묻혔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를 시로 기억하고 당대의 몰이해에 시로 저항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실존을 증명했던 파울 첼란, 오십 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한 번도 독일에 ‘살았던’ 적 없이, “부모를 죽인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시를 썼던 파울 첼란은 이제 아우슈비츠 이후 가장 중요한 독일어권 시인으로 횔덜린, 릴케와 나란히 기억되며, 그의 시는 사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다.
시를 닫고, 시를 열고:
시인이 남긴 것
『파울 첼란 전집 5』는 파리 유고에서 나온 시를 추려 모은 것이다. 『빛의 압박』 출간을 불과 석 달 남겨두고 센강에 투신한 첼란은 생전에 500편 가까운 시의 출판을 직접 결정했으며. 사후 출간된 『눈의 부분』과 『시간의 농가』를 포함한 476편이 유고로 발견되었다. 그중 218편이 파울 첼란 전집의 마지막 권을 이루고 있으며, 같은 시이지만 제목이나 구두점, 시행, 시구에서 차이를 보이는 시 12편을 부록으로 덧붙였다.
출판되지 않은 시들은 첼란의 모든 작품 시기에 걸쳐 존재했다. 유고 중 일부는 출판을 고려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고, 생애 마지막 이 년의 유고 중에는 ‘출판하지 말 것’ ‘절대 출판하지 말 것!’ ‘출판할 수 없음’ 등의 딱지가 붙은 작업노트 초고도 있었다. 그럼에도 시들을 없애지 않고 정리해 보관해둔 것, 출판 금지와 보존, 모순으로 보이는 이 둘 사이에서 ‘하나의 마지막 의지’를 실현시키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다. 마르바흐 독일문학기록보관소, 스위스 문학기록보관소의 유고, 유족과 지인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유고를 수합한 다음 미완성, 불명확한 것을 배제한다는 큰 기준 아래 각각의 경우에 세심하게 접근해 전집에 포함시킬 최종 작품을 추리고, 골 사건의 영향으로 첼란이 시마다 기록해둔 날짜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했다.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세상에 없다. 그가 유대인이고 그 시의 언어가 독일어라고 해도.” 파리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첼란이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생전에 내놓은 수많은 시가, 또 유고로 남은 시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표지에 ‘유작’이라 적혀 있다, 언니야. ‘시집으로 묶이지 않은 시’와 ‘흩어져 있는 시’와 ‘쓴 시기를 알 수 없는 시’…… 이거 완전 반칙이다, 언니야. 시들을 끌어안은 큼지막한 목차 제목들이 이미 ‘시’라 하는 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으니 말이다, 언니야. “다시 읽어보는 첼란의 시들. 무시무시 섬뜩 아름다움.” 2011년 5월 4일 언니는 파울 첼란의 시집을 읽고 있다 했었지. 그리고 이 시집을 번역하는 와중이라며 문득 이런 메일을 보내온 날도 있었지. “철새처럼 다시 만나면 좋겠다, 그곳이 어디이든.” 이 책과 함께하는 동안 덜 외롭기는 했을 것 같다, 언니야. 그러나 더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언니야. 파울 첼란의 시들이 삶과 죽음에서 뜨겁기보다는 차갑기를 배우게 하니까 일찍이 내 고픔은 또 그에 있으니까 나는 이 시집을 “아마포의 떠오름 속” 주되게 등장하는 두 단어에 밑줄을 긋고 또 긋는 일로 내 배움을 다한 것도 같다, 언니야. “시간이 문지방말을 하는 곳에,/ 천년이 젊게 눈雪 속에서 올라오는 곳에,/ 방랑하는 눈眼이 제 놀라움 속에서 쉬고,”라 할 적에 떴다 감는 일로의 ‘눈眼’과 있다 없음의 ‘눈雪’은 얼마나 차가워서 또한 뜨거운가 말이다, 언니야. 2015년 6월 3일 메일 속 언니는 이런 당부를 남겼지. “드디어 파울 첼란 번역을 다 끝내고 몇 자 적는단다. 민정아 앞으로 있지, 내 책이 나오면 저자본은 내게 두 권만 보내고 나머지 저자본으로 나오는 책들은 가난한 도서관이나 알바하느라 공부하느라 지갑이 얇은, 하지만 책을 읽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주렴. 책이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던 시절을 나도 너무나 오래 보내서 문득 그 생각이 들더라.” 언니에게 약한 나를 종종 들켜왔지. 언니의 시가 연약한 나를 종종 세워왔지. 우리는 누구나 쉽게 어디로든 던져질 수 있는 주사위 같은 존재들. “단 한 번 가을에 돌은 푸르러진다”라는 파울 첼란의 한 문장을 달아날까 읽는 즉시 베껴 써본 이 가을에 이기적인 나는 글쎄 나 살겠다고 이 구절을 또한 훔친다, 언니야. “눈물자국의 가장자리에서 배우렴/ 사는 것을.” 그리하여 오늘부터 나는 이 구절을 섬길 테다, 언니야!
김민정(시인)
▶ 언론평
그리하여 하나의 유일무이한 시적 우주로 가는 문이 열린다. 뷔혀마가진
난해하다는 그릇된 평가를 받은 이 작가가 놀랍도록 현실적인 동시에, 시적으로 독창적이고 타협 없는 자기-, 세계 경험을 마지막 철자 하나하나까지 정확한 단어로 담아낸다. 만하이머 모르겐
파울 첼란의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흥분되고 비교할 수 없는 말의 너비를 발견하는 일이다. 레벤스아르트
파울 첼란 전집은 새로운 발견으로 초대한다. 어둠의 한가운데서도 동시에 유토피아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 디 타게스포스트
파울 첼란의 시는 번역 불가능성의 가장자리를 맴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 버금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번역자들은 첼란의 어둠에 싸인 비애를 옮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껴왔다. 그 자신이 이미 재능 있는 시 번역자이기도 했던 첼란은 시를 “병 속의 소식”에 비유했다. 어쩌면 그는 시란 곧 번역이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뉴욕 타임스
나치 수용소에 대해 출판된 최초의 시들 중 하나이자 20세기 유럽 시의 기준이 된 대표작 「죽음의 푸가」부터, 불가해한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첼란의 모든 시는 생략적이고, 중의적이고, 쉬운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세계를 위한 언어를 다시금 고안해 독일어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뉴요커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후 유럽 문단의 가장 혁신적인 모더니즘 시인 중 하나인 파울 첼란. 20세기의 전쟁과 공포 이후 그는 시로 나아가는 새 길을 열었다. 첼란 그 자신처럼 그의 시는 겁먹고 상처 입은 생존자다. 보스턴 리뷰
▶ 옮긴이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한 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가 뮌스터대학교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 『박하』, 동화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을 펴냈고,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가을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고집으로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오늘의 착각』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