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한국적 서정의 독보적 경지를 선보이며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박용래 시인의 시전집과 산문전집, 평전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울타리 밖」을 비롯해 「겨울밤」 「저녁눈」 「점묘」 등의 명시들로 확고한 문학사적 평가를 얻고 후배 시인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지만, 그의 문학성이 온전히 갈무리된 전집이 미비한 점은 오랜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정본 백석 시집』 등의 작업으로 시 정본 연구의 면밀함을 인정받은 고려대 고형진 교수가 수년간의 자료 조사와 연구 끝에 내놓은 『박용래 시전집』 『박용래 산문전집』, 그리고 그의 문학적 일대기를 담은 『박용래 평전』은 시인이 생전에 발표한 시와 산문 작품, 미발표 원고, 편지 등을 망라하고 시인에 대한 전기적 사실과 증언 등을 두루 참조하여 박용래 시인의 문학세계를 폭넓게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 문학세계의 모든 것
박용래 시인은 1925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문인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입사했으나 은행 업무에 대한 환멸과 시에 대한 열망으로 3년 만에 그만두었고, 그뒤 몇 차례의 짧은 교직 생활을 제외하고는 줄곧 시쓰기에 전념했다. 1955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6월호에 「가을의 노래」, 1956년 1월호와 4월호에 「황토길」과 「땅」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그는 등단 13년 만에 첫 시집 『싸락눈』을 간행하고 이듬해 제1회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으며, 1975년 두번째 시집 『강아지풀』, 1979년 세번째 시집 『백발의 꽃대궁』을 펴냈다.
박용래의 시는 짧은 시행 안에 풍경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면서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이 다가온다. 여기에는 함축적인 이미지와 엄격한 언어 조탁에서 비롯된 그의 독특한 회화적 형식미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를 박용래 시인은 스스로 ‘점묘의 기법’이라고 부른 바 있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겨울밤」 전문
일체의 감정을 배제하고 극단적일 만큼 간결한 형식을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응축된 시적 감흥을 담아내는 이러한 방법은 박용래 시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사라져가는 가난하고 가여운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깔려 있다. 그것은 때로는 아득한 고향을 그리는 슬픔으로, 때로는 소박한 사물들을 들여다보는 다정한 눈길로 드러난다. 생전 어느 자리에서고 자주 눈물을 보여 ‘눈물의 시인’으로 불렸던 박용래 시인은 그 눈물을 고이 모아 그 정수를 시로 세공해냈다. 사랑하는 모든 것에 대한 다정과 스스로에 대한 엄격과 염결이 그의 시를 지탱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날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부여扶餘, 고향故鄕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고향」 전문
이처럼 전통적인 서정시의 가락에 섬세한 언어로 세공한 독자적인 형식을 입혀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어온 박용래 시인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그 시적 기법과 정신의 폭을 넓혀나가던 중 1980년 11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에 대한 지나칠 만큼의 엄격함으로 등단 이후 25년 동안 이백 편이 채 안 되는 작품만을 남긴 과작의 시인이었던 만큼 시인의 때 이른 죽음은 한국 현대시사의 큰 안타까움이 되었다.
박용래는 백석을 비롯해 이장희, 윤동주, 이육사, 오장환, 박목월 등의 시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의 작품에 원용되는 이들의 시와 그가 산문에서 직접 언급한 시인들의 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바다. 특히 박용래 시인이 백석 시의 애독자였고 「우유꽃 언덕」 「그 봄비」 등의 시에 백석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드러난다는 고형진 교수의 지적(『박용래 평전』, 111~115쪽)은 박용래 시인의 시적 계보를 확인하는 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점이다. 개별 시 작품뿐 아니라 시인의 산문과 전기적 사실을 종합할 때 얻어지는 이와 같은 발견과 통찰은 한 시인의 문학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정돈된 자료와 저술이 긴요한 까닭을 잘 보여준다. 박용래 시인이 남긴 모든 시와 산문, 그리고 그의 시적 생애를 아우른 세 권의 책은 그러한 발견을 위한 자산이자, 그의 시를 사랑하고 또 새롭게 읽어나갈 이들 모두에게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박용래 시세계의 길잡이
『박용래 시전집』에는 시인이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그의 사후에 발표된 유고작, 그리고 시작 노트에 메모된 미발표 작품 등 모두 208편의 시가 실렸다. 1980년대에 출간된 시전집에는 실리지 않았던 등단 전후의 발표작과 미발표 유고작 등 지금까지 확인된 박용래 시인의 작품 전체를 망라한 완전한 형태의 시전집이다. 전집의 본문은 첫 시집 『싸락눈』을 비롯해 『강아지풀』과 『백발의 꽃대궁』에 수록된 작품을 각각 1~3부에, 첫 시집 이후의 발표작 가운데 시집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을 4부에 실었다. 시 창작뿐 아니라 시집 발간 과정에서도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시를 선별한 시인의 의도를 존중하여, 그가 첫 시집을 묶으면서 제외한 등단 이전과 직후의 발표작들은 미발표작과 함께 부록으로 따로 묶었다. 1부 ‘싸락눈’을 시집의 차례에 따르지 않고 시인이 『강아지풀』에 재수록한 작품을 앞세운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박용래 시전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인의 최종 수정본을 정본으로 삼되 수정 전의 모든 판본을 부록에 싣고 수정 대목을 명시해 그 개작 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박용래 시인은 문예지 등에 발표한 시를 시집에 묶거나 다른 지면에 재수록할 때마다 크고 작은 수정을 가했고, 때로는 원 작품이 거의 흔적으로만 남을 정도로 새로 쓰다시피 한 경우도 있다. 그러한 작품의 수정 내력을 한눈에 살펴봄으로써 극도로 단출한 형태를 중시한 박용래 시인의 시적 지향을 엿보는 동시에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완성도를 높여가는지를 흥미롭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