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시리즈
한국 문학의 눈부신 결산
소설집 9종, 앤솔러지 시집 1종 출간
이 책은 경기문화재단 주관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 그들의 작품을 시리즈로 출간하는 기획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올해 출간되는 시리즈는 9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한 소설집 9권, 13명의 시인들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시집 1권으로 구성돼 있다. 온몸으로 건져 올린 발칙하고 싱싱한 언어들, 시대를 감싸 안는 빛나는 감수성이 오늘의 소설, 시의 면면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올 한 해 우리 문학의 눈부신 결산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안락한 미래와 욕망의 집을 좇다―「산책」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산책」은 서울 강남에 사는 언니 윤경이 수도권 변두리 신도시로 이주한 동생 여경의 집을 방문해 단지 내를 함께 산책하는 이야기이다. 작품이 전개될수록 ‘산책’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강화된다. 여경은 강남구 역삼동 브랜드 아파트로 이주한 언니 윤경의 이십이 평 집에 대해 “강남 하꼬방 같은 데”라고 힐난하고, 윤경은 신도시 삼십사 평짜리 여경의 집에 대해 “변두리 싸구려 집”이라고 폄하한다. 윤경은 “편안한 미래”를 위해 지금 힘들어도 견디지 못하고, “언젠가 번듯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해버린 듯한 동생 여경이 못내 마뜩잖다.
여경도 그걸 처음 봤을 때 같은 생각을 했었다. 잎자루가 공처럼 둥글게 부풀어 물고기의 부레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안에 공기가 들어가 부레옥잠이 물 위에 떠오를 수 있게 한다.
“꽃이 일 년에 딱 하루 핀대. 꽃말은 승리.”
하루짜리 승리라. 여경의 말을 듣고 윤경은 그리 생각했다. 그토록 짧은 것을 승리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이 무얼까. _22쪽
윤경이 보기에 여경은 현실감이 떨어지는 구석이 있다. 애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현실감이 떨어져서 애를 안 낳은 건가. 애가 있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대출을 받든 어쩌든 어떻게든지 서울에, 집값 오를 곳에 붙어 있어야지. 교육이며 집값이며 생각하면 죽을 각오로 강남에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_27쪽
윤경과 여경, 두 자매가 이렇듯 신경전을 벌이는 까닭은 ‘가난’의 기억 때문이다. 태흥사라는 사찰에서 공양주 노릇을 한 할머니와 접선하듯 만났던 유년의 가난했던 기억은 두 자매에게 망각하고 싶은 상처로 남아 있다. 가난의 트라우마는 두 자매에게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같은 부모에게 나서 비슷하게 성장하고 별반 차이 없이 출발했는데 윤경은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지만 여경은 변두리 싸구려 집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윤경은 몇 년 뒤 집값이 더 오르면 평수를 조금씩 늘려 또 이사를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번듯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 가능성으로 지금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여경은 아예 그 가능성이 없지 않은가. 늙어서 고생 안 하고 초라해지지 않으려면 지금 좀 힘든 게 나은 게 아닐까. _32쪽
「산책」은 ‘서울 강남’과 ‘변두리 신도시 아파트’라는 두 공간의 대비를 통해 집에 대한 우리 안의 일그러진 욕망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윤경과 여경, 두 자매는 과연 “편안한 미래”를 마주할 수 있을까.
상실과 외로움을 넘어 ‘자기 돌봄’으로―「경유지에서」
두번째 단편 「경유지에서」에서는 상실과 외로움의 시간을 견디며 사는 두 남녀를 통해 어느 곳에도 쉽게 정주하지 못하고, ‘경유’하듯 사는 삶의 불안정성을 만나게 된다. 낡고 오래된 동네의 골목에 사는 주인공 ‘이화’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영어 학원에 등록한 후, 충동적으로 원어민 강사 ‘에릭’에게 자신의 주소지를 건넨다. 그후 두 사람은 한동안 동거를 하다 헤어진다. 에릭은 “뜨내기 알바생”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사람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소비하고 준비하지 않고, 뭐 그런 기발하고 바람직하지 않고 그래서 누구나 꿈꿔보는 그런 일이 뜬금없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화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금방 울음 혹은 웃음이 터지거나 혹은 오줌이 찔끔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화는 수업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_45쪽
이화는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았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 집에서 저토록 동물적이면서 커다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생명의 기운을 느끼는 것. 낡고 오래되고 늙어, 같이 망하자고 삐걱거리며 속삭여대는 마룻바닥을 대부분 차지한 에릭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누워 있던 것처럼 힘차게 코를 골았다. 인간이 저렇게 생동감 넘치는 생물이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_48쪽
작가의 진술에 따르면, 이화는 깊은 슬픔과 상실의 시간을 맞아 자신을 철저히 방기하고자 한다. 어쩌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외로움의 시간이 더 깊어진 것일 테다. 하지만 자기 인생의 궤도를 이탈하고, 무방향으로 내달리려는 이화의 시도는 결국 인생이란 어차피 ‘혼자’라는 사실을 더 강화할 뿐이다. 작품의 뒤에서 이화가 에릭에게 엄마 이야기와 개 이야기를 정성껏 써서 보내는 메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이화는 “모든 것들이 지겹고 무얼 하든 어디 있든 어차피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이 점은 에릭 또한 다르지 않다. “여기가 일곱번째 경유지”로 선택한 에릭의 경우 이화와의 만남에서도 여전히 삶이란 ‘경유지’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실제 이화는 에릭에게 긴 메일을 보내고 난 후 예전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는데, 더이상 인생을 방기하며 ‘살던 대로’ 살지 않으려는 태도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작더라도 중요하다. 자기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은 타자를 돌볼 줄 아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는 애초에 뜨내기 같았던 에릭의 첫인상을 새삼 상기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갈 사람. 이화는 역시나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흡족해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이 집에서 더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_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