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재능 있는 작가가 아니라 선 하나, 음영 하나가 어떤 차이를 낳는지 아는 예술가”(<뉴욕 타임스>)라는 찬사와 함께 주목해야 할 작가의 등장을 알린 장편소설 『설탕을 태우다』가 출간되었다. 인도계 미국인 애브니 도시는 어머니의 고향 인도 푸네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과 조모의 알츠하이머 진단 경험에서 소설의 단초를 발견했고, 어머니와 딸의 복잡한 애증관계를 중심으로 모성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완성된 초고는 2012년 미발표 원고를 대상으로 하는 티버 존스 남아시아상에서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7년의 집필을 거쳐 2019년 ‘흰 무명옷을 입은 여자Girl in White Cotton’라는 제목으로 인도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이듬해 영국에서 지금의 제목으로 소개되어 독자들에게 공개되기 3일 전 “감정을 쓰리게 자극하는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기억에 각인될 통렬한 소설”이라는 평과 함께 부커상 후보에 올랐고, 『울프 홀』 『튜더스, 앤불린의 몰락』에 이어 세번째 부커상 수상에 도전하는 영국의 대표작가 힐러리 맨틀을 제치고 데뷔작으로 최종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았으며, 최종 수상작 『셔기 베인』에 이어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는 등 그해의 또다른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애증으로 얽힌 모녀관계를 서늘하고도 거침없이 그려낸 이 작품에 쏟아진 관심은 계속 이어져 2021년 여성문학상 후보, 2022년 펜/헤밍웨이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스펙테이터>, NPR 선정 2020 올해의 책, <뉴욕 타임스> 선정 2021 주목할 만한 책 100에 이름을 올리며 애브니 도시라는 이름을 평단과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26개 언어로 번역 출간이 결정되기도 한 이 작품은 살만 루슈디의 소설 『한밤의 아이들』을 각색한 동명 영화 감독 디파 메타가 각본과 연출을 맡아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고,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런던 초연을 앞두고 있다.
이것은 사랑과 집착, 증오와 배신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와 나의 엄마다
평생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안타라는 엄마가 고통을 겪을 때마다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우주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원인과 결과의 합리적 질서가 회복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제 수지를 맞출 수 없게 되었다. 엄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기억을, 안타라를 방치함으로써 학대했던 과거까지도 모두 잃어가게 된 것이다. 불안해진 안타라는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머릿속은 하루하루 흐려져간다. 오래전에 죽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이십 년 동안 살아온 집 주소를 잊어버리고, 가끔씩 딸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뿐더러 화가인 딸의 작품을 찾아 불태우는 엄마는 이제 의학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안타라에게 엄마가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자신에게 부과되는 모든 책임을 거부하며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남들의 시선이나 세간의 예의는 안중에도 없었고 전통에 따라 맺어진 혼인관계도, 남편과 가정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삶도 견디지 못했다. 안타라가 태어난 뒤에도 아이에게 줄 젖을 그대로 흘리며 날마다 밖으로 돌아다닌 엄마는 급기야 집을 탈출해 어느 아슈람(영적 수행을 하는 인도의 수도원)에서 구루의 연인이 되었다. 시부모의 요구에 마지못해 안타라도 데려갔지만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나 몰라라 했고, 안타라는 매일같이 집단적 광기에 가까운 수행자들의 기이한 행동을 지켜보며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아슈람을 나온 두 사람은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고, 결국 엄마의 부모님이 두 사람을 거두지만 안타라는 안정을 누릴 새도 없이 쫓기듯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안타라가 숨막히는 생활을 마치고 그곳에서 돌아온 뒤에도 엄마는 떠돌이 예술가와 사랑에 빠져 안타라를 방치했다.
이제 안타라는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화가로도 첫걸음을 내디딘 성인이지만, 엄마와는 별개의 독립된 자아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쳐 안착한 이 삶에서도 지독했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결핍과 고통을 안긴 엄마를 죽을 때까지 원망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평생 그리워해왔던 엄마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지난날을 잊어가는 엄마를 보며 생각한다. 한순간도 나를 돌본 적 없는 엄마를 나는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돌려주지 않은 이 여자를 나는 어째서 이토록 사랑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딸에게 나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어딘가 망가진 구석이 있다.”
엄마와 딸, 벗어나기 어려운 그 복잡한 애증관계
“내가 엄마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라는 첫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애브니 도시가 그리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다감한 애정이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갈망과 원망이 뒤섞인 양가감정에 사로잡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상대에게 집착하는 애증의 관계다. 평생 나를 경쟁자이자 적으로 여겨온 엄마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보이자 안타라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내게는 여전히 생생히 남아서 고통을 안기는 지난날을 잊어가면서도 어떤 말이 나를 상처입힐 수 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는 엄마, 이제 내 존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고 지워버리려 하는 그 여자를 향한 분노. 그럼에도 내가 애정을 갈구했던 엄마가 껍데기만 남고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그런 안타라의 시점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사이 소설은 두 사람 사이를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끊임없이 엄마를 원망하고 의심하는 안타라의 이야기도 확고한 진실이라기보다 그 자신의 입장에서 재구성된 기억이며, 병의 증상으로만 여겼던 엄마의 기이한 행동은 안타라가 은밀히 감춰두었던 과거에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도 아이의 부모가 된 안타라는 스스로에게서 엄마를, 딸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마주한다. 안타라에게 “나는 네가 내 인생을 망칠 줄 알았다”라며 독한 말을 퍼부었던 엄마처럼 자신의 딸이 지겹다는 생각을 하고 무의식중에 아이를 해치는 상상에 빠진다. 여성이 스스로를 지우고 전통적인 역할로만 기능하기를 강요받는 굴레 속에서 외조모와 엄마의 관계가 엄마와 안타라에게, 그리고 안타라와 딸에게 기묘한 유산처럼 전해지는 것이다. 마치 안타라의 아파트 거실 사방을 장식한 거울에 사물이 끝없이 복제되는 것처럼, 안타라가 진행중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날 그린 초상화를 그대로 묘사한 또 한 장의 초상화가 매일 생겨나는 것처럼. 그 가운데 안타라는 파괴적인 관계의 반복을 두려워하면서도 아이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초조함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도 잊으려 했던 오랜 비밀을 알게 된 엄마가 자신과 딸의 안전에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마주하자 은밀한 결단을 내린다.
나는 엄마와 딸의 역할이 서로 맞바뀌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의 과거와 미래가 기묘하게 공명하는 순간에 대해 쓰고 싶었다. 누군가의 딸인 것과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이 있을까. 애브니 도시
애증으로 엮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이미 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뤄졌지만, 『설탕을 태우다』가 탁월한 점은 그 관계를 표현한 방식이다. 작가는 “이제껏 누구도 이토록 절묘하고 대담하게 표현한 적 없던 방식”(<워싱턴 포스트>)으로 모녀관계를 써내려가며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그리고 불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을 집요하게 목격하게 한다. “좋은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불안한 이에게 위안을 주고, 편안한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텔레그래프 인디아>)
▶ 본문에서
내가 엄마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 내가 엄마 때문에 힘들었기 때문에 그뒤로 엄마가 겪은 고통이 나에게는 일종의 보상으로 느껴졌다. 우주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원인과 결과의 합리적 질서가 회복되는 일이라고. (9쪽)
나는 지난 일을 생각하면 날마다 부글부글 끓는데 엄마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니 너무나 부당하다. 나는 종이에, 서랍에, 방에 기록과 메모와 생각을 남겨놓지만 그래 봐야 엄마의 기억은 하루하루 흐려진다. (78쪽)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둘 중 하나가 자기 몫을 하고 있지 않은 양, 양쪽을 잇는 다리 끝을 제대로 붙들고 있지 않은 양 어딘가 망가진 구석이 있다. 어쩌면 우리 둘이 같은 쪽에 서서 텅 빈 공허를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둘 다 같은 것에 굶주렸고 그래서 공허함이 되레 두 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슴에 구멍이 있는데 그 상처가 영영 아물지 않는지도 모른다. (142~143쪽)
나는 엄마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엄마의 몸안에 내가 아는 엄마가 없을 때 어떻게 엄마를 돌볼 것인가? 자기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엄마가 또렷이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지금처럼 엄마를 돌볼 수 있을까? (146쪽)
엄마는 내 그림을 망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 그것들은 내 삶의 순간과 기억의 기록이자 나의 성장, 엄마와 구분되는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했다. 어쩌면 엄마가 바란 것은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 집, 내 신혼집이 사라지기를, 내가 깃들 수 있는 곳, 내가 안전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사라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 결혼을 태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삶을. (152쪽)
점진적으로 엄마를 잃게 될 거라고 한다. 결국에 어머니는 내가 이사 나온 집, 익숙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껍데기가 될 것이다. (198쪽)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억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같이 기억을 만들고요. 또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이미지에 맞게 기억을 재가공하기도 하죠.” (252쪽)
내가 엄마를 망가뜨린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도 더 잘 지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떻게 해야 엄마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이 아기에게 같은 짐을 지워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냥 헛된 바람일지도. (298쪽)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 엄마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엄마가 그렇게 끔찍하게 못된 여자만 아니라면, 내가 다시 엄마를 정상궤도로 데려올 텐데. (303쪽)
나는 지금도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건 오직 아기를 보기 위해서다. (312쪽)
엄마는 나 없이 이야기를 쓰려는 걸까? 나를 지우려는 걸까? (320쪽)
나는 결코 엄마한테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엄마는 내 골수 안에 있고 나는 결코 저항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323쪽)
▶ 추천의 말
복잡하고도 유별난 엄마와 딸의 관계를 솔직하고도 가감없이 사실적으로 그려낸 강렬한 작품. 감정을 쓰리게 자극하는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기억에 각인될 통렬한 소설이다. _2020 부커상 심사위원단
애브니 도시는 그저 재능 있는 작가가 아니라 선 하나, 음영 하나가 어떤 차이를 낳는지 아는 예술가다. 모든 문장이 날카롭고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며 헛되이 쓰인 단어도, 군더더기도, 감춰야 마땅한 과잉도 없다. _뉴욕 타임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마음은 언제 이기심이 될까? 엄마와 딸에 대해 서글프고도 저릿한 진실을 담은 소설. _가디언
애브니 도시는 이제껏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쓴 것이 아니다. 이제껏 누구도 이토록 절묘하고 대담하게 표현한 적 없던 방식으로 썼다. _워싱턴 포스트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가, 혹은 그래야만 하는가. 소설이 제기하는 이 의문에 전율하며 읽는 내내 경외감과 분노, 연민을 느끼게 된다. _NPR
처음에는 이음매가 느껴지지 않는 스타일리시한 문체에 사로잡혔다가, 끓어오르는 감정에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_옵서버
총알처럼 관통하는 표현들. 중독성 있고 짜릿한 에너지로 펄떡이는 작품이다. 모든 문장이 보석 같으며,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스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할 것이다. _미시간 데일리
소설 속 엄마와 딸은 같은 은하계의 궤도를 돌며 시종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별이다. 모든 페이지가 독자를 동요하게 하지만, 좋은 예술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닐까. 불안한 이에게 위안을 주고, 편안한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_텔레그래프 인디아
애브니 도시는 두려움을 모르는 작가, 잔혹하고도 지독하리만큼 지적인 작가다. 나는 이 작품에 완패했고 동시에 고무되었다. _멩 진(소설가)
애브니 도시는 외과의사처럼 정밀한 손놀림과 날카로운 지성을 가졌다. 칼날처럼 빛나는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작품. _엘리자베스 길버트(소설가)
▶ 옮긴이 홍한별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살려고 한다. 옮긴 책으로 『햄닛』 『진실 프로젝트』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노 본스』 『클라라와 태양』 『도시를 걷는 여자들』 『밀크맨』 『달빛 마신 소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돌봄과 작업』(공저) 『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가 있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