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신유물론까지
철학 개념 속에 녹아든 철학사가 전해주는 지적 자극과 흥분
개념은 ‘생각을 가공하는 재료’다. 개념이 없으면 생각을 못 하고 생각이 없게 된다. 저자는 이를 개념의 ‘소극적 정의’라 부른다. 철학에도 그러한 의미에서 고유한 생각의 재료가 되는 개념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소극적 정의의 개념으로서 철학의 큰 줄기를 이루는 16개의 개념을 사유한다. 가장 기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장의 '존재와 생성'을 비롯하여 ‘원리와 원인’ ‘하나와 여럿’ ‘유한과 무한’ ‘필연과 우연’ ‘주체와 타자’ ‘앎과 무지’ ‘덕과 정의’ 등은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누구나 한번쯤 이들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을 법한 개념들이다.
저자는 이 개념들을 어떻게 살펴나가야 하는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이 개념들이 최초로 등장하게 된 고대부터 시작하여 중세와 근대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파악되는지를 보여주고, 다시 현대철학의 최첨단 논의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파악하는지를 살핀다. 이 과정에서 현대 과학과 수학 등 언뜻 철학과는 방향이 달라 보이는 학문 분야의 논의들이 어떻게 철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지를 알 수 있다(제2장 원리와 원인, 제4장 유한과 무한, 제5장 필연과 우연 등).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가장 최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유물론(New Materialism)’까지를 아우르며 주요 논의들을 돌아보는 가운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개념들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한편, 이를 다루는 저자의 철학적 사고의 자유로움과 깊이를 엿보게 된다.
밀도 높은 철학적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틀에 갇히지 않은 개념 설명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틀에 박히기 쉬운 개념 설명을 자유로운 에세이 스타일을 통해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자칫 나열식이나 연대기 순이 되기 쉬운 설명 형식을 배제하고, 철학사에서 변곡점이 될 만한 개념의 등장과 변모를 철학적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처음 이들 개념을 접하는 독자들을 위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예를 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자는 철학 개념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역사적으로 이들 개념이 다루어진 과정을 설명하고, 현대철학에서 꼭 알아야 하는 중요한 논의들을 심도 있게 소개한다.
모든 장이 밀도 높은 철학적 서술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책의 서술방식의 백미를 보여주는 부분의 예를 들자면 제5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필연과 우연을 다루면서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 스토아 철학, 원효대사, 흄, 유전학, 자크 모노, 리처드 로티, 알튀세르에 이어 가장 주목받는 현대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퀑탱 메이야수의 ‘원-화석’과 ‘선조성’ 개념, 기술철학자 육후이의 ‘사이버네틱 우발성’까지를 자유롭게 오간다. 저자는 각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우면서도 놓치기 쉬웠던 주요 논의를 꼼꼼히 짚어나가는데, 이 과정의 자연스러움은 철학적 사고의 명징함이 어떻게 뛰어난 산문으로 탈바꿈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의 소극적 정의와 적극적 정의를 아우르는
‘지혜’의 실천을 위한 책
이 책의 주 목적은 철학의 주요 개념을 둘러싼 역사적인 논의들을 살펴보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는 목표를 담고 있다. 철학이 사랑하는 대상이 지혜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지혜가 지식과는 달리 실천적인 의미를 가짐을 강조한다.
“예로부터 지혜는 지식과는 달리 실천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무릇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개념의 학문은 철학이다’라는 언명은 개념은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담고 있다. 즉 개념은 지혜가 되어야 한다. 보다 담대하게 말한다면 모든 학문적 개념은 철학적 지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념에 대한 적극적 정의다. 소극적 정의와 이 적극적 정의는 철학에서 늘 함께 간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소극적 정의로서의 개념이 적극적 정의로서의 개념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9쪽).
그러므로 이 책은 지식의 전달만을 바라지 않는다. 이 책의 모든 장은 일상을 해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기르기 위한 실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는 ‘철학, 개념’이라는 부담스러워질 수 있는 제목 앞에서 자칫 주눅들 수 있는 독자들을 위해 자유로운 독해를 할 것을 요청한다. 각각의 장은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관심사에 따라 독립적으로 읽을 수도 있다. 또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려고 유별나게 노력하지 말고 읽어나가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상들을 잘 간직하고 그 다음으로 전진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가이드를 받으며 철학의 주요 개념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독자들은 개념들이 늘 윤리적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얻게 되는 철학적 지혜와 윤리적 깨달음은 독자들 각자가 나름의 기준을 성취할 능력을 일깨워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