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랜 시간 동안 더러운 이야기들은 어떻게 우리를 매혹했는가?
폭력과 타락을 통해 들여다보는 익사한 남자의 얼굴
여기, 한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는 출렁이는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다. 얼핏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다. 잠든 자의 얼굴. 그러나 사진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남자는 잠들어 있지 않다. 그는 ‘익사한 남자’다.
곧 묘한 설명이 이 사진에 따라붙는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남자의 얼굴을 주시한 이 사진의 제목은 바로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이다. 시체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그려냈다는 것일까? 강덕구는 진중권의 칼럼을 빌려 사진의 후일담을 풀어낸다. 사진 속 남자는 최초의 사진 매체인 ‘다게레오타이프’를 둘러싼 특허권 경쟁에서 패배한 작가, 이폴리트 바야르다. 그는 학술원 측의 부탁으로 사진 발명의 발표를 미루던 중 경쟁자인 루이 다게르가 사진 매체의 발명자로서 학술원의 인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그는 ‘익사한 남자’로 꾸민 자신을 촬영한 사진을 학술원에 보낸다. 사진 뒷면에 적은 메모에서 바야르는 자신을 ‘썩어들어가’는 시체로 비유한다.
『밀레니얼의 마음』에서 자신을 포함한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적 정서와 그 바탕을 그려냈던 작가 강덕구는 이번에 그가 몇 해에 걸쳐 쓴 글을 묶은 예술비평서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을 통해 어떻게 허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지 그려낸다. 여기서 허구란 신화와 문화를 비롯한 이야기, 좀 더 거칠게 한 덩어리로 그려내자면 ‘예술’을 지시한다.
이 책에서 강덕구가 다루는 예술 그리고 예술가 중 일부는 오늘날 여러 의미에서 ‘금기시’되는 것들이다. 위악과 의도적인 오독을 통해 역사에 구정물을 부은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부터, 백인 남성의 보편성에 기댄 유토피아를 그리다가 종래에는 미국 국회의사당 시위에 동참하게 된 애리얼 핑크와 존 마우스의 음악, 미투 운동에서의 폭로와 정치적 발언이 불러일으킨 불화 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경력이 끝난 스탠딩 코미디언 루이 C.K.의 시트콤까지. 강덕구가 말하는 예술의 우주는 정말이지 ‘사악하고 비천한’ 별자리들에 맞닿아 있다.
동시에 강덕구는 그들의 시대, 즉 “문화적 보편성으로 기능하던 백인의 세기”이자 “백인 남성 예술”의 시대가 근본적으로 끝났음을 설파한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어제와 내일이 맞물리는” ‘오늘’을 설명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그가 이 수많은 금기의 별자리들, 그리고 오늘날의 익사한 남자인 ‘문제적 인간’들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묻는다. 왜 우리는 더러운 이야기에 매혹되었을까? 그중 어떤 부분이 우리를 삶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인 것이며, 또 그들이 꾸린 역사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은 비주류 안에서도 주류와 비주류를 다시 나누는 강덕구씨의 조밀하고 집요한 시선이다.” -백민석(소설가)
백민석 소설가의 추천사가 말하고 있듯,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이 파고드는 예술 중 다수는 오늘날 ‘비주류’로 논해지기 쉬운 것들이다. 그러나 무한한 데이터와 디깅(Digging)의 시대에, 비주류 문화는 분명 전과 다른 위상을 갖고 있다. 인터넷망의 보급과 스마트폰의 대중화 등 기술의 발전은 분명 세계를 뒤흔들어놨고, 이는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문화예술의 향유자들은 전과 같은 방식, 즉 실제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소유하는’ 방식 외에도 예술을 ‘수집하는’ 또 다른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책 본문에서 말하듯 이러한 변화는 “사라진, 실종된, 은둔한” 예술작품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으며, 비주류라 불렸던 문화는 그 안에서도 착실하게 역사와 계보 그리고 각각의 정전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강덕구가 다루는 계보 속 이름들과 정전은 많은 이에게 낯선 것들이다. 물론 본문 곳곳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외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인 이창동, 홍상수나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 루이스 C.K. 그리고 지금 당장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을 플랫폼인 ‘아프리카TV’ 등을 사례로 뽑을 수 있겠다. 앞선 예시들만큼 잘 알려져 있진 않더라도 (흔히 말하는)‘시네필’들이나 문화예술에 관심이 깊은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영화평론가 정성일 또는 마크 피셔,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나 왕빙 역시 본문에서 주요한 한 장을 차지한다.
반면 러시아의 전 부총리이자 막후 설계자로 불리던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의 예명인 ‘나탄 두보츠키’나 음악인류학자 해리 스미스 같은 이름들은 대부분 사람에게 생소할 테다. 만일 이 둘의 이름을 아는 독자가 있더라도, 그가 한국의 인터넷 방송인인 커맨더지코와 BJ텐쿵의 이름까지 함께 알고 있을 확률은 낮다. 단순하게 국가와 분야로만 나누더라도, 이 낯선 이름들은 서로 아예 다른 구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은 이토록 낯선 이름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맥락을 창조해낸다. 전혀 다른 몸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흐르던 피를 하나의 혈관에 수혈하는 것이다. 하나의 혈관에 뒤섞인 서로 다른 피는 필연적으로 어떤 병증을 일으킨다. 강덕구는 바로 이 병증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이 병증이 어떤 식으로 우리 세계 곳곳에 스며 있는지 논하자고 권한다. 그에게 이 병은 고통을 일으키는 요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난 세기를 벗어나 다음 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진화의 동인이다.
여러 색깔의 피가 흐르는 새로운 몸은 과연 어떻게 움직일 것이며, 어느 세상과 맞닥뜨리게 될까? 강덕구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거침없이 이름들을 배치하며 서로 맞닿게 한다. 그는 인터넷 방송인 커맨더지코의 리얼리티 영상,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를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의 「자유」와 함께 대조한다. 2023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음반 《뽕》으로 4관왕에 수상했으며, 프로듀서로 참여한 뉴진스의 앨범 《New Jeans》로 잇따라 2관왕을 수상한 아티스트 250의 앨범을 각 방향에서 살피며 데이비드 린치가 그리는 ‘소도시 풍경’과 맞대기도 한다. 강덕구의 비평에서 이러한 관계 맺기는 무척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에게 비평이란 낯선 이름들을 소개하고 그에 관해 논설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름들과 그 관계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직조하는 방식을 제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내면’은 어떤 모습인가?
영화와 음악, 예술이라는 거짓말로 마주해내는 ‘추문’과 그 너머
그러므로 강덕구에게는 그가 거론하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만큼이나, 자신(혹은 세상)과 그것이 연결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가 책의 1부인 ‘오늘’에서 시네필이나 힙스터, 디거 등으로 불리는 문화예술 향유자를 중심으로 다루는 이유 역시 그러한 방식에 있다. 종종 그가 “덥수룩한 머리, 패딩, 거뭇거뭇한 수염” 등으로 묘사하는 시네필이나 “타투”를 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에 들른다고 말하는 힙스터들은 지금의 문화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이들이다. 백인 사회에서 흑인 문화를 착취하는 유독성의 존재로 정의되었던 ‘힙스터’들은 한국에 유입되며 ‘멋쟁이’ 유의 의미로 변환되었지만, 그 어원이 문화적 아카이브에서 어떠한 ‘취향’을 발굴해내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엔 변화가 없다. 백인 힙스터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흑인 문화와 제3세계의 문화적 타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규정하고 착취했다. 반면 시네필들은 “선생님”들이 세운 만신전에 자신들만의 신화적 우주를 구성하여 특정한 취향을 산출했는데, 이전 세대 시네필리아의 권위에 기댄 취향은 새로운 균열을 내는 대신 기존의 제도를 공고하게 하는 데만 기여하고 있다.
강덕구는 자신이 이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서울아트시네마 라운지에 모여든” 시네필의 조건에 자신 또한 부합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스스로가 힙스터들이 발굴해낸 수많은 음악의 청취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오래된 취향의 역사, 스노비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제도적 상상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시간대에 균열을 내자고 제안한다. 바로 이 균열에서 강덕구라는 비평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여기서 다시 ‘이름들’로 돌아가보자.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비주류 안에서 또다시 주류와 비주류를 파고드는 그의 세계에서도 유난히 낯선 이름들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란히 등장하는 두 이름, ‘박광성’과 ‘이정상’이 그것이다. 실상 독자들이 이 이름들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 이들은 강덕구의 개인적 삶에서만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이 실명인지 가명인지조차 독자는 가늠할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박광성과 이정상이 각각의 방식으로 강덕구의 비평적 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뿐이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박광성은 강덕구의 삶에 최초로 나타난 비평가다. 그는 2007년 등장하여 강덕구 생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자리 잡았다. 박광성은 토피아학원 옆 빌딩 2층 돌계단에 앉아 강덕구에게 이토 준지의 만화 『소용돌이』 줄거리를 간추려 설명했다. 강덕구는 이토 준지가 그려낸 그림보다 더 강력하던 그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달팽이 인간들이 나오는 악몽을 선사했다고 회고한다. 강덕구는 이 악몽이야말로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진귀하고 근사한 기능”이라고 일컫는다. 이어 그가 이 책에서 펼쳐내는 거짓말이 우리 독자에게 또 다른 악몽을 꾸도록 만들길 기원한다.
박광성이 강덕구의 삶에서 최초로 마술적인 비평을 보여줬던 존재라면, 에필로그의 주인공 이정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희망과 모험을 만들어내는 영웅이다.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또한 삶으로 오롯하게 새로운 경로를 펼쳐간다. 그는 울란바토르의 공원에서 니체의 책을 읽다가 불현듯 나타난 흰 조랑말을 바라보는 남자다. 그는 부모가 건네준 대학 입학비로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몽골의 ‘캐쉬미어’를 판매하려 하지만 한 푼도 벌지 못한다. 그는 20대 내내 행동주의자로서 각종 실패를 겪는다. 혹은 실패를 만들어낸다. 그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과 싸웠으며, 이명박 정부에 반기를 들어 ‘시적 정의’라고 적힌 표어를 들어올렸다. 학교 도서관에서 훔친 책을 학생회관에 거주하며 읽었다. 이제 새로운 가족을 꾸린 그를 강덕구는 “결코 감기지 않는 눈”으로 부른다.
기존의 비평서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러한 강덕구의 글쓰기가 영 당혹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가 마술적인 비평가라 부르는 이들, 혹은 자신의 영웅이자 희망이라 부르는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거장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매혹된 예술적 우주만큼이나 직접 몸담은 현실의 구체적 형상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이해한다면, 그가 왜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특정한 예술작품을 ‘보이콧’하는 평론가를 비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왜 비평가라면 무릇 ‘보이콧’ 대신 윤리적·정치적 기제를 ‘폭로’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거기에 따라오는 행위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마지막으로 왜 그것을 “영화평론가-시민의 직업윤리”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다.
“여전히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그것을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복기하는 이가 여기 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조영일(문학평론가)
강덕구의 비평을 읽는 일은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무엇으로 삶을 지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을 함께 보는 것이다.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서 그가 ‘익사한 남자’들, 즉 지나간 ‘백인의 세기’ 나 ‘폭력의 시대’를 회고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다. 그는 자신과 사랑에 빠진 “사악하고 나쁘며 비천한 모든 것”을 부정한 채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분명 그것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안다. 더불어 그들이 지녔던(지닌) 약점과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왜 돌아보아야 하는지, 강덕구는 자신의 삶과 거기서 마주친 작품 그리고 작가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실상 그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혹은 그 교차점에) 있기 때문이다. 어제를 알지 않는다면 오늘에 머물 수 없다. 오늘에 자리 잡지 못한다면 내일로 넘어갈 수도 없다. 익사한 이의 자화상이란 표현은 그 자체로서는 모순적이되, 우리가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바라보아야 할 풍경을 묘사한다는 목적에서는 더없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어제를 보는 그의 시선엔 애정과 회고만큼이나 강력한 공격의 태도가 함께 배어 있다. 그는 오늘날의 계보와 정전을 만든 권위와 기능을 ‘공격!’한다. 그는 선배 평론가를 공격한다. 현대의 거장을 공격한다. 자리를 굳힌 윤리의 태도를 공격한다. 동시에 이들을 그저 조롱하거나 지우려 하는 현재의 세태들 비판한다. 강덕구는 이전의 지침을 소거하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세대건 ‘권위’와 ‘제도’ ‘기능’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음을 알고 있다. 그가 권위나 제도라는 개념을 지우는 대신 선택하는 건 그것들을 “불태우고” 그리하여 “타오르는 물질”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현상들을 목도하는 일이다. 이는 결국 서로 다른 피를 담은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일과 같은 노선에 있다.
강덕구가 거론하는 익사한 이들,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여러 면모에서 도발적이다. 때로는 의도적인 모순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는 홍상수의 작품이 지닌 걸출함을 말하면서도 그가 세태에 보이는 예술가적 태도를 비판하고, 정성일의 기능이 오늘날 시네필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도 그가 보여준 대화의 의지에 감사를 보낸다. 그는 공격하고 또 싸우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덕구의 글은 싸움을 통하여 더 넓고 다채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그곳에는 한국인만이 가진 더럽고도 아름다운 전통, 타자를 착취하는 자들이 발견했던 빛나는 음악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의 지워지지 않는 유산들이 남아 있다. 이 세계야말로 강덕구가 우리에게 권하고자 하는, 또 그가 합류하고자 하는 ‘악몽과 거짓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