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란 무엇이고, 누가 여성혐오자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기원하여 어떤 위력을 전파하며 어떻게 존속하는가? 『다운 걸: 여성혐오의 논리』는 페미니스트 도덕철학자 케이트 맨이 본격적으로 ‘여성혐오misogyny’를 분석한 철학서다. 이 책은 논쟁이 되어왔지만 그럼에도 진정 논리적으로 탐구된 적은 없었던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주제를 분석철학의 논증법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여성혐오는 남성이 대부분의 여성에 대해 느끼는 증오나 적개심을 일컫는가? 여성혐오는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가? 여성혐오와 성차별주의는 어떻게 다르기에, 성차별주의가 완화될 때에도 여성혐오는 계속될 뿐 아니라 심화되는가?
『다운 걸』에서 밝혀내는 여성혐오의 본질과 기제는 여성혐오자들의 허위를 까발릴 뿐 아니라, 여성혐오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해석에도 통찰적 반론을 제기한다. 여성혐오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라는 ‘순진한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도, 여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비판되어서도, 남성 지배나 가부장제, 유해한 남성성에 국한된 초점으로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그것은 남성을 양육하고 위안하고 돌보면서 그들에게 성노동・감정노동・재생산노동을 제공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여성들, 남성을 도덕적 몰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남성의 도덕적 기준에 근거해 도덕적으로 과실이 있는 존재로 비난받는 여성들을 통제하고 징계하고 축출하려는 법 집행의 일환이다. 요컨대 “여성혐오는, 여성의 종속성을 강요하고 단속하는 한편, 남성의 지배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60)
케이트 맨의 논증은 철학 이론과 추상적 개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이 책은 여성혐오 살인 사건, 여성 대상 범죄의 판결, 여성 유명인을 대상으로 한 비난과 징계, 강력한 여성 정치인을 향해 표출되는 혐오표현 등 현실의 사건 사고뿐 아니라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다양한 문학작품과 영화 등 문화 콘텐츠까지 분석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실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여성혐오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철학의 방법과 도구를 제공한다.
‘아낌없이 주는 그녀’
―비대칭적 지원 관계와 여성에게 의지하는 남성들
날마다 소년은 그 나무를 찾아와 잎을 따서 왕관을 만들어 쓴 채 숲의 왕 놀이를 하고는 했다. 소년은 나무줄기에 오르는가 하면 가지에 그네를 매달았고 사과를 따 먹었다. 둘은 숨바꼭질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소년은 나무 그늘 아래서 잠을 청했다. 소년은 나무를 사랑했다. (…)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으나…… 실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널리 읽히는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에서 나무가 “그녀she”라는 점은 이 그림책이 은유하는 바를 생각할 때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소년에게 나뭇잎을 주고 나뭇가지를 주고…… 시간이 흘러서는 줄기와 그루터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준다. 나무는 몸과 자원만 준 게 아니다. 소년이 심심해할 때 놀아주고 소년이 의기소침해할 때 기운을 북돋워주고 소년이 낙담할 때 위로해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소년이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대접을 받아도 늘 같은 자리에 있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을 상징적이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소년이 불합리한 요구를 할 때조차 나무가 선을 긋지 않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용인되고 마는 설정에 우려를 표한다. 『다운 걸』의 결론을 섬뜩하고도 기이한 이 ‘나무(그녀)’ 이야기로 시작한 저자는 묻는다. “나무는 그 모든 세월을 지나는 동안 정말로 행복했을까? 만약 아니라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일까? 소년은 그녀에게 보답을 뭐라도, 도대체 뭐 하나라도 준 적이 있을까?”(458)
여성혐오의 본질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 여성에게 비대칭적인 도덕적 지원자 역할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13)는 게 저자의 귀띔이다. 즉, 여성의 종속과 노동, 여성의 관심과 돌봄, 여성의 인정과 사랑이 그 위치를 다지고 유지하는 데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특정한 사회 역할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여성을 단속하며, 여성에게서 도덕적 재화와 자원을 뽑아내는 동시에 여성의 부재와 태만과 배반을 빌미로 불만을 표시하는 적대적 권력 체계가 바로 여성혐오인 것이다. 우월한 위치, 즉 “권리는 권리대로 누리면서 제약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남성의 지위”는 그남이 “특정 여성들을 바라보고 대우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14). 여성혐오자에게 여성의 역량과 서비스는 남성들에게 진 빚으로 여겨지며, 이를 제공하지 않는 여성은 응당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는―약자를 보살피고 배려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않는―사람으로 간주된다. 역사적으로 남성이 누려온 지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차지하려 드는 여성은 제 몫이 아닌 권력을 부당하게 탐하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역할 위반을 들어 여성의 도덕성은 깎아내려진다. 맨은 여기에 여성을 권력에 굶주린 무정하고 지배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없이 베풀고 보살피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심리에서 오는 일종의 박탈감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여성혐오에 빠진 이들에게 여혐은 마녀사냥이라기보다 도덕성 회복운동moral crusade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여성혐오를 지탱하는 원동력은 여성을 증오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여성혐오는 순수하게 구조적인 현상, 즉 규범이나 관행, 제도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구조에 관련된 현상일 수 있다.
여성혐오는 그 잠재적 표적이자 피해자인 여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여성혐오의 진정한 의미는, 여성혐오자가 타인의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통제할 목적으로 취하는 행위로 귀결된다. 여성혐오는 특정 사회계층에 속한 여성들을 (가령 인종이나 계급, 나이, 체형, 장애, 성적 지향, 시스젠더인지 트랜스젠더인지 여부처럼 다소 구체적이고 완벽한 설명이 가능한 특징에 입각해) 겨냥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이 젠더화된 인간 계층의 구성원으로서 적절한 규범이나 기대를 저버리거나 그에 도전할 때 맞게 될 적대적인 결과를 무기로 그녀를 위협한다. 이러한 규범에는 그남이 누려야 할 (추정상의) 권리와 그녀가 지켜야 할 의무가 포함된다.(61)
여성혐오의 ‘논리’: 철학적 사유
이제는 여성혐오가 철학적으로 의미심장하고 심리학적으로 복잡하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라는 점이 드러났다.(80)
논의는 여성혐오의 의미와 작동 방식을 짚어보는 데서 시작된다. 여성혐오는 때로 순진한 개념naïve conception으로 판가름되어왔다. 이 개념으로 볼 때 여성혐오란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는 개인 행위자들의 속성이다. 순진한 개념으로 볼 때 어떤 사안이나 누군가의 태도가 여성혐오인지, 여성혐오자스러운지를 판단하려면 행위자의 태도에 관한 깊이 있고 완결성 있는 심리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이렇게 따지자면 여성혐오의 피해자 입장에서는 특정인이나 특정 사안이 여성혐오적이라는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는 반면, 여성혐오의 혐의를 받는 행위자 입장에서는 혐의를 벗기 위해 굳이 애쓸 필요가 없어진다. 맨은 순진한 개념이 “여성혐오를 불가해할뿐더러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현상으로 만들어버린다”(59)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간다. “난 여자 안 싫어하는데? 나 우리 엄마도 사랑하고, 여자 좋아해” 따위의 해명으로 여성혐오의 혐의를 벗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여성혐오자도 어머니를 사랑할 순 있다. 그리고 당연히 누이나 딸, 아내, 여자친구, 여비서를 사랑할 수도 있다. 여성혐오자라고 해서 모든 여성을 증오할 필요는 없단 얘기다. 심지어 거의 모든 여성을 증오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특히 증오하는 대상은 거침없이 말하는 여성이다.”(109)
이렇듯 현실적으로 여성혐오는 여성 전체보다는 오히려 특정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다(지위 유지를 위해 이들을 뺀 나머지 여성―가부장제의 법과 규범에 충실한 여성―은 오히려 칭송받아야 한다). 관심과 섹스와 사랑을 주지 않는 여자들, 집안을 돌보지 않고 남자를 공경하지 않는 여자들, 못마땅할 정도로 잘나가는 여자들, 남자가 독점하던 권력을 차지하려는 여자들…… 끝없이 나열할 수 있는 이 목록은 여성혐오가 매우 다양한 조건하에 여러 형태의 편견이 얽히며 표출되는 사회적 감정임을 말해준다. 결국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이, 남성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형태의 적개심을 맞닥뜨려야 하는 사회체제 전반의 속성인 것이다. 또한 그 메커니즘과 방식은 대단히 우발적이고 다양하다.
『다운 걸』의 분석은 이러한 여성혐오의 논리를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다음과 같은 이점을 제공한다.
• 여성혐오를 인식론적 접근이 가능한 분명한 현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에 비해 순진한 개념은 여성혐오를 자칫 신비화할 위험성이 크다.
• 여성혐오를 정치적인 본질과 동떨어진 다분히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당연하고도 중심적인 징후로 이해하게 한다.
• 여성들의 교차적 정체성을 고려하여, 여성혐오가 여성들에게 작동하는 방식을 다방면에서 들여다볼 여지를 제공한다. 적개심을 전달하는 행위자들과 사회적 메커니즘뿐 아니라 그 같은 적개심의 성질과 분량, 강도, 경험, 영향까지 두루 살펴보는 것이다.
• 사회라는 바다를 항해하며 여성이 맞닥뜨리는 적대적 반응을 결정적으로 설명할 심리학적 근거를 찾기보다는 적대적 반응 자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혐오를 사회체제적 현상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러한 적개심은 개인 행위자들의 심리 상태에 직접적으로 근거할 필요가 없다. 각종 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환경 또한 여성들에게 유독 험악하거나 ‘냉담하거나’ 적대적일 수 있다.
• ‘여성혐오’라는 용어의 의미를 폭넓게 확장시켜 시민사회의 활동과 보조를 맞추는 한편, 어느 정도는 여성혐오의 사전적 의미와도 더 유망한 방향으로 조화를 이룬다. 겉보기에 이질적인 사례들 사이의 공통적 특징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 사회적 논란을 빚은 여성혐오 사안에 관한 여러 질문에 합당한 답변을 제시한다.
• 여성혐오와 성차별주의의 명확한 대조를 가능케 한다.
여기서 특히 3장 「성차별주의와의 구별」과 5장 「인간화와 증오」, 6장 「남성을 면벌하다」는 분석철학자로서 저자의 사유가 돋보이는 장들이다. 저자는 인종주의 계급차별 장애인차별 등 만연한 차별 기제들을 설명했던 철학 이론과 한나 아렌트, 버나드 윌리엄스 등 수많은 철학가의 사상을 역동적으로 경유하며 흔히 혼동되는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철학적 이해의 틀을 제시하는 한편, 여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기 때문에 여성혐오가 발생한다는 널리 퍼진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여성의 인간성, 너무나도 인간적인 여성의 특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임을 폭로한다. 또한 여성혐오의 거울상이라 할 수 있는 ‘힘퍼시himpathy’(남성에 대한 편향적 관용 내지 과도한 동정심)는 맨이 처음 제시한 용어로,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 ‘전도 유망한 청년’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성폭행 가해 남성이 처벌을 면하는 이유 등을 통합적이고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 한편 여성 정치인과 연예인, 작가 등 실존하는 여성혐오 피해자들의 사례와 여성혐오 총기난사 사건, 명예살인, 가족학살, 강간 등 현실의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더불어 성적대상화·맨스플레이닝·트롤링·캣콜링·여혐누아르·강간문화와 피해자 비난·허레이저(여성 지우기)·혐오표현·돌봄팔이·이중 잣대 등 여성혐오에 맞물리는 다양한 대중 개념을 해석하는 철학의 언어는 여성혐오라는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에 지성의 쾌감을 선사해주는 대목을 마련한다.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른 성별 간에 우리가 익히 알거나 알 수도 있는 차이를 넘어서는 차이가, 때로는 최신 과학의 증거를 거스르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사이에 차별을 두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혐오는 전형적으로 좋은 여성과 나쁜 여성을 구별한 다음 후자를 벌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는 하나의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바로 가부장제 사회질서를 유지하거나 복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차별주의가 오직 이성에 호소한다면, 여성혐오는 포악성을 띤 채 어떤 사안을 강압적으로 몰아붙인다. 성차별주의가 어설픈 과학과 맥을 같이 한다면, 여성혐오는 도덕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성차별주의가 실험복을 걸친다면, 여성혐오는 마녀사냥을 벌인다.(155-156)
여성은 언제나 누군가의 누군가다. 한 사람의 인격체일 때는 드물다. 그러나 그 원인은 그녀가 사람으로 여겨지는 법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인간성이 서비스 노동과 사랑, 충실함이라는 형태로 타인들에게 제공돼야 한다고 여겨진다는 데 있다.(296)
공정함에 대한 여성혐오자의 인식(혹은 인식부족)은 자아도취적 망상에 근거한다. 그러한 망상에는 가부장제의 광기와 규칙이 얼마간 내포되어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보통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삶에서 여성들에게 인간적 제공자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여성의 인간성을 베어버리지 않거니와, 기실 그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인간성은 그녀의 관심을 요구하고 그녀의 신체에 집착하며 그녀가 그남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복종하기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그녀를 모욕하는(혹은 그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 나는 그 행동들이 가장 근원적으로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의식에서, 그러니까 도덕적 재화와 자원을 (다른 누구보다 남성에게) 제공하는 자라는 위치를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데서 기인한다고 믿는다.(299-300)
연쇄 성범죄자는 남성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회체제는 그들을 방어해주고 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쪽으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여성의 관습적 재화—가령 여러 형태의 사회적이고 성적인 노동 중에서도 특히 관심과 주의력—를 여성에게서 얻어내는 쪽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대본과 도덕적 승인, 물질적 박탈이 임신중단 반대운동부터 캣콜링과 강간문화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또한 세상에는 남성의 관습적 지위와 권력, 권위를 여성이 탐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경고하려는 기질과 메커니즘도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증언적 부정의와 맨스플레이닝, 피해자비난, 그리고 피해자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방법들이 해당된다.(361-362)
이 장 앞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지배적인 남성의 이익을보호해주고 그들의 평판을 유지시켜주려는 기질이 강하게, 그러면서도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인식하에, 그남이 결백한 이유와 그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여성들이 믿을 만하지 않은 이유에 관해 어떤 구실이라도 찾으려 기록을 뒤적거릴 것이다. 아니면 대안적으로는, 피해자들이 앞에 나서는 이유가 권익을 지키는 데 있지 않음을 어떻게든 증명해내려 노력할 것이다. 마치 그들이 현저하게 다른 특정 사례나 정황에서도 같은 결정을 내리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363-364)
물론 여성혐오라는 현상의 배경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젠더가 각각 보유한 물질적 자원의 이질성과 더불어 억압과 지배, 소수와 다수의 교차적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사회의 지배체제와 제도, 관료주의적 메커니즘 등을 허용하고 강제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저자는 여성혐오가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분석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도, 화이트 페미니즘(백인 중산층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인정하며 때로 인종, 계급, 성정체성과 성적지향 등 여성혐오를 둘러싼 교차성의 그물을 복합적으로 의식한다. 말하자면, 저자의 분석은 시종일관 엄격하면서도 때때로 다층적이고 맥락적이다. 그렇게 철저하고 세밀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이 책의 전망이 어두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적 자각이나 회복력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는, 때로 우리의 명백한 도덕적 믿음과 정치적 신념에 뚜렷하게 반하는 위력이 전파되고 활성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25)는 「서문」의 예언적 지적은, 「결론」의 마지막 문장들에서 한층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는 결코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자신이 했거나 하지 않은 모종의 행동이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한 짓은 아니라고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의 죄목은 단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 나무가 소년을 사랑할 때처럼 “아주, 아주 많이, 심지어 그녀 자신보다 더” 그 남자를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 그뿐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그런 사랑이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남의 관점에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큰 죄인지도 모른다. 어떤 여성에게는 여성혐오인 것이, 그래서 일부 남성에게는 시적 정의의 구현인지도 모른다.(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