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문학의 정수가 담긴 첫 장편소설
『소송』 『성』과 더불어 ‘고독’ 삼부작으로 불리는 『실종자』는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로, 다른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 미완성작으로 남았으나 카프카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친구이자 유고를 편집해 소개한 막스 브로트가 1927년부터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펴냈으나, 1983년 독일에서 카프카 육필 원고에 기초해 발간된 비평판 이후 카프카가 일기에 쓴 원제대로 ‘실종자’로 바뀌었다. 이 소설의 첫 장 「화부」는 카프카 생전 1913년 단행본으로 발표되어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15년 폰타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1911년 말에 쓴 초고 200매가량을 폐기하고 싶다고 밝힌 후 본격적으로 이 소설 집필에 매달린 건 1912년 가을부터 1914년 가을까지다. 그사이 첫 단편 「선고」와 대표작 중 하나인 「변신」을 썼으며, 끝 무렵에는 『소송』 집필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이 책의 1장 「화부」와 「선고」 「변신」을 함께 엮어 ‘아들들Die Söhne’이라는 제목으로 펴내자는 제안을 출판인 쿠르트 볼프에게 하기도 했다. 세 편 모두를 관통하는 카프카 문학의 핵심 테마(아버지 권력과 길항하는 아들의 서사이자 관계로부터의 고립)를 첫 장편 『실종자』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바, 그가 몇 번이나 좌절과 중단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구현해내고자 한 문학세계의 맹아가 담겨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청년은 아메리카 여정 내내 “거의 모든 곳에서 그의 존재가 실패”(크라카우어)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는 만큼 “희망은 금지되는 게 아니라 금지되지 않기에, 희망에 가장 처절하게 고통을 가하는 작품”(모리스 블랑쇼)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사회에서 표류하는 ‘현대의 시시포스’
점점 관계로부터 밀쳐져 사라져가는 자의 실존
이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카프카의 작품들 중에서도 아주 정교한 서사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제목이 붙은 6장, 제목이 없는 2장, 그리고 미완성 장들(3장)로 구성된 이 소설의 첫 장면부터 주목을 요한다. 즉 뉴욕으로 입항하는 배에서 점점 짐꾼들에 의해 ‘난간까지 밀쳐진’ 그의 시선에 처음 들어온 것은, 우뚝 솟아난 팔로 횃불이 아닌 ‘칼을 든 자유의 여신상’이다. 자유와 정의, 희망과 꿈의 신세계로 진입하고 정착하기 위한 도정은 과연 어떻게 될까? 이곳에서 과연 카를은 새 출발을 하고 성장할 수 있을까?
‘카프카적인 시작’을 알리는 이 첫 장면에서 보다시피, 17세의 카를 로스만은 고향 프라하에서 하녀를 임신시킨 문제로 부모가 그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막 뉴욕항에 입성하면서 앞으로의 어두운 아메리카 여정을 노정한다. 거기서 그는 기계화된 문명과 테일러주의로 돌아가는 미국 사회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상류사회에서부터 자본주의 밑바닥에 있는 계급까지 두루 만나고 겪는다. 배에서 처음 만난 해고 위기라는 억울한 상황에 처한 화부를 돕는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서, 원칙과 효율을 추구하며 미국 사회에서 정재계 고위직 인사로 성공한 외삼촌이 이끄는 기업사회의 경영후계자 자리, 삼촌의 눈 밖에 난 한 번의 실수로 얼토당토않게 내처져 어느 호텔에서 겨우 운좋게 얻어낸 엘리베이터 보이로서의 최말단직, 부랑하는 실업자이자 이민자 무리(로빈슨과 들라마르슈)와 함께 성매매로 자본을 축적한 가수 브루넬다의 하인을 거쳐, “누구든 환영한다”는 오클라하마 야외극장의 기능직 채용시험에 ‘니그로’라는 이름으로 응하여 알 수 없는 기차에 오르며 끝내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자’로까지, 그의 존재는 여러 변곡점을 거칠수록 차츰 희박해진다. 선실, 별장, 호텔, 극장 채용시험장(경마장)이라는 주요한 서사 공간에서 이뤄지는, 카프카의 특징인 법정 재판을 방불케 하는 ‘심문’ 장면들은 아메리카 사회로의 진입과 정착, 관계와 소속에 대한 카를의 욕망이 철저히, 첩첩으로 적나라한 실패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서사적 긴장과 멜랑콜리를 더한다. 횡단면상으로는 유럽의 고향에서 미국 내 이방 세계로의 추방을, 종단면상으로는 다양한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만나며 번번이 희망 없는 추락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행 배, 외삼촌의 집과 사무실, 그린 씨의 별장 속 미로 같은 공간, 옥시덴털호텔의 주방과 엘리베이터, 브루넬다의 방으로 점점 옥죄듯 폐쇄되어가는 닫힌 구조에서 갑자기 마지막에는 극장의 채용시험장인 경마장에서 오클라하마행 기차로 넘어가 아득히 열린 공간 구조로 넘어간다. 마지막 장면은 곧 현대인의 불가해한 삶의 터전에 대한 확장된 우화로도 읽힌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마지막 부분을 유토피아적 여정으로 끝맺음하려 했다고 오독했으나, 1915년 9월 30일자 카프카의 일기는 정반대로 구상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로스만과 K, 죄 없는 자와 죄 있는 자, 결국 둘 다 똑같이 처벌되어 죽임을 당한다. 죄 없는 자는 보다 손쉽게, 때려눕혀지기보다는 옆으로 밀쳐지는 식으로.”
카프카는 미국 땅에 한 번도 발을 붙인 적이 없으나 이 소설을 통해 “가장 현대적인” 아메리카를 보여주고자 했다. 당시의 여행 책자나 보고서, 사진이나 종종 접했던 영화 등 2차 문헌을 참고하며 대도시의 마천루, 파업과 교통 혼잡, 선거 캠페인 및 사무실 노동 현장, 기계화된 통신 및 운송시설 등을 당대의 유럽인의 시각에서 비교해보고 연구해나가면서 자기만의 형상화에 골몰했다. 발전과 성장에 목매던 현대의 최첨단, 아메리칸드림과 신세계에 대한 그 허상을 깨부수고 있는 『실종자』는, 그로테스크하고도 몽환적인 색채가 가미된 서술로 부조리한 현실과 권력구조의 폭력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카프카는 이 작품으로 “영원히 소속감이라는 바위를 헛되이 굴리는 현대의 시시포스”(카뮈)를 창조해냈다.
해석의 여러 단서를 제공하는 해제와 원전에 충실한 번역
2024년 6월 3일은 카프카 타계 100주기다. 카프카는 서구 문명의 몰락이자 인간 정신의 붕괴를 목도하게 한 제일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미국 사회를 모델로 이 작품을 썼다. 다양한 인종과 국적이 뒤섞인 현대의 최첨단 도시에서 그 전모는 알 수 없이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위로부터 아래로”(카프카) 겹겹이 위계화된 권력과 자본시장에 종속되어 기계 부품처럼 소외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실존에 대한 카프카식의 문제 제기는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이민자이자 표류자로서 한 젊은이가 어떻게 관계로부터 얼토당토않게 거듭 밀쳐져 점점 소속의 고리를 잃고 행방이 묘연한 실종자로 전락해갈 수밖에 없는지, 불가해하고도 부당한 폭력과 계속 마주하면서 어째서 말미에 희망 없는 사지로, 끝이 나지 않을 무의 세계로 사라져가고 마는지, 그 종적을 아주 정치하게 묘파해낸다.
이 책을 옮긴 이재황 번역가는 새로 정립된 비평판을 기준으로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의 원형을 비추어 짐작해볼 수 있도록 충실히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옮긴이 해설에 남겨놓았다. 이를테면 브로트 판과 달리 카프카가 오클라호마를 ‘오클라하마’로 일부러 표기한 것에서도, 주인공 카를 로스만의 이름이 갖는 상징성(‘말’을 뜻하는 ‘로스Roß’와 ‘남자, 사람’을 뜻하는 ‘만Mann’의 결합이 보여주는 반인반마 켄타우로스와의 비교)에서도 이 작품을 새롭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옮긴이는 카프카 문학의 핵심을 ‘부정성의 미학’으로 짚어내면서 이 작품을 두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서구 문명의 진보적 역사관과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20세기의 패러다임에 대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고 갈무리한다.
추천사
이 책의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영원히 소속감이라는 바위를 헛되이 굴리는 현대의 시시포스다. _알베르 카뮈
카프카에게 모든 사건은 야누스적인 모습을 띠는데, 한편에서는 아주 오래전 일어난 일로 보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주 최근 일어난 일처럼 현실성을 띠고 있다. _발터 벤야민
여기서 카를은 어리석게도 모든 일이 공정하고 품위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나, 정확히 그 어떤 요구도 충족되지 않으며 거의 모든 곳에서 그의 존재는 실패하고 있다. _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카프카의 웃음은 함정이며, 서커스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이다. 카프카는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다.
_질 들뢰즈
세계와 작품은 경쟁관계에 있다. 카프카는 이런 싸움, 이런 긴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_롤랑 바르트
카프카의 이야기들은 문학 가운데 너무도 어둡고 절대적인 파탄에 극단으로 못 박힌 작품들에 속한다. 희망은 금지되는 게 아니라 금지되지 않기에, 희망에 가장 처절하게 고통을 가하는 작품들이다. _모리스 블랑쇼
카프카는 권력 문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이자 권력의 온갖 양상을 체험하고 형상화한 작가다. _엘리아스 카네티
카프카가 쓴 글 중에 특별한 감동이나 놀라움을 주지 않는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_라이너 마리아 릴케
카프카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우행을 정확히 따라 하면서 삶의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놀이를 비웃는다. 보다 높은 동기에서 나온 그 애처로운 웃음이 우리에게 남은 최선의 것임을 생각한다면, 카프카의 이 시선에서 나온 작품들이야말로 가장 읽을 가치가 있는 세계문학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_토마스 만
고뇌에 찬 20세기의 위대한 고전 작가.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점은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멜랑콜리다. ‘삶은 불가해하다’는 누군가의 말이 틀리지 않은, 아주 드문 경우가 여기 있다. _쿠르트 투홀츠키
카프카의 예술은 모든 문학을 뛰어넘어 독자의 심장을 강타하는 진실을 드러낸다. _발터 무슈크
『실종자』는 (자정에 열두 번 종이 치면 주인공이 벌을 받게 되는) 요정 이야기의 요소를 지닌 모험소설이지만, (오클라하마 야외극장이 상징하는) 실낙원과 복낙원의 신화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인구가 밀집한 미국이 무인도를 대체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_마르트 로베르
본문에서
이미 속력을 늦춘 배가 뉴욕항에 들어서자, 열일곱 살의 카를 로스만은 진작부터 지켜보던 자유의 여신상이 갑자기 더 강렬해진 햇빛을 받은 듯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녀의 유혹에 넘어가 임신을 시킨 일로 그의 가난한 부모가 그를 미국으로 보낸 길이었다. 칼을 든 여신의 팔은 마치 새로 돋아난 것처럼 우뚝 솟아 있었고 여신의 형상 주위로는 싱그러운 바람이 불었다. (9쪽)
“그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죠.” 카를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미지의 대륙 연안에 정박한 어느 배의 꺼림칙한 밑바닥에 있다는 느낌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만큼 여기 화부의 침대 속은 고향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15쪽)
하지만 이 모든 광경의 뒤편에는 뉴욕이 있었고 마천루의 수십만 개 창문으로 카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 이 방에 들어오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20쪽)
이렇게 적敵은 예복 차림에 당당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장부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보나마나 화부의 급여 지급 목록과 작업 보고서였을 것이다. 그는 넉살 좋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분을 무엇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모두의 눈을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일곱 사람은 과연 모두 그의 편이었다. (30쪽)
“스스로를 지켜야 해요.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말해야 하고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진실을 전혀 알 수 없어요. 내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해야 돼요.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더이상 당신을 전혀 도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더니 카를은 눈물을 흘리며 화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갈라 터지고 시들시들한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대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포기해야 하는 어떤 보물을 대하는 듯했다. (45쪽)
외삼촌은 갓 들어온 이민자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가령 이 훌륭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대신 며칠씩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서 길 잃은 양들처럼 거리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지! 일에 쫓기며 사는 뉴욕의 분주한 하루를 하는 일 없이 고독을 씹으며 넋이 나가 바라보기만 하는 생활은 유람객에게나 허락되고 또 어쩌면 무조건은 아니어도 한번쯤 권해볼 만한 것일 수 있겠지만, 이곳에 머물러 살아갈 사람에게는 파멸의 길이라는 것이다. (51쪽)
외삼촌과 카를이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수습사원 하나가 살그머니 들어가 그동안 작성된 종이를 가지고 나왔다. 가운데의 넓은 공간에서는 일에 쫓긴 사람들이 끊임없이 왔다갔다했다. 아무도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인사는 금지였다. 누구나 앞서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뒤따라 바닥을 보면서 되도록 빨리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거나, 손에 들고 뛰듯이 걷는 바람에 펄럭이는 서류에서 아마 단어나 숫자 몇 개만 눈으로 파악하는 중이었다. (59쪽)
텅 빈, 평탄한 그 길이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서 강렬한 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폴런더 씨의 친절한 모습과 그린 씨의 혐오스러운 모습이 흐릿해졌고, 그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이 방에서 벗어나 이 집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폴런더 씨와는 이제 끝이라는 느낌이었고 그린 씨에 대해서는 전의가 느껴지긴 했지만, 사방에서 밀려든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가득 채워 그 타격으로 눈앞이 흐릿해졌다. (92쪽)
카를은 그들의 취약한 현재 상태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은 카를 로스만이고 독일인입니다. 이제 같은 방을 쓰게 되었으니 당신들의 이름과 국적도 말해주세요. 또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면, 늦게 온데다 잠잘 생각은 전혀 없으니 침대를 하나 내놓으라는 요구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내가 좋은 옷을 입었다고 언짢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완전히 빈털터리에 장래성도 없는 놈이니까요.” (114쪽)
새벽 네시가 지나자, 카를이 절실하게도 바라던 평안이 조금 찾아왔다. 그는 승강기 옆 난간에 무거운 몸을 기대고서 천천히 사과를 먹었다. 첫입을 베어 물자 진한 향이 물씬 풍겼다. 그러면서 식품저장실의 커다란 창문들로 둘러싸인 채광정 안을 내려다보았다. 창문들 뒤로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 송이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175쪽)
“그만둬.” 브루넬다가 말하면서 들라마르슈의 손을 막았다. “그는 우리 곁에 머물 거야.” 그러고서 그녀는 카를을 더욱더 세게 난간으로 밀어붙였다. 그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녀와 드잡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설사 드잡이에서 이긴다 해도 그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왼쪽에는 들라마르슈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이제 로빈슨이 있었으니, 그는 꼼짝없이 갇힌 셈이었다. (278쪽)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라고 번듯한 사무실에 채용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도 언젠가는 그런 곳에서 사무직원이 되어 자기 책상에 앉아 어제 아침 안마당들을 지나면서 보았던 그 사무실 직원처럼 마음 편히 한참 동안 열린 창문 밖을 내다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아예 가당치도 않은 희망은 아닐 것이다. (297~298쪽)
그러나 카를에게는 무척 유혹적인 내용이 벽보에 있었다. “누구나 환영합니다”라는 구절이었다. 누구나, 그러니까 카를도 해당되었다. 그가 지금까지 했던 일은 모두 잊혔고, 그 때문에 그를 비난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치스럽지 않은 일자리, 오히려 공개적으로 모집할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한 일자리에 그가 지원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원만 하면 그도 채용될 거라는 듯한 약속 역시 공개적이었다. (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