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계마다 숨어 있는 비밀을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작가 허은미와,
단단한 손끝으로 말을 건네는 화가 한지선이 다시 지어 올린, 아렴풋한 그 집
『파란 대문을 열면』
좁은 골목 안쪽으로, 층층이 펼쳐지는 계단을 하나, 둘, 셋, 넷 뛰어오르면 그 끝에 우뚝 서 있는 파란 대문이 보인다. 대문을 와락 열고 들어가면 자그마한 마당에는 널어놓은 빨래들, 복숭아나무, 감나무, 수돗가와 장독들. 집 안으로 들어가 쪼르르 올라가면 손바닥볕이 드는 다락방, 거기서 혼자 하던 이런저런 상상들. 그림책 『파란 대문을 열면』 속 아이의 걸음을 따라 한 겹씩 펼쳐지는 풍경의 모습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재개발로 인해 어느 날 살던 집을 떠나야 했던 주인공의 가족처럼,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는 행운이 없다. 때문에 드문드문 꿈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곳은 지금 사는 집보다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 우리가 살던 집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림책 『파란 대문을 열면』은 나의 무의식과 정서가 여전히 깃들어 살아가고 있는 그 집에 관한 이야기다. 단순한 향수나 빛바랜 추억담이 아닌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 곳, 삶을 향한 나의 긍지가 뿌리내린 그곳으로 들어서 본다.
“다락방 작은 창문으로 내다보면 온 동네가 다 보여.
아랫집 영수 목욕하는 게 보이고 집집마다 널어놓은 빨래들이 보여.”
그림책의 흰 화면 전체를 때로는 대담하게 가로지르고, 때로는 물씬한 감정으로 가득 채우며 서사를 풀어 가는 한지선 화가의 그림에서, 가장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반가운 세부들이다. 어느 집마다 다락방을 채우고 있던 오래된 책들과 잡동사니, 그때는 흔히 볼 수 있었던 뜨개 편물들이나 거실의 벽시계, 줄이 달린 전화기,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사물들이 이야기 속 세계를 구체적으로 지탱하고 있다. 주시점의 높이와 화각의 넓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가며 보여 주는 풍경은 보는 이들을 그 골목으로 데려다 놓는 듯하다. 와르르 달려드는 꽃향기나 하늘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던 저녁노을, 해질녘의 온도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특별한 장치나 거추장스러운 수사가 없는 담담한 문장들은 그림책 『파란 대문을 열면』이 서 있도록 하는 단단한 지반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작가가 살던 서울의 한 동네의 풍경과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진솔한 힘이 시각적 표현과 독자의 감정을 적절한 장력으로 이어 준다.
파란 대문 우리 집은, 어디에 있을까
허은미 작가는 그간 『진정한 일곱 살』 『불곰에게 잡혀간 우리 아빠』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진실들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위트 있게 전해 주곤 했다. 그것이 허은미 작가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해 온 이유이다.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때로는 설탕으로 감싸지지 않은 알약처럼 쌉쌀하고 때로는 사자마자 바닥에 떨어뜨린 아이스크림처럼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은 어쨌든 모두 삶의 다음 단계를 향해 걸음을 뗀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래서 낮꿈을 꾸다 갑자기 깨어나 버린 『파란 대문을 열면』의 주인공이 몸을 일으켜 어디로 향할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실로 드는 길고 노란 오후의 햇빛이, 테라스에 걸린 나팔꽃 화분과 액자들이 놓인 오래된 재봉틀, 아득한 꿈을 꾸다 깬 주인공의 머리꼭지를 따습게 쓰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