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감동, 매력적인 텍스트 분석,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세번째 평론집 출간
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83년 중앙일보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시와 문학평론을 병행하며 80년대와 90년대를 가로질러온 남진우씨의 세번째 평론집 『숲으로 된 성벽』이 출간되었다. 일찍이 신화와 이미지 분석에서 빼어난 성취를 이루어왔던 작가는 이번 평론집에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뛰어넘어 ‘텍스트를 어루만지는 연인으로서의 비평가’로 탈바꿈해 있다. 그것은 비평가의 성숙이자, 비평의 성숙이고, 한국 문학의 성숙을 증거한다.
남진우 비평의 핵심은 날카로운 지적 언어와 섬세한 감성 언어를 결합시키며 분석과 감동의 차원을 빚어내는 데 있다. 그 새로운 차원은 텍스트에 대한 지극하고도 겸손한 차원에서 출발한다. 릴케와 김현을 모델로 한 그 기다림은 그러나 결말이 없는, 끝나지 않는 무한한 기다림이다. 모든 텍스트는 독자를 호명한다. 그러나 그 호명에 응답하는 독자는 많지 않다. 더구나 그 독자가 비평가임에랴. 텍스트의 호출에 부응하는 순간, 남진우는 “분석과 평가”의 단계를 벗어나 “사랑과 열정”으로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 텍스트와 하나가 된다. 비평의 절정이다. “나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보다는 ‘욕망’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해체’하려 하기보다는 그것과 ‘결합’하고자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하여 이번 평론집에 실린 90년대 시와 소설의 현장에 대한 비평은 분석과 평가가 내포하고 있는 비평적 권위주의 대신, 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를 통해 텍스트와 함께 태어나고자 하는 창조적 비평의 한 모범을 선보이고 있다.
세기말/세기초, 새로운 천년에 대한 논의와 겹쳐지면서 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들도 다양한 지형을 그리고 있다. 남진우의 이번 평론집은 세기말의 한 가운데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학의 위기의 병증을 함께 아파하고 그 안에서 그 치유책을 모색한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씨는 “남진우 비평에는 신화를 빼앗긴 시대에 대한 절망의 계기가 있고, 그 불가능한 것, 부재하는 것을 향한 치열한 동경의 계기가 있다. 그것을 통해 비평이 제시하는 것은 개념적인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시적 비전이다”라고 말했다.
절망과 동경, 그 지극한 안타까움으로 어룽진 비극성의 미학
『숲으로 된 성벽』은 기형도의 시 「숲으로 된 성벽」에서 제목을 따왔으며,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이 텅 빈 세계에서’는 「공허한 너무도 공허한」 「시의 종말, 종말의 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기 세기말과 현대성, 생명주의와 허무주의, 댄디즘을 키워드로 삼아 세기말을 통과하고 있는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공허한 너무도 공허한」은 김현 비평의 현재성을 부각시키며 글쓰기의 본원적 의미를 강조한다. 나침반도 없고 항해도도 없는 상태인 이 검은 심연의 시대를 통과하는 방법이 그 검은 심연과 정직하게 대결하는 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특히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은 댄디즘이라는 매우 새로운 개념으로 90년대 한국소설을 정치하게 분석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2부 ‘세속도시의 시’에서는 전후 시인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대가의 풍모를 보여주는 황동규 시인의 35년 시작활동에 대한 조명과, ‘뿔과 구멍’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최승호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적 주제에 대한 탐구,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미완으로 끝나버린 기형도 시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이미지를 추적하고 있다.
3부 ‘세기말의 소설’에는 윤대녕, 신경숙, 채영주, 김영하의 소설을 통해서 세기말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건져올리고 있다. 4부 ‘리얼리스트의 성채’에서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강한 흡인력을 행사하며 우리 문학의 중요한 전범으로 자리한 신상웅 소설의 상징구조 연구, 송기원의 『여자에 관한 명상』, 박범신의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통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리얼리즘의 양상들을 천착한다. 5부 ‘저 너머의 부름’은 세 편의 외국 소설에 대한 분석으로 엮어졌다. 우리에게 영화로 더 잘 알려진 토마스 해리스의 인기소설 『양들의 침묵』, 국내 독서계에 열풍을 일으켰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에 대한 치밀하고도 매혹적인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세기말’을 넘어서 ‘시대’를 준비하는 통찰의 비평
『숲으로 된 성벽』은 세기말 개념이 주조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메시아적 현재 시간”으로서의 세기말이 아니라 “모든 발전과 진보의 신화는 무너졌거나 무너져가고 있”는 세기말. 난무하다시피 제기되던 주장이나 담론들도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더이상 문학이 문화의 중심이 아닌 세기말의 한 가운데에서 작가는 우리의 문학 현장을 뒤돌아보고 정리하면서 중요한 것은 세기말이 아니라 ‘세기초’라고 말한다. 문학은 무엇인가, 문학은 지금/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쓰기의 본원적 의미에 대한 끈질긴 질문만이 새로운 세기초를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작가는 강조하려는 것이다. “시대의 상처를 치열하게 앓되 글쓰기를 통해 육화시켜 드러내는 작업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김현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작가의 ‘세기말’ 비평은 명석한 분석의 차원을 넘어 깊이 있는 통찰이 빚어내는 눈부신 감동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