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들을 집적하고 있는 최고의 예술 형태로 추앙받아온 문학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문학의 위기가 운위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가의 죽음, 정전(正典)의 와해, 의미의 해체 등 한때 충격적이었던 말들이 이제는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문학의 위상에 대한 위기의식은 팽배해 있다. 멀티 미디어 시대, 정보화, 세계화, 디지털 혁명 등과 같은 슬로건의 홍수 속에 마치 속도전을 방불케 하듯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문학은 그 신속한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일까. 현실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시대 변화를 예견하며, 날카로운 비판으로 사회에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문학에 대한 요구는 이미 사라져버린 문학적 이상에 대한 향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현재 프린스턴 대학 명예 교수이며 작가로도 활약하고 있는 앨빈 커넌은 『상상의 도서관 : 문학과 사회에 대한 에세이』(1982)를 전후로 하여 시대 변화와 문학의 관계를 천착해왔다. 이어『인쇄 기술, 글자와 사무엘 존슨』(1987)을 펴낸 커넌은 『문학의 죽음』(1990)에서 ‘문학과 시대 삼부작’을 완성한다. 『문학의 죽음』에서 커넌은 특히 문학이 처한 ‘신념의 위기’를 다방면에 걸쳐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다. 커넌의 중심 테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 즉 워즈워스, 괴테, 발레리, 조이스 등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문학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문학을 인쇄 문화와 산업 자본주의의 산물로 고찰한다. 문학의 죽음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급진적인 정치적 기술적 사회적 시대 변화의 한 부분으로서 발생한, 사회 제도의 복잡한 변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풍부한 일화와 재치 있는 문체로 문학의 죽음을 다양한 동인―텔레비전, 컴퓨터, 테크놀러지, 저작권과 표절에 대한 법적 논쟁, 그리고 문학비평 자체―에 관련시키는 커넌은 이 세기말·세기초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과연 문학의 활력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숙고한다.
변화된 환경 속에 문학의 입지를 점검하는 광범위하고 지적인 분석
문학이 처한 위기에 대한 커넌의 진단은 통시적인 분석과 공시적인 분석을 동시에 적용하여 문학이 작금의 위기에 처하게 된 요인들을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탁월하게 드러내준다. 커넌은 낭만주의 모더니즘 문학의 해체를 전반적인 문화 혁명의 일부로서, 나아가 인쇄 문화를 전자 문화로 신속하게 변형시키고 있는 기술 혁명의 일부로서 고찰한다.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문학이란 그 출발부터 인쇄된 서적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쇄 서적에 기초한 문학은 그 권위를 잃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그 존재 자체를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읽고 쓰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시청각적 이미지,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화면이 가장 효율적이고 매력적인 오락과 지식의 원천으로서 인쇄 서적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인류의 역사를 정보 전달매체의 발달 단계에 따라 구어 시대, 문자·인쇄 시대, 전자 매체 시대로 나누고 있는 마샬 맥루한의 시대구분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전자 매체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문학이 주도적인 예술 양식으로서의 자리를 여타 전자 매체에 양보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변화를 커넌은 지극히 담담하게 수용한다. 탈산업화라는 사회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 법률, 종교, 국가 등 전통적인 기존 제도들이 와해되고 있는 마당에 문학에서 발생하고 있는 최근의 사건들이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커넌은 문학에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들을 미국 사회와 대학의 실례를 들어 생생하게 전달한다. 미국 성인 대다수가 일 년에 한 권도 책을 읽지 않으며, 교양의 수준은 점차 떨어지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수도 감소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저작권, 표절, 외설 시비에서부터 포르노 잡지의 소유주나 D. H. 로렌스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둘러싼 온갖 흥미로운 스캔들을 소개함으로써 문학이 처한 현실을 다방면에서 보여준다. 이와 같이 곤경에 빠진 문학에 대한 커넌의 대책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게 아니다. 책의 시대는 전자 시대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지만 우리가 여전히 두 가지 정보 전달 방식을 사용하고 이해해야 한다면, 말의 의미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거기에는 작가의 말(작품)도 포함된다는 것이 커넌의 전언이다.
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문학 내적 원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
문학 내적으로 볼 때, 문학의 위기는 18세기 이래로 문학을 보호해온 가장 근본적인 가치들에 대한 ‘신념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글쓰기와 예술 창조, 상상력의 예언적인 힘, 문학 텍스트의 완벽한 형식과 진리, 문학 언어를 통한 작가와 독자 간의 완벽한 의사소통, 문학작품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진실한 의미에 대한 믿음은 와해되었으며, 문학이 과학이나 혹은 다른 어떤 기능적인 담론 형식보다도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 또한 붕괴되었다. 문학은 이제 더이상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기록한 성스러운 신화이거나 혹은 본질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보편적인 발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자유의 파괴자이자 권위주의자로, 여성과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기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여겨지고 있다. 문학이 처한 상황을 가장 강도 높게 비판하고 기존의 문학적 가치들의 전복을 꾀한 것은 비평의 영역이었다. 현상학, 구조주의, 해체주의, 프로이트주의, 마르크시즘, 페미니즘 등은 기존 문학의 죽음을 선언하는 가장 요란한 목소리들이다. 이중에서도 해체주의는 전통적인 문학의 관점을 탈신비화하고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문학의 허식을 폭로하는 데 제일선에 서 있었다. 커넌은 비평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문학의 위기와 해체주의와의 관련을 설명한다. 해체주의는 기존의 낡은 문학의 권위를 해체하고 문학작품 속에 은폐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략들을 폭로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 자체를 폐기처분하는 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문학을 창조하고, 문학에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고 새로운 문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데 이바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커넌은 해체주의의 이러한 전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낭만주의 모더니즘 문학의 고전에 대한 해체에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커넌은, 새로운 문학이란 긍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통적인 문학작품을 총체적인 사회와 개인적인 삶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고 유용하게 위치시킬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본다.
문학이 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커넌은 해박한 지식과 실제적 예를 동원하여 문학이론과 철학뿐만 아니라 법과 예술, 문화적 사건 등 다방면에 걸쳐 그러한 위기적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하지만 커넌의 분석이 보여주는 가장 큰 미덕은 전통적으로 문학이 누려왔던 특권적 지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언어 자체에 대한 믿음을 고수한다는 데 있다. 커넌은 글을 쓰고 사고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문학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설사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문학 행위는 계속된다고 천명한다. 점점 더 대학이라는 테두리 속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와 소설을 읽고 쓰며,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끈덕지게 노력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커넌은 아직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기대한다. 『문학의 죽음』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 문학의 불안한 자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관찰을 토대로 한 설득력 있는 분석과 함께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준다.
앨빈 커넌(Alvin Kernan, 1923∼)
미국 맨체스터에서 출생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미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옥스포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1954년 예일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일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프린스턴 대학 명예 교수로 있으며 학자이자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마술가로서의 극작가 : 영국 연극에서 셰익스피어가 갖는 시인의 이미지』(1979), 『상상의 도서관, 문학과 사회에 대한 에세이』(1982), 『사무엘 존슨과 인쇄의 영향』(1989), 2차대전 참전 경험을 살린 자서전 『전선을 너머 : 한 수병의 2차대전 오디세이』(1997), 편저서 『인문학에 무슨 일이 생겼나?』(1997) 외 다수가 있다.